2012년 6월 24일 일요일

[들은 척 매뉴얼] 사랑과 전쟁



들어가며...

몇해전 딴지일보 게시판에 스리슬쩍 필자의 등장을 알린 글은 바로 '음악'에 대한 것이었다. 첫글을 나름 공들여썼던 것 같고, 너댓개의 리플이 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름 읽히겠거니 싶어 몇개의 글을 더 올렸으나, 몇개의 글들은 하나같이 죄다 외면 받았다. 나라도 내글에 리플을 달아야 하나 심히 고심했다. 정말 아무 재미도 없는 어떤 글들에도 왠 듣보들이 난입해 쓸데없는 리플을 주고받고 난리인 경우도 있는데, 내 글은 고요와 적막 그 자체였다. 다른 글들에서 논쟁하며 분통이 터진 이들이 내글을 열어보고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그냥 떠나는갑다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그 어떤 호응도, 그 어떤 문제 제기도 없었다. 하도 답답해서 '비틀즈의 전 멤버가 사실 여자였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려 준비하기도 했다. 하다못해 '듣보' 소리라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게시판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일기를 쓰는 것 같은 공허함이 찾아왔다. 난 그렇게 딴지의 게시판을 홀연히 떠났다. 아무도 찾는 이 없었다. 떠나는 길은 제법 가벼웠다.

1년 하고 몇개월이 지난 뒤, 필자 다시금 '음악' 얘기를 해보자는 구국의 용단을 내리고야 말았다. 이 한몸 던져 '읽은 척 매뉴얼'이라는 너불 편집장의 경전을 등에 지고, 거칠은 가시받길 다시 한걸음 내딛고저 출사표를 내던진 것이다. 다른 필진인 춘심애비님의 빨간펜 컨설팅과  필독 부편집장의 독촉에 힘입어 드디어 '들은 척 매뉴얼'의 서막을 알리는 '마이클 잭슨'편을 인고 끝에 탈고할 수 있게 되었다. 미리보기 창을 띄워 놓고, 창밖 깊고 푸른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심연의 어둠과 적도의 고요함이 마치 1년하고 몇개월전 내가 써올린 게시판의 글을 보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조땔 것 같은 비운의 불안이 스쳤다. 그 어느때보다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불안은 용기를 잠식하고도 남았다.

'아이고.. 아이고.. 너클님. 내용이 제법 괜찮으니 다음주 중에 함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스마트 폰 넘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필독 부편집장의 목소리는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았다. 마무리는 늘 그랬듯이 '다음 글 내놔라'였다. 지금 막 써서 넘기면 좀 있다 전화해 '다음편 거의 다 쓰셨죠?'라 묻는다. 가끔은 졸라 무섭다. 진짜다. 헌데 이 무지막지한 부편집장은 그렇게 독촉을 해대면서도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다.




딴지일보의 부편집장이 독자들을 상대로 리플 앵벌이, 아니 리플 상납을 뻔뻔하게, 노골적으로, 염치없이, 줏대없이, 가오없이, 기타등등...  대놓고 요구하는 사상 초유의 일을 벌인 것이다. 게다가 700개의 리플이 달리믄 '하겠다'가 아니라 '고려해보겠다'는 '아님말고'식의 멘트와 편집장의 리플 1개는 100개로 친다(편집하느라 고생한 카인기자는 달랑 2개로 쳐줌)는 다분히 중세 신분제적인 발상에서 비롯한 꼼수도 숨어있었다. 그래 모두들 나처럼 알아채겠지. 이렇게 대다원의 막을 지리멸렬하게 내리는게 좀 안타깝기도 했다. 진짜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뿐하게 리플은 700개를 넘어서고야 말았다. 그렇게 가볍게 리플 700개가 넘어가는 건 본적이 없었다. 눈을 의심했다. 천개가 넘어서는 모습을 본 후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나역시 로그인을 하고야 말았다.




호평일색의 댓글 속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단연 돋보적인 리플을 결국 나도 달고야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깐. 리플이 천 하고도 몇백개가 더 달릴 무렵, '들은 척 매뉴얼'은 마빡 업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거침없이 쭉쭉 치고나가는 세바스찬 베텔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F1 드라이버들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문득 탈고하고 바라보았던 서쪽하늘이 떠올랐다. 즉시즉종(卽始卽終) 새로운 유형의 연재가 탄생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그냥 조용히 짐을 싸기로 했다. 업데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4박 5일의 출장길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

볼품없는, 그것도 '음악'을 소재로 한, 게다가 너불 편집장의 '읽은 척 매뉴얼'을 대놓고 패러디, 아니 배낀 '들은 척 매뉴얼'에 대한 독자제위덜의 열화와 같은, 아니 캄브리아기 대폭발과 같은 성원에 폭풍감동을 받았슴을 솔직하게 알리는 바다. 테무진 마지막편의 1/60 수준의 리플가지고 폭풍감동하고 자빠졌다고들 마시라. 필자의 첫 글에 비하면 무려 7배의 관심이이다. 그거믄 되었다. 필독 부편집장의 '다음 편 빨리 내놔라'는 연통이 슬슬 들어오는 걸 보니 나름 선전한 듯 해 뿌듯하기까지 하다.

다시한번 독자제위덜께 감사의 마음 전한다. 더불어 초기 컨셉에서 지금의 컨셉으로 좌표 변경을 가능케 한 춘심애비님의 조언과, '안쓰면 조때겠다'는 자각을 심어준 필독 부편집장의 독촉에도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야심차게 준비한 2탄은 바로... 두두둥...

'사랑과 전쟁' 되시겠다.





시작하기 전에...

세상엔 사랑도 있고, 전쟁도 있다. 만남도 있고, 이별도 있다. 뭐 그렇다. 누구가 사랑을 원하고 만남을 원한다. 가끔 무작정 전쟁, 이별 같은 것만 원하는 무식하고 탐욕스런 넘들도 있지만 뭐 세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보고싶은 건만 볼 수 있지만 보고 싶은 것만 벌어지지는 않는 다는 것. '사랑과 전쟁'과 같은 프로가 '선정적'이내, '저질'이내 하면서도 시즌제로 장수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 그럼 케이스 바이 케이스. 우선 훈훈한 케이스부터 함 디벼보자.



4주 후에 봅시다.


사랑...

필자가 태어나기 1년전인 1976년 아일랜드. 열네살이었던 래리 뮬렌은 자신의 다니는 마운트템플 고등학교 게시판에 '나는 밴드를 결성할까 한다. 나와 뜻이 같은 넘들 모여라'는 공고를 올린다. 그 공고를 본 몇몇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딱히 포지션도 정해지지 않은 밴드가 결성된다. 그 중 한놈아가 '기타는 내가 좀 튕겨 볼께'하며 나섰다. 하지만 기타를 잘치는 친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보컬을 맡게 되었지만 이제 막 시작한 그의 목소리는 별 볼일 없었다. 오히려 보컬 때려치우고 매니저가 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연습에 연습을 거쳐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의 4인조 밴드 진용을 갖춘 그들은 The Hype란 이름으로 오디션에 참가한다. 그러나 The Hype란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았던 그들은 밴드명을 바꾸고 몇년간의 연습 끝에 데뷔, 몇장의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4명의 친구가 상의한 새로운 밴드명은 록히드 마틴사의 정찰기 모델명이었다. 딱히 뭐 대단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4명의 친구는 몰랐다. 새로 바꾼 밴드명이 지구촌 음악팬들의 머릿속에 기억될 거라곤 말이다. 그 이름은 바로 U2였다.


풋풋함.


1987년 발표한 Joshua Tree를 시작으로 최고의 밴드 반열에 올라, 대중적, 음악적 성취 모든 것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들의 멤버쉽이다. 멤버들은 스스로를 '네발달린 테이블'이라고 부르곤 한다. 작사는 보노가 주로 하지만 작곡은 멤버 전체가 함께 임하기 때문이다. 멤버 모두가 밴드를 '공동체'라 인식한다. 2003년, 2005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오른 보노가 가장 튀어보이긴 하지만 밴드 멤버는 물론 매니저까지 비슷한 사회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어 갈등이 벌어지진 않는다. (매니저인 폴 맥기니스는 폴 맥카트니를 화끈하게 비난한적이 있다. 폴 맥카트니와 같은 돈 많은 슈퍼스타가 비자카드에 후원받으며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공연 예매를 비자카드만 되게 하믄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본다는 궁색한 변명이나 늘어놓는다는 이유에서 였다.) 


'저는 한 밴드의 멤버들이 성실함을 잃지 않고, 서로에게 충실할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우리가 깨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음악... 그러러면 돈의 힘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겠죠.'  ---- 보노

이렇게 멤버는 물론이요, 매니져까지 공통적인 가치관으로 똘똘뭉친 그들은 1976년 결성이후 심각한 불화도, 멤버의 변동도 없었다. 더욱이 변함없는 그들의 음악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랑이 있으면 전쟁도 있는 법. 이렇게 훈훈한 '들은 척'만 늘어놓게 되면 자칫 꼰대 취급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게다가 '니는 절대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며 뜬금없이 공격받게 될 수 도 있다. 그러한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고, 더불어 싸움구경, 불구경 좋아하는 우리 전통의 계승차원에서 살짝 반대의 경우를 들이대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들은 척은 보장한다 할 수 있겠다.



전쟁...

1990년대 초반, F1은 급격한 인기 상승은 아일톤 세나라는 슈퍼스타의 등장으로 가능했지만, 동시에 같은 팀에서 활약하며, 1-2위를 다투고, 때론 서로를 비난했던 알랭 프로스트와의 갈등도 한 몫을 했음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다. 같은 팀 동료이면서 동시에 가장 살벌하게 경쟁하고, 서로를 디스하기 바빴던 그들. 전세계 팬들은 그들의 환상적인 실력만큼이나, 시시때때로 벌어진 디스베틀을 흥미로워 했다. 사실 싸움구경이 더 즐거운 법 아니던가. 음악계에도 그런 밴드가 있었으니 바로 오아시스다.

1993년 노엘 갤러거, 리암 갤러거 형제를 중심으로 결성된 오아시스는 2009년 해체한다. 영국밴드로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등 분명한 성취가 있었으나 이 밴드의 역사는 갤러거 형제의 다툼과 화해의 역사이기도 했다. 노엘이 밴드를 탈퇴해 실질적으로 밴드가 해체될 때 드러난 이유는 '리암의 보컬이 존나 형편없다'는 노엘의 분노(?)였지만 이들의 갈등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경호원은 리암과 나를 떼어놓기 위해 고용됐다'고 노엘 갤러거가 대놓고 말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형제애.


유명한 일화 하나 더. 노엘 갤러거는 그들의 최고 히트곡 'Don't look back in anger'를 만든 후 자신이 부르고 싶었지만, 보컬인 동생 리암이 자신에게 양보하지 않을 듯 했다. 노엘은 안되겠다 싶어 다른 곡 'Wonderwall'를 자신이 부르겠다 꼬장을 피자 리암이 그곡은 안되니깐 'Don't look back in anger'를 노엘에게 양보 했다는 것이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인데도 이러고 있었다. 이 형제의 갈등으로 결국 밴드는 해체되었는데, 서로의 기타를 막 때려부수고 지랄을하다 결국 노엘이 '씨바 다 조까' 그러고 탈퇴했다는 설도 있다. 어쨋거나, 오아시스는 아무렇지 않게 해체, 노엘 갤러거는 솔로와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의 서포터를 병행(진짜 졸라 광팬이다), 리암과 나머지 멤버들은 비디아이로 활동하고 있다.



이쯤에서 U2의 음악이 흘러나올때나,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면, 일단 가볍게 그들을 멤버쉽 역사로 '들은 척'을 푼다. 그리고 '어디 세상사 다 그리 좋은 것들만 있게는가'라는 가히 득도틱한 멘트를 던진다. 그리도 정반대의 케이스를 살짝 들이댄다. 여기까지 제대로 들은척을 시전한뒤 본 게임은 지금부터라는 듯한 표정이 지어보이자. 모든 플레이엔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이쯤에서 이런 멘트를 던지는 것이다.


'사실  그런 경우가 좀 있죠'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들은 척 매뉴얼.




PLAYLIST

  1. Hotel Califonia - Eagles (1976. Hotel Califonia)
  2. Wasted Time - Eagles (1976. Hotel Califonia)
  3. Bridge Over Troubled Water - Simon and Gafunkle (1970. Bridge Over Troubled Water)
  4. El condor pasa - Simon and Gafunkle (1970. Bridge Over Troubled Water)
  5. Dacing Queen - Abba (1976. Arrival)
  6. The Winner Takes it all - Abba (1980. Super Trouper)

이글스, 사이먼 앤 가펑클, 아바. 모두 70년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들이다. 그러나 화려한 정점을 찍고는 모두 헤어졌다. 레드제플린처럼 멤버가 사망한 어쩔 수 없는 이유는 아니었다. 모두 불화였다. 이글스는 돈 헨리와 글렌 프라이 콤비의 활약과, 돈 펠더의 영입을 통해 국민밴드가 되어가고 있었고, 동네 XX친구인 사이먼과 가펑클은 세계적인 포크 듀오의 자리에 올랐으며, 아바의 인기는 비틀즈 다음이었다. 그렇게 모두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영원하진 않았다.

'나는 가펑클에 맞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가펑클이 부를 노래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죠. 하지만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에 대중이 모두 가펑클에게만 환호하는 듯했습니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의 성공 이후 모든게 끝났습니다. 너무 젊었던 탓에 그 순간에 인생이 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트 가펑클과 헤어지고 난 폴 사이먼의 말이다. 이글스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이별에 경쟁과 열등이 작용했다면, 아바의 이별은 그것과 좀 달랐다. 밴드를 이루는 두쌍의 부부가 모두 이혼했지만, 음악을 만들었던 두 남자, 비욘과 베니 콤비는 여전했기 때문이다.

아바가 평론가들에게 외면받았던 이유라든지, 이글스 최고의 앨범 Hotel Califonia에 담겨진 미국사회의 성찰에 대한 내용이라든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음악이 전통적인 포크와 어떻게 같고 또 다른지, 뭐 이런 것들은 임진모 선생이나, 배철수 선생에게 묻도록 하자. 우리는 이글스가 잘 나가다 어떻게 깨졌는지, 사이먼과 가펑클이 왜 빠이빠이를 했는지, 아바가 해산할 때 도대체 뭔일이 있었는지 바로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다시한번 '들은 척 매뉴얼은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할 뿐더러, 동시에 실패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차분하게 Josh Groban & Brian McKnight 버전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함 듣고 시작하자.





들은 척 세부 스킬.


Hotel California
어두워진 사막의 고속도로. 시원한 바람이 내 마빡에 스치운다.
훈훈한 클리타스 스뭴이 대기중에 퍼져가네.
저 멀리 어딘가. 난 한들거리는 불빛을 발견했쥐.
머리가 슬슬 둔탁해지고, 시야는 흐려져만 가.
하룻밤을 묵기위해 거기서 멈춰야만 했어
 
**클리타스(colitas)의 뜻은 함 찾아 보시라.

내가 하룻밤을 어디서 묵었냐고? 그곳은 바로 '호텔 캘리포니아'다. 그렇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밴드 이글스(Eagles)의 1976년작 Hotel California에 수록된 동명 타이틀곡 'Hotel California'의 한소절이다. 이글스는 이 앨범으로 밴드가 성취해야할 대부분을 이뤘다. 앨범은 8주간 1위를 달리며 천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으며, 그래미 주요부분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했다. 멤버들 조차도 의아할 정도의 성공이었다. 


그들의 시작은 린다 론스태드의 백밴드였다. 백밴드 멤버였던 돈 헨리, 글렌 프라이, 랜디 마이즈너, 버니 리든이 의기투합해 이글스를 결성한다. 그리고 슬슬 활동을 시작하더니, 2집 발표 후 린다 론스태드가 자신들이 발표한 곡(Desperado)을 부르게 되는, 백 밴드가 아닌 주목받고, 인정받는 밴드의 자리에 오르는 상황이 된다. 이어 앨범 Hotel California라는 슈퍼히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성공의 결정은 계기는 아마도 버니 리든을 대신한 기타리스트 조 월시의 영입일 것이다. 롹밴드 제임스 갱 출신인 그로 인해 이글스의 색깔이 컨츄리에서 롹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그 과정의 결과물이 바로 앨범 Hotel California였다. 이글스와 조 월시의 만남은 이렇게 완벽하고,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1994년 재결성당시 이글스. 가장 왼쪽이 조 월시. 가장 우측이 돈 펠더

화려한 쌍기타 듀오인 조 월시와 돈 펠더. 하지만 돈 펠더는 조 월시가 맘에 들지 않았다. 조 월시로 인해 밴드의 색깔이 바뀌는 것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고의 쌍기타 플레이가 가능했던 이유. 틀어진 사이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Hotel California'는 조 월시의 가입으로 위기감을 느낀 돈 펠더가 30분이 넘는 대곡을 샘플로 가져오자, 돈 헨리와 글렌 프라이 콤비가 가다듬어 만든 곡이다. 후반부 쌍기타 플레이를 가만히 듣고있자면 서로 막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것 같기도 하다. 조 월시는 이렇게 말했다.

'마치 둘이 경쟁하듯 저돌적인 에너를 담고 서로를 향해들이 댔다. 'Hotel California'의 기가막힌 연주는 그 덕분에 가능했다'

조 월시와 돈 펠더의 균열은 곧 밴드 전체의 분열로 이어졌다. 찰떡 궁합이었던 돈헨리와 글렌 프라이도 사이도 이미 틀어져있었던 것이다. 이글스는 한장의 앨범을 더 발표한 뒤 공식적으로 해체한다. 82년의 일이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1957년 Hey schoolgirl라는 곡으로 톰과 제리(Tom&Jerry)라는 듀오가 데뷔를 한다. 톰과 제리는 실패를 거듭하여 만남과 이별을 되풀이 한다. 톰은 헤어진 동안에도 솔로로 활동하며 송라이터가 되기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제리는 뭐 틈틈히 노래 연습하면서 대학생활을 즐겼다. 그러던 중, 그들의 실패한 1집 앨범의 프로듀서 톰 윌슨이라는 양반이 톰과 제리에게 말도 않고 그들의 곡을 지멋대로 편곡해 발표한다. 헌데 '어머나' 그곡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이름이 알려지자 톰과 제리는 재결합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 '졸업'의 사운드 트랙에 참여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더니, 1970년 최고의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바로 Bridge Over Troubled Water. 톰과 제리로 시작한 이 듀오의 이름은 바로 사이먼 앤 가펑클이다.


Fire Egg Friend 인증샷.


앨범 Bridge Over Troubled Water 천만장에 가까운 성적을 올렸다. 동명 타이틀 곡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물론이요, The boxer, Cecilia, El condor pasa등이 연속으로 히트하며 그래미 6개부분 수상이라는 당시 최고 기록을 세운다(복습: 훗날 마이클잭슨에의해 이 기록은 깨진다). 최고의 성공과, 성취였다. 폴 사이먼의 송 라이터로서의 역량과 아트 가펑클은 아름다운 목소리는 최고의 조합이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이들 역시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숨막히는 멜로디. 아름다운 가사. 환상적인 하모니. 그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녹음할 당시 사이먼과 가펑클의 균열은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가펑클은 사이먼의 능력에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고(훗날 헤어진 후 솔로공연을 하던 아트가펑클은 '이곡은 폴 사이먼이 만든 노래가 아니다'고 멘트했을 정도였다), 녹음 중에 해외로 영화촬영을 가기도 했다. 한간에 폴 사이먼은 'Bridge Over Troubled Water'을 만들고 아트 가펑클에게 부르라고 했으나, 아트 가펑클은 오히려 사이먼에게 부르라고 했단다. 서로를 위해 그랬다고 하기도 하고, 서로 자기가 부르겠다고 다퉜다고 하기도 한다. 결국 아트 가펑클이 부르게 되었고, 엄청난 히트를 치게 되자 폴 사이먼이 땅을치고 후회했다고도 한다. 물론 백뿌로 확인 된 건 아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이 앨범을 끝으로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많은 팬들이 그들의 노래를 듣고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보자 의지는 다지는 동안, 그들 사이의 다리는 이미 붕괴되어 철거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화 '톰과 제리'의 주인공인 톰과 제리도 결국 이별했듯이, 뉴욕출신 톰과 제리 역시 그렇게 이별하고 만다.






The Winner Takes It All

1976. U2가 고등학교에서 밴드를 결성할 무렵. 아그네사, 애니프리드, 베니, 비욘으로 구성된 스웨덴 그룹 아바(ABBA)는 그해 발표한 앨범 Arrival에 수록 그 유명한 춤의 여왕(Dacing Queen)으로 첫 빌보드 1위를 달성했다. 이듬해 스웨덴 기업 중 최고 수익을 올린 기업은 볼보로, 90억이었다. 그리고 아바의 수익은 110억으로 스웨덴 수입 '갑'을 차지하게 되는 상상키 힘든 기록을 남긴다. (사실은 2위였다는 설도 있다. 스웨덴 정부가 자국이 문화강국임을 알리기 위해 일부로 순위를 바꿨다는 것이다). 1973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등장하며 순식간에 세계적인슈퍼스타의 자리에 오른 아바. 그들의 시작은 다름아닌 '사랑'이었다.


아바를 결성하기 전, 비욘과 베니는 자작곡 파트너였다. 그렇게 몇해를 알고 지내던 중 비욘은 한 텔레비젼 쇼에서 당시 잘나가던 여성 싱어 아그네사를 만나게 된다. 같은 시기 베니 역시 콘테스트 출신인 애니프리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을 키우게 된다. 1971년 비욘과 아그네스가 결혼, 베니와 애니프리드는 약혼, 동거에 들어간다. 이렇게 두쌍으로 부부로 아바는 탄생하게 되는데, 이름 역시 돈독했던 관계처럼 자신들이 이름 앞글자를 따 ABBA로 정하게 된다.


당시 스웨덴엔 같은 상호의 통조립 기업이 있었으나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아바는 대신 B를 하나 뒤집어 사용했다. 이렇게 탄생한 아바는 1973년 유로비젼 송 콘테스트 스웨덴 예선에 참가하지만 3위를 차지하며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다. 스웨덴 예선 당일은 사실 아그네사의 출산 예정일이었다. 예선을 마치고, 아그네스의 순산과, 산후조리가 완벽하게 마무리 된 1974년 스웨덴 대표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 영국대표로 참여한 올리비아 뉴튼 존을 제치고 'Waterroo'로 1위를 차지한다. 스칸디나반도의  두 부부가 유럽은 물론이요, 전세계의 스타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선포와도 같았다. 그들은 머지않아 미국 정복은 물론이요, 러시아에서까지 앨범이 고가에 밀거래되는 진짜 슈퍼스타가 된다. 


부부친목계가 아니고 ABBA.


아바의 열풍은 70년대를 넘어 80년대를 향하고 있었다. 오랜 동거를 했던 베니와 애니프리드가 78년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려 팝스타에게선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부부애를 팬들에게 확인시켜주는 듯 했으나, 몇 달 뒤 비욘과 아그네스가 이혼 수속을 밟기 시작한다. 이듬해 비욘은 이혼의 아픔을 담아 술김으로 1시간만에 The Winner Takes it all을 써재낀다. 스튜디오에서 아그네스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곡으로 유럽 각국에서 1위, 미국에서 7위를 거둔다. 하지만 이곡이 사실상 그들의 마지막 히트곡이었다. 81년 베니와 애니프리드 역시 갈라선다. (비욘과 아그네스는 '육아'문제로 인한 갈등 때문이었고, 베니와 애니프리드는 원래 다툼이 심했다고 한다. 뭐 부부간의 일, 당사자 아님 누가 알겠는가.)


두 부부의 이별과 함께 밴드의 인기역시 하락. 83년 공식 해산한다. 사랑하는 두쌍의 부부로는 가능했으나, 헤어지 네명의 돌싱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부부간의 사이는 물론이요, 환상적인 화음을 보여준 아그네스와 애니프리드는 불화도 심각했다. (아그네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받고 자랐고, 애니프리드는 사생아에 힘든 유년기를 보낸, 애초부터 잘 맞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비틀즈 다음의 성공은 누구냐?'는 질문에 존 레논은 망설임없이 '아바'라 답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슈퍼밴드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


이글스는 1994년 MTV가 주최한 Uplugged공연을 통해 컴백한 후, 투어를 통해 다시한번 슈퍼밴드임을 확인했고,(현재 조 월시와 경쟁했던 돈 펠더는 탈퇴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1981년 그 유명한 50만명이 운집한 뉴욕 센트럴 파크 공연등 종종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2000년 투어조건으로 10억달러를 제안받았으나 '쌩'깐 아바의 재결합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헤어진 연인이 친구사이가 되지 못한다는 일부 의견을 증명하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여전히 뮤지컬, 영화로 '맘마미아'의 흥행이 계속되고 있으니 뭐.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 옛말로 깔끔하게 들은 척을 마무리 하도록 하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들은 척 매뉴얼을 깜지 백장 페이스로 숙지했다고 하더라도, '들은 척' 은 넘치믄 조땐다. 같은 자리에 진정한 고수가 있다면 언제든 튈 준비를 하자.  아무쪼록 이번에도 독자 제위덜의 성공적인 '들은 척'을 기원하는 바다.



추신.
자료를 찾다보니 SG워너비의 'SG'가 사이먼 앤 가펑클처럼 되고 싶다는 의미라는데... 난 그말이 뭔소리인지 아직 이해를 못하고 있다.



딴지뮤직 수석쉐프
너클볼러


2012년 6월 11일 월요일

[들은 척 매뉴얼] 마이클 잭슨


들어가는 척 하며… 아니 들어가며…

들은 척’이란 대개의 경우는 고의로, 아주 드물게는 착오에 의해 어떤 곡을 전혀 듣지 않았음에도 들은 것처럼 행세하는 모든 행위의 통칭이라 정의할 수 있다. 도박판의 판돈이 원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듯 어떤 유형이로든 들은 척을 시작하게 되면 그 결과는 득이 될 수도 있고, 실이 될 수도 있다.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사람들의 지위에 대한 집착은 곧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한 수단을 확보하기 위함에 있다고 분석했다. 어쩌면 들은 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도는 이 이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요컨대 들은 척의 성공 여부가 가져다 주는 득실은 개인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기대감과 정확히 비례하는 그 무엇이라 하겠다.


'척' 계의 코란.


대부분 딴지 독자 제위들께서는 ‘척’ 보고 알아챘을 것이다. 위 서문은 바로 트위터 플픽과 실제의 모습과의 싱크로율 백뿌로를 자랑하는 너부리 편집장의 불후의 저서, <<읽은 척 매뉴얼>>의 서문을  ‘책’을 ‘곡’으로, ‘읽은’을 ‘들은’으로만 바꾼 바로 그것이다. <<읽은 척 매뉴얼>>이 무엇인가? 서문이 좋으면 본론이 개판이라는 ‘용두사미즘’마저 과감히 부정한 위대한 저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척’계의 코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척’을 아우르는 경전인바, 서문의 감동이야 이루 말할나위가 없겠으나, 트위터 플픽과 실제의 싱크로율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요지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너무 그러지들 말자. 외로운 게 싫다고 호소하지 않나. 그게 정 싫으면 실제로 함 보고 말하자. 그리고 사람 너무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하는 거 아니다. 더욱이 연재될지 안될지 모를 본 시리즈, 대놓고 <<읽은 척 매뉴얼>>의 왕창 오마주인 바. 이 기획이 모두 다 너부리 편집장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니 이해하고 또 이해하자.


어떤게 플픽이게?



3천만을 위한 매뉴얼.

5월 14일자 이동통신 업계에 따르면 11일 기준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는 2천672만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이동전화 가입자 5천255만명의 50.84%로 절반을 넘어선 것이다. 이거슨 언제든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어재낄 수 있는 사람 수가 무려 2천672만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 매뉴얼은 바로 2천672만명, 아니 반올림해 3천만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단순 감상자는 물론이요, '옆에 있는 아리따운 여인 귓구녕에 이어폰 한 짝 대뜸 꽂아 넣기'등의 응용기술을 시전하는 고급사용자들을 위한 매뉴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듣고 느낀다는 본질적인 기능을 뛰어넘어 ‘척’계의 경전 <<읽은 척 매뉴얼>>를 베이스로 하여 연인 사이에, 친구 사이에, 동료 사이에, 듣보 사이에 다양한 응용기술을 가미할 수 있는 음악계의 초연히 등장한 하이브리드 ‘본류’이자 그 어떤 쉐프도 듣도보도 못한 극강의 레쉬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 가슴 떨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이고, 위대한 등장과는 달리 사용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등장하는 뮤지션, 혹은 곡들에 얽힌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꼼꼼히 읽어 내려간다. 그리고 관련된 곡들을 음미하듯 감상한다. 얼마 전 우리 쉐프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음식의 맛은 말이죠. 미각보다 후각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해요’ 그렇다. 와인의 진정한 맛도 와인 잔에 코를 쑤셔 넣고 ‘큭큭’해야 느낄 수 있듯 먹고, 씹고, 맛보고, 즐기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후각과 미각을 총동원하여 맛의 본질에 접근하듯, 한곡 한곡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복기하며 듣는다. 일종의 청각을 통한 이미지프로세싱, 득도의 과정인 것이다.


소개한 곡들을 앨범을 사거나, 제값(?)주고 다운받아 스마트폰에 집어 넣는다. 그리고 듣는다. 자신의 나와바리에서는 이어폰이나 오디오를 통해 틀어놓고 들은 척을 하거나, 음식점이나 술집 같은 공개된 장소의 경우, 학습한 곡들이 나올 때 잽싸게 들은 척 하시면 된다. 행여나 자신을 들은 척을 뛰어넘은 내용들을 나오게 되면 긴장들 마시고 이어폰을 잡아 빼거나, 잽싸게 ‘더 좋은 곡 들려 줄께’라는 멘트와 함께 다음트랙으로 넘기면 된다. 공개적인 장소에선 갑자기 '똥 마렵다'는 핑계가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대응방법 되겠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성공은 보장 못한다.


드디어 딴지 뮤직에서 본격적으로 제공하는 들은 척 매뉴얼의 시작을 가열차게 알리는 바다. 5월은 가정의 달. 살짝 늦었지만 - 뭐 언제 우리가 따박따박 시기 맞추고 그랬던가 – 가정의 달 특집이자, 슈퍼스타 추모 특집이다.  그래 봐야 <읽은 척 매뉴얼>의 대놓고 오마주이면서 뭐 그리 대단하게 호들갑이냐고? 그게 궁금하신가? 그 이유는 우리 함께 ‘진실과 사실 사이의 촘촘한 경계’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싫음 말고…


자. 그럼 이 영광스런 시작의 주인공은 바로... 팝의 황제. 상처입은 영혼 마이클 잭슨 되시겠다.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1958년 8월 29일 - 2009년 6월 25일)



시작하기 전에...




지금으로부터 3년전, 락앤롤 명예의 전당 기념 콘서트에 등장한 스티비 원더. 비비 킹, 스모키 로빈슨, 스팅, 제프 벡과 같은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과 함께 자신과 함께하는 뮤지션의 히트곡을 불렀다. 제프 벡과 스티비 원더와 함께 부르는 'Superstition'을 상상해보라. 뭐가 막 벌렁벌렁 그런다. 스모키 로빈슨이 내려가고 올라온 존 레전드, 스티비 원더는 존 레전드의 피아노에 맞추어 마이클 잭슨의 'The Way You Make Me Feel'을 부른다. 2절을 후렴을 부를 즈음 그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불과 몇달전 세상의 떠난 팝의 황제 마이클잭슨이 사무치도록 그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 그렇게 소울의 신은 팝의 황제에게 또다시 작별인사를 건냈다.


마이클 잭슨의 1982년작 'Thriller'의 프로듀싱에 참여한 슈퍼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2009년 마이클 잭슨을 허망하게 떠나 보낸뒤 이렇게 말했다.

"이 뛰어난 아티스트는 발소리 나지 않는 고양이 같은 우아함으로 무대를 누볐고, 음반업계의 기록을 경신했으며, 세계 전역에서 문화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어디 그뿐인가. 혹자는 마이클 잭슨이 있었기에 오바마의 당선도 가능했다고도 한다. 단일앨범 1억 1,000만장(2위 AC/DC의 Back In Black 4,900만장), 10장의 정규앨범 통틀어 7억 5천만장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의 보유자. 그래미 19회, 아메리칸 뮤직어워드 13회, 빌보드 어워드 40회 수상. 13곡의 넘버원 싱글등. 11살의 나이 'I Want You Back'으로 최연소 빌보드 차트 1위를 한 뒤로 늘 정상에 있었던, 더 떠들어봐야 내 주댕이만 아픈 그야말로 저스트 팝의 황제. 이런 슈퍼스타의 경우, 무지막지한 필모그래피에 대해 어설프게 들은 척 했다가는 자칫 조때는 결론에 '어서옵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아무리 이 매뉴얼을 달달 외운다할지라도 결코 ‘임진모선생’이나 ‘배철수선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여 이런 경우 '들은 척'의 정도가 아닌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길이 아니면 돌아가는 거다.


마이클 잭슨. 그를 직접 보고, 들은 세대들에겐 당연 그의 이전에도, 그의 이후에도,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팝의 황제 그 자체이겠으나, 그를 보고 듣지 못한 세대들에겐 서서히 낯선 이름이 되고 있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아니 마이클 잭슨을 모르다니’라며 호들갑 떨지 말자. 누군가에겐 ‘문워크’는 양준혁의 홈런 쒜레머니(할라면 제대로 하든가)로 기억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니 말이다.


문워크를 모독한 양준혁의 쀍스텝


마이클 잭슨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2009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힘들게 복귀를 준비하던 시점이었다. 게다가 계속된 성형으로 인한 부작용과 결혼 실패, 아동 성추행 혐의등으로 팝의 황제라는 수식어에 깊은 상처를 입고 난 뒤였다. 아마 그의 음악 먼저 접하지 못했던 많은 이들에게 마이클잭슨은 성형 부작용으로 인해 마스크에 얼굴을 숨기고 다니는 흉칙한 정신이상자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언론은 마스크와 모자 속에 숨은 그의 모습을 헤드라인으로 뽑아냈다. 팝의 황제가 팝계의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클잭슨 사망 3주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 5월은 가정의 달.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몇곡 함께 들으며, 많은 이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느라 정작 자신은 외로웠던 슈퍼스타를 떠올려보자. 세계가 인정한 슈퍼스타였고, 동시에 가장 불우한 아들이기도 했던 마이클 잭슨. 입이 슬슬 간지러워들 지시는가. 그래도 참자. 매뉴얼 정독 후 들은 척해도 늦지 않는다.




들은 척 매뉴얼

PLAYLIST

  1. Billie Jean (Thriller. 1982)
  2. Beat It  (Thriller. 1982)
  3. Thriller  (Thriller. 1982)
  4. Bad (Bad. 1987)
  5. The Way You Make Me Feel (Bad. 1987)
  6. Man In The Mirror (Bad. 1987)
  7. Black Or White (Dangerous. 1991)
  8. You Are Not Alone (Dangerous. 1991)

마이클의 음악에 맞추어 춤도 출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고... 그리고 '음음음'도 할 수 도 있다. (제인 폰다)


위의 7곡은 마이클잭슨의 수많은 히트곡 중, 그러니까 춤추 출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고, '음음음'도 할 수 있는 흑과 백, 동과 서를 넘나드는 완벽한 크로스오버 트랙 중, 메가 히트곡정도가 되겠다. 이 정도의 히트곡으로 들은 척은 가능하다. 거기에

'Beat It'의 기타는 밴 헤일런의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의 작품.
'Black or White'의 기타 인트로는 건스 앤 로지스의 기타리스트 슬래쉬의 작품.
'Billie Jean'의 뮤직비디오는 MTV에서 방영된 흑인 첫 뮤직비디오.
'Human nature'는 몇년 뒤 여성 3인조 SWV의 'Right Here'로 샘플링되어 인기를 끔.

이런 내용들을 겯들인다면 들은 척은 더욱 감질날 수 있다. 더불어 초기 앨범은 퀸시존스, 후기 히트작 Danerous는 블랙스트릿의 멤버이기도 한 테디 라일리가 프로듀싱했다는 사실들을 뜬금없는 던져 먹혀들어간다면 당신은 순식간에 짝퉁임진모선생정도의 대접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히 일부의 선곡을 가지고 들은 척을 했다가는 ‘폴 메카트니가 작곡해준 Girlfriend 같은 곡은 어떻냐?’는 질문에 ‘폴메카트니가 뭐요?’라 되 물음으로서 허망하고, 개망신스럽게 종결될 수도 있다. 들은 척의 백미는 모르는 부분에선 과감히 침묵을 지키다, 들은 척이 가능한 미묘한 구녕을 파고들어 대화를 완벽히 주도한 뒤 홀연히 빠지는 ‘치고 빠지기’ 전술에 있다. 일단 마이클잭슨에 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면 차분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던진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 잘못 만나믄 천하의 마이클도 조때는 거죠.’

이제 청중들은 ‘이게 뭥미’스럽게 당신을 바라볼 것이다. 이제 무대는 당신의 것. 시원스럽게 들은 척을 시전한다.




들은 척의 세부스킬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나자, 팝계는 그를 추모하고, 동시에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사건과 오해들로 그가 성취한 음악적 업적마저도 듣보 취급당했기 때문이었다. 판권문제로 사이가 틀어졌던 폴 메카트니도 ‘잭슨과 함께 작업했다는 것 자체가 곧 특권을 누린것이다’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런 추모와, 재조명의 분위기 속에서도 유일하게 욕을 처묵는 분이 계셨으니 그분은 바로 마이클 잭슨의 친아버지 조 잭슨이었다. 아들 마이클 잭슨이 죽은 뒤 얼마되지 않아, 카지노를 들락거리고, 대놓고 죽은 아들의 판권 장사를 하겠다 떠들어대고, 아들이 재산의 일부를 자신에게 달라는 소송을 내고 자빠졌기 때문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능력 밖의 일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부모를 고르는 것이었다.

'나는 벨트로 채찍질을 했을 뿐이다. 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리는 것은 몽둥이로 후려 치는 것을 말한다.' 

-조 잭슨. 2005년 AP와의 인터뷰중-


마이클 잭슨은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클라니넷 연주자임과 동시에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고, 아버지는 크레인 기사이자, 밴드 팔콘스의 기타리스트였다. 아버지 조 잭슨은 만개하지 못한 음악인으로서의 꿈을 자신의 자식들을 통해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그 대리만족의 도가 지나쳤다.


못난 애비상 수장자. 조 잭슨


자신의 대리만족을 이뤄줄 만큼의 재능이 자식들에게 있다고 판단한 조 잭슨은 찬장 구석에 숨겨놓은 자신의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 악기를 구입한 뒤 자식들에게 악기와 함께 지옥훈련을 선사한다. 마이클 잭슨은 훗날 오프라윈프리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는다.


'8살 때부터 쉼 없이 일했다. 아버지만 보면 무서워 토할 것 같았다'


채찍을 들고 앉자 아이들을 연습시켰던 아버지, 그로인해 느꼈을 가족의 공백, 고통스런 기억, 순식간에 오른 스타의 자리, 하지만 음악적, 사회적 명성외에 마이클 잭슨은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 19살때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쥐를 사랑해요. 쥐를과 놀때면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 같아요'로 밝혔듯, 그의 정신은 이미 깊은 상처로 다시 회복하지 못할 심각한 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세상에 그 많은 것중에 하필 쥐라니... 앨범 Dangerous까지 끊임없이 성공하고 인정받았지만, 그의 피부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갔고, 그의 코는 인공적인 실리콘 구조물이 되어갔으며, 두번의 결혼에 실패했고, 2003년엔 아동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하게 된다.


아동성추행 혐의는 팝의 황제에게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무죄였다. 하지만 상처가 깊었다. 자신의 개인 테마파크인 네버랜드에 아이들을 초대해 같이 놀고, 같이 자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 오해를 더욱 부풀렸다. 온몸이 벗겨진 채 아버지에게 폭행당했던, 한번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러나 떨쳐버리지 못했던 그에게 아이들은 그가 받지 못한 것을 대신 해주고 픈 셀프힐링의 대상이었을 지 모른다. 유년시절의 상처는 그렇게 또 깊게 베어만 갔다.


한편으론 너무나 외로운 모습


마이클 잭슨은 어떻게든 재기하려 했다. 그의 외모와 기행을 놓고 사람들은 손가락질 하기 바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복귀 준비를 했다. 그렇게 팝의 황제가 힘겹게 다시 돌아오려 노력하고 있을 즈음 갑작스럽게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된다. 복귀를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This Is It에만 힘겹지만 최선을 다하는 마지막 모습이 담담하게 담겨져 있을 뿐이다.


늘 아버지에게 못생겼다는 말을 들어온 팝의 황제는 어릴 때와 너무 바뀐 얼굴을 한 채 떠났다. 스타가 되믄 뭐할 것이고, 기네스북에 오르는 뭐할 것이냐. 집 앞마당에 테마파크를 만들어놓고 식후땡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믄 뭐할 것이냔 말이다. 팬들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You Are Not Alone 노래를 불러도, 정작 자신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데 말이다. 아 씨발 안타깝고 불쌍하다.


어릴 적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오줌을 저렸던 아버지를 마이클 잭슨은 끊어내지 못했다. 몸서리치게 두려워했으면서도 자신이 슈퍼스타가 될 수 있도록 이끌었다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아버지덕에 잭슨5도 가능했고, 마이클 잭슨도 가능했다. 하지만 옳지 않았다.


원스 어폰어 타임 인 아뭬리카. 치과의사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트럼펫을 선물한다. 어머니는 아들이 피아노를 하길 바랬다. 허나 아들은 트럼펫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개인교사를 초청해 아들을 후원했다. 아들은 훗날 그 유명한 줄리어드 음대에 합격한다. 그러나 최고 명문대에 합격한 아들은 클래식과 백인위주의 수업대신 찰리파커와 같은 대가들과의 클럽 세션에 몰두했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에게 줄리어드 음대 자퇴를 선언한다. 아버지는 순순히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 자신의 것을 가져라'는 신념을 전했다. 그 아들은 훗날 음악사에 신화로 새겨졌다. 그 아들은 바로 '마일즈 데이비스'다.


재즈계의 뤠전드. 마일즈 데이비스


사실 스티비원더의 아버지도 살짝 난봉꾼에 가까웠다. 하지만 스티비 원더에겐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한줄기 빛을 느끼게 해주는 어머니가 있었다. 197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5개 부문을 휩쓴 스티비 원더는 어머니와 함께 무대에 서서 이렇게 말한다.

‘이분의 의지가 오늘날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1984년, 한큐에 그래미 8개 부문 수상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마이클 잭슨은 수상소감에서 이게 다 '간' 때문 아니, 아부지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스티비원더와 같은 어머니도 없었다. (조잭슨을 막기에 어머니는 너무 나약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했던 슈퍼스타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외로웠다. 세상은 슈퍼스타의 외로움을 토닥여주지 못했고, 한때 슈퍼스타는 괴물이 되기도 했다. 힘겹게 괴물로 덧칠된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슈퍼스타는 안타깝게도 복귀가 아닌 부고소식을 전하게 된다. 마이클잭슨 추모 3주기를 맞이하여, 그를 일그러진 얼굴의 이슈메이커가 아닌, 상처입고 아파했던 팝의 황제로 잠시나마 기억하며 대단원의 들은 척을 갈음하도록 하자.


근데... 이게 무슨 가정의 달 특집이냐고? 이 글을 보고도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소심한 독재자' 타입입니다. 끄~~읏





추신.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절, 이불 뒤짚어쓰고 몰래 들으며 위로받았던 곡이 바로 마이클 잭슨의 Man In The Mirror였다. 테이프가 늘어질대로 늘어지도록 힘들 때마다 듣고 또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 별 것 아닌 글을 힘들 때 같이 해준 그와 그의 음악에 바친다.


사족.

본문 중 '폴메카트니가 뭐요', 당신은 '소심한 독재자' 타입입니다  이 두개의 뜬금없는 멘트들의 저작권은 본지 필진 '춘심애비'님에게 있다는 춘심애비(@miiruu) 님 본인의 강력한 주장이다.






딴지뮤직 수석 쉐프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