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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31일 화요일

[들은 척 매뉴얼 번외편] 싫으면 그만.



12.07.31 딴지일보 링크




하도 어이가 없어 스핀오프(편집자 주 : 기존의 작품에서 파생된 작품)를 써요. 스핀오프라 말투도 바꾼 거에요. 하긴 생각해보면 어제 오늘 일도 아니에요. 얼마 전 걸그룹의 어떤 친구는 이제 연애 금지 풀렸다고 막 좋아 하더라구요. 연애를 금지 시킨 데요. 그게 말이 돼요. 두발도 단속하고, 치마도 못 입게 하지 그래요. 속으로 '그래, 풀렸으니 앞으로 많이 해라. 남들 한번 할 거 두 번하고, 두 번할 거, 세 번 해라'. 그랬지요. 근데 어제 제대로 터졌어요. 주인공은 티아라 화영이란 친구죠. 며칠 전부터 얘기가 있었나 봐요. 전 그 친구 이름이 화영인지도 어제 알았어요.




기사를 보아하니 화영이란 친구가 팀에서 문제가 되고 있고, 이유는 왕따를 당하거나, 아님 어울리지 못할 만큼 철부지 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였지요. 그러다가 어제 그 긴장이 폭발한 거에요. 뭐 그동안 계속 쌓여온 문제였을 거에요. 관심이 집중되니 며칠간 얘기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지요.

  
결국 어제 소속사 사장님이 중대 발표하신다고 예고(뭘 별게 다 중대발표에요) 하시더니, 그 중대발표라는 건 결국 화영이란 친구의 방출이라고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지요. 뭐 분위기를 봐서는 화영이가 직접 사장에게 FA를 신청한 것 같지 않아요. 일방적 방출인 거죠. 왕따냐. 철부지냐의 확인을 떠나 파장이 순식간에 커졌어요. 발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장님이 인터뷰을 하셨거든요. 인터뷰 전문은 여기서 함 보시구요.(기사 링크)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석줄 요약
  • (화영이에 대해) 다 밝힐 수는 없다.
  • 팀을 운영하면서 스태프들이 너무나 힘들어했다. 울면서 그만두겠다는 매니저가 여럿 있었다.
  • 논란이 되지 않도록 (화영이가) 조용히 있어주길 바란다.

  
요약하면 '화영이만 나쁜 년'이 되는 거에요. 이거 졸라 흔치 않은 경우에요. 방출하는 경우 방출 당하는 당사자를 욕하는 경우 별로 없거든요. 이유가 어떤 것이든 방출은 당사자에게 치명적인 거에요. 헤어지는 게 아닌 쫓겨나는 거거든요. 그래서 대개 좋은 말을 해줘요.

  
제이슨 지암비 아시죠. 오클랜드에서 스타가 된 뒤에 뉴욕에서 단물 쪽 빠지고, 게다가 약물 스캔들까지 터진 뒤에 몇 개 팀을 거쳐 다시 친정팀 오클랜드에 돌아왔는데, 결국 방출 당했어요. 그때 슈퍼 단장인 빌리 빈의 코멘트는 뭐 이런 거였어요. '지암비가 그리워질 것이다'. 대게 이런 식이에요. 근데 말이죠. 사장님께서는 함께했던 이십 대 중반인 친구에게 '나쁜 년' 드립을 시전해 버린 거에요. 그것도 쫓아내믄서…

  
왜 그랬을까요. 화영이란 친구가 왕따였든, 철부지였든 사장님이 그렇게 할 게 아니거든요. 싫으면 그만이지 왜 그러냐구요. 직장인들 가끔 하는 말 있잖아요. '지가 사장이믄 다야' 뭐 이런 거. 이거 암튼 유독 우리만 그래요. 당사자들은 말이 없어요. 좋든 싫은 당사자가 결정할 문제이지요.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싫으면 그만인 거에요. 다들 그렇잖아요.

  
제가 연재하고 있는 들은 척 매뉴얼 '사랑과 전쟁(링크)'편은 말 그대로 여럿이 모인 밴드 혹은 팀의 사랑과 전쟁을 다룬 것이었어요. 사이 좋은 '사랑' 하는 밴드는 U2 한 팀만 들었구요. 치고 받고 헤어진 팀으로는 '이글스'와 사이먼 앤 가펑클'. '아바' 그리고 '오아시스' 이렇게 네 팀을 들었죠. 그래요. 1:4라는 비율이 말해주는 건, 사실 멤버들끼리 지지고 볶은 일화들이 존나게 많다는 거. 바로 그거에요. 헌데 그나마 그 중 제가 참 사이 좋은 팀으로 예를 들은 U2에 대해 '문밖의 늑대'님께서 이런 리플을 달아주셨어요.

  
유투에 대해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멤버 교체가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심각한 불화가 없었던 건 말도 안돼요.
90년대 초중반에 서로 주먹질하고 싸우고 거의 해체수순까지 갔었던 적도 있구요.
나름 그런 서로간의 갈등이 음악적으로 많은 성장을 해 주게 되었는데…
부부도 살아가면서 심심치 않게 싸우고 이혼 직전까지 가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사람 살아가는데 불화가 없다라고 말하는 건 좀 너무 미화시키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거기다 골수팬인 저로써는, 이제는 나오는 앨범들이 뭔가 음악적으로 아쉬운 면이 많아서 좀 안타깝네요. 

  
확인은 해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일리가 있었거든요.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 그러니깐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들은 극히 일부일 거에요. 제가 얼마 전에 어딜 좀 갔다 왔어요. 일행이 한분 계셨는데요. 잘 아는 친한 분이었어요. 딱 3일 같이 있었는데요. 제가 막 짜증을 내고, 그 분이 막 불편해하고 그랬더랬죠.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심각한 이유가 '코를 고는' 것이었어요. 저는 누가 코를 심하게 골면 못 자 거든요. 잠을 못 자니 아침에 예민해지고, 짜증이 나고 그런 거지요. 만약에 그분이랑 저랑 이제 막 시작한 듀엣이고, 인지도가 없어 한 숙소, 한 방에서 먹고 자는 처지였다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저는 '졸라 못해먹겠다'고 뛰쳐 나갔을지 몰라요. 아니 그분이 먼저 탈퇴했을지 모르죠. '이렇게 예민한 새끼랑 드러워서 같이 못 있겠다'고 말이에요.

  
다행히 갔다 와서 서로 막 '너 때문이라고' 하믄서 잘 풀리긴 했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와 같이 붙어 산다는 거, 이거 존나 힘든 거구나, 배려라는 단어가 그리 만만한 게 아니구나. 한마디로 득도(생각만)를 해버린 거죠.

  
근데 티아라 이 친구들은 말이죠. 09년에 6명으로 시작해서, 10년에 화영이가 합류해 지금까지 무려 7명의 어린 이십 대 초반의 친구들이 3-4년을 같이 지내왔어요. 잘 나가는 친구도 있고, 욕 들어 묵는 친구도 있고, 예쁘다 소릴 듣는 친구도 있고, 아닌 친구도 있었겠지요. 그 상황에서 아무일 없는 게, 그게 웃긴 거에요.

  
저는 만날 TV 어린 친구들 너 댓 명이 나와 서로 위로만 하는 모습을 보면 좀 무섭거든요.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저게 아닐 텐데' 하는 거죠. 근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말이죠. U2가 좀 멀게 느껴지나요. 그럼 아이돌 그룹 예를 함 보죠.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은 있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다' - 게리 발로우

  
  
  
'로비는 더 많은 걸 하고 싶어했고, 더 큰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 - 제이슨 오렌지

  
유명했던 영국의 보이 밴드 테이크댓이 5년 여간의 활동을 접고 해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막내 로비 윌리엄스 때문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화영이도 막내에요).

  
  
  
'난 이 팀에서 백댄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몇 년이 걸렸다. 난 게리의 백댄서로 사인했던 게 아니다'   - 로비 윌리암스

  
사실 테이크댓의 프론트맨은 게리 발로우 였어요. 노래도 막 지가 만들고, 대부분의 곡들에서 리드보컬도 지가 맡았지요. 누가 뭐래도 메인은 게리 발로우였어요. 대부분의 멤버들은 그 사실을 인정했지만 막내 로비 윌리암스는 점점 그게 싫었던 거에요.

  
불화가 시작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팀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팀 불화에 대해 기사를 부인하고 그랬지요. 하지만 로비 윌리암스의 욕망은 가라앉지 않았어요. 술을 존나게 마시고. 여자들을 막 만나고, 게다가 약까지 막 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은 빨리 끝내고 싶은데 팀은 어떻게는 유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결국 더티한 항명을 선택한 것이었지요.

  
투어 중간에 로비 윌리암스는 약물, 알콜 과다 복용으로 막 응급실에 실려가고 그랬어요. 이렇게 되니 결국 나머지 멤버들도 로비 윌리암스를 보내주기로 했어요. 투어 중간이었지만 4인조로 투어를 마무리하기로 결정, 로비 윌리암스의 탈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지요.

  
테이크댓은 로비 윌리암스가 없는 상태로 투어를 마무리했지요. 팀으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지요. 수많은 티켓이 취소될 수도, 그로 인해 투어가 휘청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헌데 로비 윌리암스는 팀에서 빠져 나와서도 팀을 막 욕하고 그랬죠. 결국 로비 윌리암스는 솔로를 시작했고, 테이크댓은 오래가지 못하고 해체되었죠. 멤버들이 선택한 일이었어요. 갑자기 소속사 사장님이 등장해서 성명서를 낭독하거나, 갑자기 부모님이 나와서 중재하고 뭐 그런 건 없었구요.

  
 
  
스파이스걸스라는 영국 걸그룹도 그랬지요. 여성 5인조였는데요. 이 팀은 늘 멤버들 간의 불화설이 있었지요. 여성간의 불화 하니까 생각나는 팀이 있지요. 맞아요. 아바에요. 오죽하면 남자멤버인 남편들이 나서서 중재를 했을까요.

  
물론 결국 깨졌지요. 스파이스걸스는 허구 한날 다퉜다고 해요. 개성이 강한 멤버들이 모였으니 당연한 것이라고들 했지요. 맞아요. 당연한 거죠. 특히 문제가 된 건 게리 할리웰과 멜라니 브라운간의 주도권 싸움이었죠. 원래 리더는 게리 할리웰이었는데, 멜라니 브라운에게로 넘어가게 되었거든요. 그러믄서 다투는 일이 많아졌고, 게리 할리웰은 '에이 조또'하고 팀을 떠났지요.

  
이 때도 전미투어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게리 할리웰 부분을 다 들어내고, 들어낸 부분을 나머지 멤버가 나누어 투어를 진행하고, 새 앨범도 발표했지만 결국 얼마 가지 않아 팀은 깨지고 말아요.

  
헌데 그렇게 각자 지내다가 재결합을 하더니 재결합 투어도 펼쳤어요. 더구나 지금 진행중인 2012 올림픽 폐막식에서도 공연을 한다고 해요. 불화가 있었고, 불화를 인정하고, 개판으로 헤어지고, 다시 만난 거죠. 이상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나요. 역시 사장님. 엄마, 아빠는 등장하지 않았어요. 빅토리아의 남편 데이빗 베컴 만 종종 언급되긴 했죠. 워낙 유명해서…

  
물론 스파이스걸스처럼 불화로 깨진 경우가 있는 반면, TLC처럼 레프트 아이(가장 개성있는 멤버)로 인해 불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해체되지 않은 경우도 있지요. (레프트 아이의 사망으로 팀이 깨지긴 했지만). 오아시스의 겔러거 형제처럼 총만 안 들었다 뿐이지 서로 죽이겠다 지랄인 형제가 있는 반면 ACDC의 영 브러더스(앵거스 영, 말콤 영)처럼 오랜 기간 변치 않고 찰싹 붙어 있는 경우도 있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앵거스 영의 트레이드마크인 교복 유니폼은 누나 마거릿 영이 만들어 준 것이지요. 레드제플린처럼 드러머(존 본햄)가 세상을 떠나자 팀을 해체해버린 경우도 있지만, 어벤지드 세븐폴드처럼 드러머(더 레브)가 사망하자 평소 드러머가 존경하던 드러머(전드림씨어터, 마이크 포트노이)를 영입해 앨범을 만들기도 했지요. 이건 다 그들, 멤버들의 선택이었어요. 제작사, 에이전시, 주변지인과의 상의나 조언 등은 있었겠지요. 하지만 결정은 그들의 몫이었죠.

  
티아라라는 어린 7명의 친구들은 어느덧 4년을 지냈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냐는 거죠. 당사자만 입 틀어 막고 감출 게 아니라는 거죠. 친구들끼리 사이가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죠. 안 맞아서 헤어질 수도 있는 거에요. 애초 시작도 마음에 들어서 팀을 만든 게 아니잖아요. 사장님이 꽂아서 된 거지. 어디 사장님이 그뿐이었나요. 팀이 좀 나태해 진 것 같다면서 새로운 멤버를 투입하겠다고 하고 그랬죠. 무한경쟁인 거에요. 문득 사장님은 어떻게 경쟁하고 계신지 궁금해 지네요.

  
어제 화영이는 마지막으로 '진실없는 사실'이란 트윗을 날렸어요.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사실인데 진실은 아니다. 이거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론을 통해 나오는 얘기들은 대부분 '구라다'는 일종의 호소겠지요. 사장님께서 인터뷰에서 조용히 있으라고 했으니 더 이상의 말을 하기 어려울 거에요. 결국 화영이도 남아있는 친구들도 뭐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고 있어요. 싫으면 마는 건데 그걸 말을 못하는 거에요.

  
마치 사태에 대한 발언권은 사장님에게만 있는 듯한 이런 구조는 옳지 못해요. 이러다 또 부모님들 등장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부모님 등장하면 또 당사자인 친구들은 오만상을 쓰고 앉자 눈물을 흘리겠지요. 정말 안타까워요. 내 눈에 보이는 아리따운 친구들이 그 친구들 자신인지, 아님 부모의 기대만 투영된 허상인지, 사장의 욕망에 저당 잡힌 껍데기인지 말이죠. 왜 그렇게 어린 친구들을 볼모로 잡는지 모르겠어요.

  
존 메이어가 음악 시작할 때 돈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돈을 좀 달라고 했대요. 아버지는 때마침 돈이 좀 있었는지 돈을 건네면서 그랬다고 해요. '니가 이담에 잘 되면 이 도움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돈 받은 존 메이어는 얼마 후 대박이 났죠. 존 메이어는 음악도 잘하고, 연애도 잘하는 뮤지션이 되었구요. 가족 얘긴 언론에 거의 노출되지 않는 걸 봐서는 나름 잘들 살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 정도의 관심과 지원이면 좋을 것 같은데 가족이던, 소속사 사장이던 딱 그 정도만 개입하면 뭐 똥꼬에서 털이라도 올라오는가 봐요.

  
  
  
그래요. 존 메이어랑 티아라랑 비교하는 것이 웃기고 자빠라진 짓이라는 거 저도 알아요. 답답해서 그런 거에요. 사장님이 픽업해서 팀 만들고, 사람 붙여서 연습시키고, 성형도 시켜주고, 앨범도 내주고 하는데 들어간 본전 생각나는 거 이해해요. 그러니 예능에도 막 나가야 하고, 재능 있다 싶으면 연기 연습시켜서 드라마에도 내보내야 하죠. 아침에 일어나 TV하고, TV 끝나면 행사 가고, 행사 끝나면 인터뷰하고, 인터뷰 끝나면 행사하나 더하고, 행사하나 끝나면 연습하고, 연습 끝나면 칼잠 자고, 그렇게 새 아침이 밝겠죠.
  
  
  
그렇게 뛰댕기는데 멤버들간에 아무 일이 없다구요. 요즘 같은 날씨엔 가만히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는 데 말이에요. 예능 같은데 나와서 농담 투로 말하잖아요. '사장님이 누구누구만 예뻐한다고' 아 씨발. 같이 고생하는데 누군 주목 받고, 누군 떨거지고. 저라면 그러고 못살아요. 아우 슬퍼. 그러니 그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가, 그 친구들을 위한 건지, 듣는 사람을 위한 건지, 사장님을 위한 건지 당췌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화영이에 대한 상반된 의견 중 누구 말이 맞던지 언론의 뭇매를, 대중의 돌팔매를 맞을 일이 아니라 그 친구들이 사이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테이크댓에서 로비 윌리엄스의 -약물과 같은 비행은 좀 그렇고-, 게리 발로우를 넘어서고 싶다는 생각, 그 생각으로 인한 불화, 그거 이해가 된다는 거지요. 프로트맨을 백푸로 인정하고 가끔씩 들러리인 듯한 심정을 눌러가면서 불화 없이 팀에 남는다는 게 더 어려울 듯 하거든요. 젊은 친구들 데리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친구들이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안타깝구요. 어쩌면 말도 못 꺼낼 만큼 사회의 시선과 반응이 두려운 거라면 그것 역시 안타깝구요.

  
세상엔 영원한 거 없잖아요.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욕도 하고, 욕도 먹고 뭐 그런 거 잖아요. 뭐 때문에 말도 못하고 그러고 살아요. 본전 때문에 그렇게는 못 하겠다구요. 함 잘 따져보세요. 그 친구들 이미 본전 뽑고도 남았을 테니까요. 사장님은 (화영이 본인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있으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 친구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당사자들 스스로의 말이 아닌가 싶어요. 그 말이 욕이 되었던 위로가 되었던 말이지요.

  
말 좀 하고 사는 거. 그게 참 어려운 시대이긴 한가 보네요.

  
세상만사 다 싫으면 그만인데 말이에요.
PLAY LIST
  1. Everythig Changes – Take that 
  2. Say You'll Be There – Spice Girls
  3. Damage – TLC
  4. Back In Black – AC/DC
  5. 5. Bo Peep Bo Peep – 티아라
추신1)

지금 제가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시간이 31일 오전 10시 30분인데요. 사장님께서 막 자신의 트위터에 '화영이 자신의 행위에 사과한다면 스태프, 티아라 멤버들과 함께 복귀를 논의할 수 있다'고 그것도 영문으로. 밝혔다고 하네요.(기사링크) 어벤져스가 해체해도 이 난리는 아닐 거에요.

  
추신2)

며칠 사장님들 욕만 한 것 같네요. 모든 사장님이 그런 건 아니지요. 좋은 사장님들 오해 마셔요.
  


  

2012년 7월 9일 월요일

[들은 척 매뉴얼] 문어발 '릭 루빈'



들어가는 척하며… 아니 들어가며…

저는 일단 제 손을 떠난 후엔 글도, 리플도 보지 않습니다. 제 생각도 그저 여러 가지 중 하나일 뿐이고, 그러니 제가 써제낀 결과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죠. 선플이 있고, 악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절대 일희일비하지 않아요. 릴리즈 타이밍부터 홈플레이트를 보지 않고 바닥을 꼬라보는 전 메이저리그 일본인 투수 ‘오카지마’의 투구폼과 비슷한 거죠. 손 떠나면 끝이에요. 조때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게 인생이죠. 전 소중하니까요.
손 떠나면 끝이다.



어느덧 미적미적 세 번째를 맞이한 이 시리즈를 본 독자들이라면 저게 다 구라임을 단박에 알아채셨을 것이다. ‘손 떠나면 끝이라고’ 네버. 워낙 덤벙거리는 성격 탓에 보고 또 봐도 오타와 비문이 수두룩(그나마 편집부에서 손봐주니 그 정도다)하니 마빡에 업데이트 된 뒤로도 가끔씩 다시 읽어보곤 한다. 물론 리플도 확인한다. 꼼꼼히…


그 중 필자의 마음을 촉촉히 적신 리플이 있었으니, ‘들은 척 매뉴얼을 써먹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 ‘록 가수 몇몇 안다고 졸지에 사무실에서 영문과 졸업생으로 낙인 찍혔다’는 내용의 리플이 바로 그것이다. 본 필자, 뭐 대단한 게 아니고, 그저 음악 들으면서 주고 받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나누고 싶어 이 연재를 시작했다. 아 근데 나눌 사람이 없다니, 살짝 ‘척’ 한 번 했다 ‘왕듣보’로 낙인이 찍히다니… 이 가슴 아픈 두 개의 사연이 가뭄의 단비로도 적시지 못한 필자의 슴가를 촉촉히 적셨다.


필자, 가카의 내곡동 사저 매입만큼이나 중요한 이사를 앞두고 있다. 가카가 만들어주신 평온함과 은혜덕으로 전세 값은 4~5천만 원 정도가 올랐다. 이사는 가야 하겠고, 돈은 없다. 떠날 집도 내 것이 아니고 갈 집도 내 것이 아니다. 알몸으로 태어나서 아직도 알몸인 듯한 느낌이다. 멘붕이 수시로 면회를 온다. 허나 이 와중에도 써내고야 말았다. 독자들을 위해 ‘들은 척’을 시전할 단 한 사람이라도 만들어보자는 사명과, ‘들은 척’이 온전하게 ‘들은 척’으로 대접받게 되길 바라는 작은 바램을 담았다. 다만 지난주 필독 부편집장이 향후 1년치 고료쯤 되어보이는 아구찜을 쏜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먹을 때까지는 참 좋았던 아구찜.



현재 리플과 트윗을 통해 제보해주신 내용들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음을 알려드린다. 기회가 되면 제보해주신 내용들로 함 엮어볼 생각이다. 아무쪼록 많은 제보 부탁 드린다. 언젠가 독자들의 제보가 코너에 몰린 필자에게 한줄기 구원의 빛이 될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들은 척’을 위해 슬슬 몸들 풀어보자.




시작하기 전에.

2008년에 열린 50회 그래미 시상식과, 2012년에 열린 54회 그래미 시상식은 많이 닮았다. 각각의 시상식을 초토화시켰던 아티스트는 모두 여성 뮤지션이었고, 젊었으며, 주요 4개 부문 중 3개 부문을 싹쓸이 했고, 나머지 하나는 모두 남자 뮤지션(허비 핸콕, 본 아이버)들이 가져갔으며, 둘 여인 모두 영국 출신이었다.


2008년 50회 그래미 시상식. 최다 부분 후보에 오른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는 시상식이 열린 미국 LA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약물중독 때문이었다. 시상식에도 참가하지 못한, 알코올, 약물 중독의 24살의 퇴폐적 이미지의 이 아가씨에게 그래미는 주요부분 4개 중 3개를 포함에 총 5개의 트로피를 몰아주었다.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한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런던 스튜디오에서 공연을 펼쳤고, 그래미는 위성으로 이 실황을 중계했다. 부른 곡은 재치 있게도 ‘You Know I’m No Good’이었다. 물론 다음 곡은 ‘Rehab’.
영국에서 수상한 에이미 와인하우스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보여준 빈티지 사운드에 대한 대중의 환호와 평단의 극찬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예쁘고 몸매도 좋은 데다, 매력적이고, 성량도 풍부한 기존의 디바와는 다른 영역에 있는 새로운 유형의 디바가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연이은 스캔들과 알코올, 약물 중독, 재활이라는 가쉽의 주인공이 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빈 공백은 장르는 조금씩 달라도 다양한 유형의 여성솔로가 등장하면서 매꿔지기 시작했다. 코린 배일리 래(Corinne Bailey Rae), 사라 바렐리스(Sara Bareilles), 어 파인 프렌지(A Fine Frenzy), 그리고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가장 비슷하게 만들어진 더피(Duffy)까지… 모두 등장과 더불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초토화시킨 뒤 이듬해인 2009년에 열린 그래미 시상식 ‘올해의 신인’상 수상자에 호명된 이는 19살이 되던 해에 데뷔앨범 ‘19’를 발표한 아델(Adele)이었다. 2008년 전세계 음반 판매량 1위 더피를 제치고 아델이 수상한 것이다. 최고의 데뷔를 만들어낸 아델의 행보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다른 여성 뮤지션들과는 살짝 다른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곧바로 새 앨범 작업, 활동을 시작한 반면 아델은 서서히 다음 작품 준비에 들어갔다. 일부에서 소포모어 징크스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예상들이 튀어나왔다. 우려가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것이 확인 되는 데는 딱 2년 걸렸다.


올해 그래미는 2008년 그래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인공이 에이미 와인하우스에서 아델로 바뀌었을 뿐이다. 신인상을 제외한 주요부분 3개를 싹쓸이(신인상을 포함한 3개 부문이었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넘어서는 부문), 총 6개 부분의 트로피를 손에 쥐었다. 아델의 그래미였다 해도 손색이 없는 결과였다.
미쿡에서 직접 받은 아델



아델은 그래미를 휩쓸고 난 뒤 4-5년간 휴식을 선언했다. 애인과의 연애, 결혼, 출산 등의 이유를 들었다. 많은 이들이 아쉬움과 지지를 보냈다. 그렇게 아델이 무대를 서서히 떠나고 있을 때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비스티 보이즈의 아담 요크(Adam Yauch)가 침샘암 투병 끝에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한 달 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기념행사가 초청되었으나 아담 요크가 참석하지 못해 많은 팬들이 걱정하고 있던 차에 전해진 소식이었다.


이쯤 되면 독자들께서 눈치 깠을 것이다.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은 영국의 여자 솔로 뮤지션과 뉴욕의 백인 삼인조 힙합밴드를 엮은 이유를, 그리고 그 사이에 중첩되는 이름이 하나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아델의 슈퍼히트 앨범 ‘21’과 비스티 보이즈 최고의 앨범 ‘Licensed To Ill’의 프로듀서였던 바로 그 양반. 바로 미다스의 문어발 ‘릭 루빈’ 되시겠다. 자. 눈치덜 깠으면…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Adam Yauch (1964~2012)




들은 척 매뉴얼

PLAY LIST
1. Walk This Way – Run-D.M.C (Raging Hell)
2. Fight for your justify – Beastie Boys (Licensed To Ill)
3. Under The Bridge ? Red Hot Chili Peppers (Blood Sex Sugar Magik)
4. Aerials ? System Of A Down (Toxicity)
5. 99Problems ? Jay-Z (The Black Album)
6. The Long Way Around ? Dixie Chicks (Taking The Long Way)
7. Don’t You Remember ? Adele (21)
릭 루빈



릭 루빈 (Rick Rubin. 본명 프레데릭 제이 루빈 Frederick Jay Rubin)은 1963년 3월 10일. 뉴욕 롱비치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유대인이었으며, 아버지는 신발 도매업자,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이 평범한 유대인 친구가 슈퍼프로듀서가 되기까지 두 번의 훌륭한 만남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스티브 프리먼과, 대학 시절 만난 러셀 시몬스와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밴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릭 루빈은 스티브 프리먼을 만나 기타와 작곡연습을 배운다. 그 과정을 계기로 ‘더 프릭스’(The Pricks)라는 밴드를 만들어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고, 학교 기물인 4트랙 녹음기를 가져다가 ‘데프 잼'(Def Jam)이라는 레코드사를 지멋대로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은 참으로 단촐해 보였다.


뉴욕대에 진학한 릭 루빈은 호스(Hose)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며, 뉴욕 펑크씬에서 활동하는 몇몇 밴드들과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힙합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디제이였던 제지 제이(Jazzy Jay)를 만나 힙합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제지 제이로부터 소개받은 러셀 시몬스(Russell Simmons)와 의기투합, 정식으로 데프 잼 레코드를 설립하게 된다. 그게 1984년의 일. 1985년 드디어 데프 잼 레코드의 첫 앨범 엘엘 쿨 제이(LL Cool J)‘I Need A Beat’ 탄생하게 된다.


자. 뭐 이 정도면 누군가는 제와피의 프로듀서 박 사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프로듀싱한 앨범의 리스트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편집하느라 똥 빠진 Discography (출처 : 위키피디아)



나름 눈에 띄는 앨범만 체크해봐도 서른 개가 넘는다. 이 리스트는 릭 루빈이 앨범 전체, 혹은 일부를 프로듀싱한 리스트, 예를 들어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만천하에 알린 Blood Sugar Sex Magik의 경우 릭 루빈이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 했고, 믹재거의 솔로 앨범 Wandering Spirit의 경우 믹 재거와 릭 루빈 공동 프로듀싱. 저스틴 팀버레이트와 쉐릴 크로우의 앨범에는 각각 ‘(Another Song) All Over Again’, ‘Sweet Child O´Mine’, 이렇게 한 곡씩을 프로듀싱한, 그 모든 작업이 포함된 리스트 되시겠다.


살짝 살펴보자면, 일단 흑인만의 장르였던 힙합을 메인스트림에 우뚝 꽂아 넣은 기념비적인 앨범 두 장. 런 디엠씨의 Raising Hell과 비스티 보이즈의 Licensed To Ill이 눈에 팍 들어온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그에게 장르는 그저 거실과 방을 오가는 미닫이문 같은 것으로 보인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믹 재거, 자니 캐쉬, 탐 패티, AC/DC, 슬레이어, 쉐릴 크로우, 멜라니 C (스파이스걸즈 멤버),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시스템 오브 어 다운, 메이시 그레이, 제이 지, 림프 비즈킷, 위저, 샤키라, 닐 다이아몬드, 메탈리카, 조쉬 그로번, 고골보르델로(우크라이나 집시펑크 밴드), 그리고 아델까지.


그의 이 장황하고도 아름다운 리스트에 흠뻑 빠져 들은 척이고 나발이고 허우적거리게 될 수도 있다. 이럴 때일 수록 정신을 차리고 자신 있게 ‘척’ 할 수 있는 부분을 확실히 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릭 루빈, 음… 그 털쟁이’ 이 정도에서 끝나거나, ‘뭐 박 사장도 그 정도 하지 않나’ 정도로 귀결되는 허무한 ‘들은 척’이 될 공산이 크다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릭 루빈이라는 이름 석 자 투척한 후에 마하리쉬를 존경하는 나머지 신선과 같은 외모를 유지보수하고 있으며, 요가를 좋아하나 전혀 요가스럽지 않은 몸매의 소유자(근래 살이 빠진 듯해 보이기도 함)란 사실로 흥미유발. 힙합, 하드 락, 댄스, 컨츄리, 팝페라 등의 장르 불문, 일단 그의 이름이 걸렸다 하면 웬만큼은 먹어주고 들어가는 실력에, 앞서 거론한 몇몇 슈퍼스타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집중을 시킨다. 가볍게 런 디엠씨와 비스티 보이즈의 앨범은 ‘흑인의 전유물’로만 인식되던 힙합을 백인들에게까지 각인시킨 계기였다는 정도의 멘트도 살짝 함 던져주자.(물론 초기엔 흑인문화를 갈취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여기까지 해냈다면 8부 능선은 넘어온 것. 릭 루빈의 만들어 낸 앨범 중 가장 드라마틱했던 앨범, 딕시 칙스의 Taking the Long Way로 본격적인 ‘들은 척’을 시전하면 된다.




들은 척 세부 스킬.

Dixie Chicks



1989년 달라스에서 결성된 여성 컨트리 밴드인 딕치 칙스(Dixie Chicks). 소규모 공연을 전전하던 무명시기를 거친 뒤 멤버교체와 리드보컬 나탈리 메인즈의 영입을 통해 현재의 3인조의 틀을 갖춘 뒤, 1998년 Wide Open Space로 뜨거운 데뷔를 하게 된다. 물론 미국 내의 얘기다. (당시 국내엔 앨범조차 발매되지 않았다). 가볍게 천만 장을 팔아제낀 후 이듬해 발표한 FLY로 또다시 천만 장을 팔아 치운다. 컨트리에 팝을 가미해 보다 많은 대중에게 어필한 결과였다. 물론 마냥 순탄하진 않았다. 엄청난 성공은 레코드사와의 로열티 배분 분쟁으로 이어졌다. 지루한 분쟁이 마무리 될즈음 새로운 앨범 Home을 선보인다. 플릿 우드 맥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Landslide’가 곧바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트리플 히트가 기정사실화되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2003년 런던 공연 전까지는 말이다.


2003년 3월 10일. 영국 런던에서 공연 중 나탈리 메인즈가 이런 멘트를 날린다.

‘우리는 미국의 대통령이 텍사스 출신이라는 부끄럽다’



이때는 2001년 북한과 이라크, 이란의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정부가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를 통한 세계평화이바지라는 참으로 미스유니버시티한 이유로 논란 속에 이라크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 말을 영국에서 했으니, 니덜도 똑같다는 은유가 담긴 발언이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던 사안이었고, 나탈리 역시 가볍게 던진 멘트였음으로 크게 문제될 것 없어 보였던 이 발언의 파장은 예상과 다르게 겁나 커지게 된다.


의미있지만 그렇게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이 멘트는 자국의 평화가 곧 세계의 평화라는 미국 내 패권주의 정서와, 딕시 칙스가 가장 미국적인 장르인 컨트리를 하고 있었다는 점. 게다가 텍사스는 컨트리의 성지와 같은 곳이라 것. 디트로이트에서 미국인의 고용을 약속한 가카처럼, 딴나라에서 자국의 대통령을 씹었다는 이유 등이 맞물리면서 큰 파장을 일으킨다. ‘딕시 칙스 = 후세인’이라는 플랜카드까지 등장하기 시작한다.


물론 해명과, 부시에게 부끄럽다고 한 멘트에 대한 사과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딕시 칙스의 음반은 판매금지는 물론이요, 그들의 노래가 방송에 나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쓰레기통에 앨범을 버리는 모습이 공중파에서 보도되었고, 극우파들에 의한 온갖 협박이 등장했다. 딕시 칙스의 세 멤버는 투사가 아니었다. 컨트리 음악을 하는 다분히 미국적인 뮤지션이자, 동시에 자녀를 둔 엄마이기도 했다. 무시 못할 만큼의 우익성향의 대중들에게 외면 받기 시작했고, 앨범 판매량과 콘서트 관람객의 숫자가 급감했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탈리가 ‘부시가 부끄럽다’는 멘트를 한 10일 뒤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작전명은 ‘이라크의 자유’였다. 전쟁은 26일만에 끝이 났다. 명분이었던 대량학살무기는 확인되지 않았고, ‘이라크전쟁=세계평화’라는 공식은 증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결국 후세인은 잡혔다. 전행이 끝난 뒤 딕시 칙스는 전쟁을 비난하는 누드사진을 찍었고, 엔터테이먼트 위클리는 그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전쟁을 끝났지만 쉽지 않은 상황은 3년간 계속되었다.
비난 여론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았고, 협박도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예정되어 있던 (취소되지 않은) 공연들을 계속 해 나갔고, 조금씩 다음 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주변의 상황의 호의적이지 않아 다음 앨범의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딕시 칙스에게는 ‘컨트리+팝’의 크로스 오버라는 그들의 장기를 맘껏 살려줄 확실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딕시 칙스의 선택은 ‘릭 루빈’이었다. 여성 삼인조 컨트리 밴드의 제안에 릭 루빈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이력엔 이미 컨트리계의 레전드, 자니 캐시(Johnny Cash) 앨범의 프로듀싱이 들어가 있었다.


릭 루빈은 채드 스미스(Chad Smith.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드러머)등의 절친들을 끌어들였고, 동시에 존 메이어(John Mayer), 보니 레잇(Bonnie Raitt)등 정상급 뮤지션들의 조인도 준비했다. 그렇게 딕시 칙스의 다음 앨범 Taking The long way는 릭 루빈에 의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6년,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등장한 딕시 칙스의 새 앨범은 발매 즉시 빌보드 1위에 오른다. 첫 번째 싱글 커트 된 곡은 'Not ready to make nice’였다. 릭 루빈과의 협업이 더할 나위 없었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임과 동시에 그간 그들을 괴롭혀 온 세상에 대한 항변이기도 했다.


‘털스멜’까지 사랑하는 이 양반은 누구게?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싹쓸이했던 2008년으로부터 1년 전, 2007년 그래미 시상식의 주요 4개 부분 중 올해의 신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 부분의 주인공은 바로 딕시 칙스였다. 전쟁의 끝이 결국 잔혹한 허상에 불과했다는 여론도 그들의 수상에 한 몫 했다. 주요 부분 중 올해의 레코드와 올해의 앨범은 뮤지션과 프로듀서, 엔지니어에게 주는 상이다. ‘릭 루빈’이라는 딕시 칙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 확인된 것이다.


전설적인 포크 뮤지션 조안 바에즈의 ‘세 명의 용감 무쌍한 언니들’이란 소개를 받고 등장한 딕시 칙스. 자신들의 노래 제목에 빗댄 나탈리의 수상소감은 이러했다.

‘나는 더 좋아질 준비가 되어있다. (I'm ready to make nice!)… 우린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자유를 더 누려야 한다.’

딕시 칙스는 얼마 전 공연실황을 발매하는 등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릭 루빈은 ‘마이더스의 문어발’답게 여전히 장르를 불문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수많은 슈퍼 뮤지션들이 릭 루빈은 찾고 있고, 릭 루빈은 능력을 갖춘 수많은 신인들을 픽업하느라 여전히 정신이 없다. 그리고 그의 외모는 여전히 정신 없어 보이지 않는다. 나탈리는 릭 루빈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 했다.

‘그는 음악을 물건 찍어내듯 생산하지 않아요. 그는 음악이 발견되게 하는 능력과 인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생각해보니깐 그는 아마도 Guru인 것 같아요’.

일단 음악이 나오는 곳이면 릭 루빈이라는 문어발에 뭐든 하나 걸리게 되어 있다. 일단 하나 물리면 준비된 ‘들은 척’을 시전하도록 하자. 늘 말하지만 성공은 보장 못한다. 아무쪼록 이번 주에도 독자들의 ‘들은 척’의 무사 성공을 빈다.



The Long Way Around ? Dixie Chicks




** 딕스 칙스의 이야기는 영화 ‘Dixie Chicks : Shut Up And Sing’으로 영화화 되었다



 

2012년 6월 24일 일요일

[들은 척 매뉴얼] 사랑과 전쟁



들어가며...

몇해전 딴지일보 게시판에 스리슬쩍 필자의 등장을 알린 글은 바로 '음악'에 대한 것이었다. 첫글을 나름 공들여썼던 것 같고, 너댓개의 리플이 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름 읽히겠거니 싶어 몇개의 글을 더 올렸으나, 몇개의 글들은 하나같이 죄다 외면 받았다. 나라도 내글에 리플을 달아야 하나 심히 고심했다. 정말 아무 재미도 없는 어떤 글들에도 왠 듣보들이 난입해 쓸데없는 리플을 주고받고 난리인 경우도 있는데, 내 글은 고요와 적막 그 자체였다. 다른 글들에서 논쟁하며 분통이 터진 이들이 내글을 열어보고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그냥 떠나는갑다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그 어떤 호응도, 그 어떤 문제 제기도 없었다. 하도 답답해서 '비틀즈의 전 멤버가 사실 여자였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려 준비하기도 했다. 하다못해 '듣보' 소리라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게시판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일기를 쓰는 것 같은 공허함이 찾아왔다. 난 그렇게 딴지의 게시판을 홀연히 떠났다. 아무도 찾는 이 없었다. 떠나는 길은 제법 가벼웠다.

1년 하고 몇개월이 지난 뒤, 필자 다시금 '음악' 얘기를 해보자는 구국의 용단을 내리고야 말았다. 이 한몸 던져 '읽은 척 매뉴얼'이라는 너불 편집장의 경전을 등에 지고, 거칠은 가시받길 다시 한걸음 내딛고저 출사표를 내던진 것이다. 다른 필진인 춘심애비님의 빨간펜 컨설팅과  필독 부편집장의 독촉에 힘입어 드디어 '들은 척 매뉴얼'의 서막을 알리는 '마이클 잭슨'편을 인고 끝에 탈고할 수 있게 되었다. 미리보기 창을 띄워 놓고, 창밖 깊고 푸른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심연의 어둠과 적도의 고요함이 마치 1년하고 몇개월전 내가 써올린 게시판의 글을 보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조땔 것 같은 비운의 불안이 스쳤다. 그 어느때보다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불안은 용기를 잠식하고도 남았다.

'아이고.. 아이고.. 너클님. 내용이 제법 괜찮으니 다음주 중에 함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스마트 폰 넘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필독 부편집장의 목소리는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았다. 마무리는 늘 그랬듯이 '다음 글 내놔라'였다. 지금 막 써서 넘기면 좀 있다 전화해 '다음편 거의 다 쓰셨죠?'라 묻는다. 가끔은 졸라 무섭다. 진짜다. 헌데 이 무지막지한 부편집장은 그렇게 독촉을 해대면서도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다.




딴지일보의 부편집장이 독자들을 상대로 리플 앵벌이, 아니 리플 상납을 뻔뻔하게, 노골적으로, 염치없이, 줏대없이, 가오없이, 기타등등...  대놓고 요구하는 사상 초유의 일을 벌인 것이다. 게다가 700개의 리플이 달리믄 '하겠다'가 아니라 '고려해보겠다'는 '아님말고'식의 멘트와 편집장의 리플 1개는 100개로 친다(편집하느라 고생한 카인기자는 달랑 2개로 쳐줌)는 다분히 중세 신분제적인 발상에서 비롯한 꼼수도 숨어있었다. 그래 모두들 나처럼 알아채겠지. 이렇게 대다원의 막을 지리멸렬하게 내리는게 좀 안타깝기도 했다. 진짜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뿐하게 리플은 700개를 넘어서고야 말았다. 그렇게 가볍게 리플 700개가 넘어가는 건 본적이 없었다. 눈을 의심했다. 천개가 넘어서는 모습을 본 후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나역시 로그인을 하고야 말았다.




호평일색의 댓글 속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단연 돋보적인 리플을 결국 나도 달고야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깐. 리플이 천 하고도 몇백개가 더 달릴 무렵, '들은 척 매뉴얼'은 마빡 업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거침없이 쭉쭉 치고나가는 세바스찬 베텔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F1 드라이버들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문득 탈고하고 바라보았던 서쪽하늘이 떠올랐다. 즉시즉종(卽始卽終) 새로운 유형의 연재가 탄생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그냥 조용히 짐을 싸기로 했다. 업데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4박 5일의 출장길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

볼품없는, 그것도 '음악'을 소재로 한, 게다가 너불 편집장의 '읽은 척 매뉴얼'을 대놓고 패러디, 아니 배낀 '들은 척 매뉴얼'에 대한 독자제위덜의 열화와 같은, 아니 캄브리아기 대폭발과 같은 성원에 폭풍감동을 받았슴을 솔직하게 알리는 바다. 테무진 마지막편의 1/60 수준의 리플가지고 폭풍감동하고 자빠졌다고들 마시라. 필자의 첫 글에 비하면 무려 7배의 관심이이다. 그거믄 되었다. 필독 부편집장의 '다음 편 빨리 내놔라'는 연통이 슬슬 들어오는 걸 보니 나름 선전한 듯 해 뿌듯하기까지 하다.

다시한번 독자제위덜께 감사의 마음 전한다. 더불어 초기 컨셉에서 지금의 컨셉으로 좌표 변경을 가능케 한 춘심애비님의 조언과, '안쓰면 조때겠다'는 자각을 심어준 필독 부편집장의 독촉에도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야심차게 준비한 2탄은 바로... 두두둥...

'사랑과 전쟁' 되시겠다.





시작하기 전에...

세상엔 사랑도 있고, 전쟁도 있다. 만남도 있고, 이별도 있다. 뭐 그렇다. 누구가 사랑을 원하고 만남을 원한다. 가끔 무작정 전쟁, 이별 같은 것만 원하는 무식하고 탐욕스런 넘들도 있지만 뭐 세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보고싶은 건만 볼 수 있지만 보고 싶은 것만 벌어지지는 않는 다는 것. '사랑과 전쟁'과 같은 프로가 '선정적'이내, '저질'이내 하면서도 시즌제로 장수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 그럼 케이스 바이 케이스. 우선 훈훈한 케이스부터 함 디벼보자.



4주 후에 봅시다.


사랑...

필자가 태어나기 1년전인 1976년 아일랜드. 열네살이었던 래리 뮬렌은 자신의 다니는 마운트템플 고등학교 게시판에 '나는 밴드를 결성할까 한다. 나와 뜻이 같은 넘들 모여라'는 공고를 올린다. 그 공고를 본 몇몇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딱히 포지션도 정해지지 않은 밴드가 결성된다. 그 중 한놈아가 '기타는 내가 좀 튕겨 볼께'하며 나섰다. 하지만 기타를 잘치는 친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보컬을 맡게 되었지만 이제 막 시작한 그의 목소리는 별 볼일 없었다. 오히려 보컬 때려치우고 매니저가 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연습에 연습을 거쳐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의 4인조 밴드 진용을 갖춘 그들은 The Hype란 이름으로 오디션에 참가한다. 그러나 The Hype란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았던 그들은 밴드명을 바꾸고 몇년간의 연습 끝에 데뷔, 몇장의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4명의 친구가 상의한 새로운 밴드명은 록히드 마틴사의 정찰기 모델명이었다. 딱히 뭐 대단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4명의 친구는 몰랐다. 새로 바꾼 밴드명이 지구촌 음악팬들의 머릿속에 기억될 거라곤 말이다. 그 이름은 바로 U2였다.


풋풋함.


1987년 발표한 Joshua Tree를 시작으로 최고의 밴드 반열에 올라, 대중적, 음악적 성취 모든 것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들의 멤버쉽이다. 멤버들은 스스로를 '네발달린 테이블'이라고 부르곤 한다. 작사는 보노가 주로 하지만 작곡은 멤버 전체가 함께 임하기 때문이다. 멤버 모두가 밴드를 '공동체'라 인식한다. 2003년, 2005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오른 보노가 가장 튀어보이긴 하지만 밴드 멤버는 물론 매니저까지 비슷한 사회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어 갈등이 벌어지진 않는다. (매니저인 폴 맥기니스는 폴 맥카트니를 화끈하게 비난한적이 있다. 폴 맥카트니와 같은 돈 많은 슈퍼스타가 비자카드에 후원받으며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공연 예매를 비자카드만 되게 하믄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본다는 궁색한 변명이나 늘어놓는다는 이유에서 였다.) 


'저는 한 밴드의 멤버들이 성실함을 잃지 않고, 서로에게 충실할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우리가 깨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음악... 그러러면 돈의 힘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겠죠.'  ---- 보노

이렇게 멤버는 물론이요, 매니져까지 공통적인 가치관으로 똘똘뭉친 그들은 1976년 결성이후 심각한 불화도, 멤버의 변동도 없었다. 더욱이 변함없는 그들의 음악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랑이 있으면 전쟁도 있는 법. 이렇게 훈훈한 '들은 척'만 늘어놓게 되면 자칫 꼰대 취급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게다가 '니는 절대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며 뜬금없이 공격받게 될 수 도 있다. 그러한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고, 더불어 싸움구경, 불구경 좋아하는 우리 전통의 계승차원에서 살짝 반대의 경우를 들이대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들은 척은 보장한다 할 수 있겠다.



전쟁...

1990년대 초반, F1은 급격한 인기 상승은 아일톤 세나라는 슈퍼스타의 등장으로 가능했지만, 동시에 같은 팀에서 활약하며, 1-2위를 다투고, 때론 서로를 비난했던 알랭 프로스트와의 갈등도 한 몫을 했음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다. 같은 팀 동료이면서 동시에 가장 살벌하게 경쟁하고, 서로를 디스하기 바빴던 그들. 전세계 팬들은 그들의 환상적인 실력만큼이나, 시시때때로 벌어진 디스베틀을 흥미로워 했다. 사실 싸움구경이 더 즐거운 법 아니던가. 음악계에도 그런 밴드가 있었으니 바로 오아시스다.

1993년 노엘 갤러거, 리암 갤러거 형제를 중심으로 결성된 오아시스는 2009년 해체한다. 영국밴드로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등 분명한 성취가 있었으나 이 밴드의 역사는 갤러거 형제의 다툼과 화해의 역사이기도 했다. 노엘이 밴드를 탈퇴해 실질적으로 밴드가 해체될 때 드러난 이유는 '리암의 보컬이 존나 형편없다'는 노엘의 분노(?)였지만 이들의 갈등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경호원은 리암과 나를 떼어놓기 위해 고용됐다'고 노엘 갤러거가 대놓고 말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형제애.


유명한 일화 하나 더. 노엘 갤러거는 그들의 최고 히트곡 'Don't look back in anger'를 만든 후 자신이 부르고 싶었지만, 보컬인 동생 리암이 자신에게 양보하지 않을 듯 했다. 노엘은 안되겠다 싶어 다른 곡 'Wonderwall'를 자신이 부르겠다 꼬장을 피자 리암이 그곡은 안되니깐 'Don't look back in anger'를 노엘에게 양보 했다는 것이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인데도 이러고 있었다. 이 형제의 갈등으로 결국 밴드는 해체되었는데, 서로의 기타를 막 때려부수고 지랄을하다 결국 노엘이 '씨바 다 조까' 그러고 탈퇴했다는 설도 있다. 어쨋거나, 오아시스는 아무렇지 않게 해체, 노엘 갤러거는 솔로와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의 서포터를 병행(진짜 졸라 광팬이다), 리암과 나머지 멤버들은 비디아이로 활동하고 있다.



이쯤에서 U2의 음악이 흘러나올때나,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면, 일단 가볍게 그들을 멤버쉽 역사로 '들은 척'을 푼다. 그리고 '어디 세상사 다 그리 좋은 것들만 있게는가'라는 가히 득도틱한 멘트를 던진다. 그리도 정반대의 케이스를 살짝 들이댄다. 여기까지 제대로 들은척을 시전한뒤 본 게임은 지금부터라는 듯한 표정이 지어보이자. 모든 플레이엔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이쯤에서 이런 멘트를 던지는 것이다.


'사실  그런 경우가 좀 있죠'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들은 척 매뉴얼.




PLAYLIST

  1. Hotel Califonia - Eagles (1976. Hotel Califonia)
  2. Wasted Time - Eagles (1976. Hotel Califonia)
  3. Bridge Over Troubled Water - Simon and Gafunkle (1970. Bridge Over Troubled Water)
  4. El condor pasa - Simon and Gafunkle (1970. Bridge Over Troubled Water)
  5. Dacing Queen - Abba (1976. Arrival)
  6. The Winner Takes it all - Abba (1980. Super Trouper)

이글스, 사이먼 앤 가펑클, 아바. 모두 70년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들이다. 그러나 화려한 정점을 찍고는 모두 헤어졌다. 레드제플린처럼 멤버가 사망한 어쩔 수 없는 이유는 아니었다. 모두 불화였다. 이글스는 돈 헨리와 글렌 프라이 콤비의 활약과, 돈 펠더의 영입을 통해 국민밴드가 되어가고 있었고, 동네 XX친구인 사이먼과 가펑클은 세계적인 포크 듀오의 자리에 올랐으며, 아바의 인기는 비틀즈 다음이었다. 그렇게 모두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영원하진 않았다.

'나는 가펑클에 맞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가펑클이 부를 노래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죠. 하지만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에 대중이 모두 가펑클에게만 환호하는 듯했습니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의 성공 이후 모든게 끝났습니다. 너무 젊었던 탓에 그 순간에 인생이 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트 가펑클과 헤어지고 난 폴 사이먼의 말이다. 이글스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이별에 경쟁과 열등이 작용했다면, 아바의 이별은 그것과 좀 달랐다. 밴드를 이루는 두쌍의 부부가 모두 이혼했지만, 음악을 만들었던 두 남자, 비욘과 베니 콤비는 여전했기 때문이다.

아바가 평론가들에게 외면받았던 이유라든지, 이글스 최고의 앨범 Hotel Califonia에 담겨진 미국사회의 성찰에 대한 내용이라든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음악이 전통적인 포크와 어떻게 같고 또 다른지, 뭐 이런 것들은 임진모 선생이나, 배철수 선생에게 묻도록 하자. 우리는 이글스가 잘 나가다 어떻게 깨졌는지, 사이먼과 가펑클이 왜 빠이빠이를 했는지, 아바가 해산할 때 도대체 뭔일이 있었는지 바로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다시한번 '들은 척 매뉴얼은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할 뿐더러, 동시에 실패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차분하게 Josh Groban & Brian McKnight 버전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함 듣고 시작하자.





들은 척 세부 스킬.


Hotel California
어두워진 사막의 고속도로. 시원한 바람이 내 마빡에 스치운다.
훈훈한 클리타스 스뭴이 대기중에 퍼져가네.
저 멀리 어딘가. 난 한들거리는 불빛을 발견했쥐.
머리가 슬슬 둔탁해지고, 시야는 흐려져만 가.
하룻밤을 묵기위해 거기서 멈춰야만 했어
 
**클리타스(colitas)의 뜻은 함 찾아 보시라.

내가 하룻밤을 어디서 묵었냐고? 그곳은 바로 '호텔 캘리포니아'다. 그렇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밴드 이글스(Eagles)의 1976년작 Hotel California에 수록된 동명 타이틀곡 'Hotel California'의 한소절이다. 이글스는 이 앨범으로 밴드가 성취해야할 대부분을 이뤘다. 앨범은 8주간 1위를 달리며 천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으며, 그래미 주요부분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했다. 멤버들 조차도 의아할 정도의 성공이었다. 


그들의 시작은 린다 론스태드의 백밴드였다. 백밴드 멤버였던 돈 헨리, 글렌 프라이, 랜디 마이즈너, 버니 리든이 의기투합해 이글스를 결성한다. 그리고 슬슬 활동을 시작하더니, 2집 발표 후 린다 론스태드가 자신들이 발표한 곡(Desperado)을 부르게 되는, 백 밴드가 아닌 주목받고, 인정받는 밴드의 자리에 오르는 상황이 된다. 이어 앨범 Hotel California라는 슈퍼히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성공의 결정은 계기는 아마도 버니 리든을 대신한 기타리스트 조 월시의 영입일 것이다. 롹밴드 제임스 갱 출신인 그로 인해 이글스의 색깔이 컨츄리에서 롹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그 과정의 결과물이 바로 앨범 Hotel California였다. 이글스와 조 월시의 만남은 이렇게 완벽하고,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1994년 재결성당시 이글스. 가장 왼쪽이 조 월시. 가장 우측이 돈 펠더

화려한 쌍기타 듀오인 조 월시와 돈 펠더. 하지만 돈 펠더는 조 월시가 맘에 들지 않았다. 조 월시로 인해 밴드의 색깔이 바뀌는 것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고의 쌍기타 플레이가 가능했던 이유. 틀어진 사이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Hotel California'는 조 월시의 가입으로 위기감을 느낀 돈 펠더가 30분이 넘는 대곡을 샘플로 가져오자, 돈 헨리와 글렌 프라이 콤비가 가다듬어 만든 곡이다. 후반부 쌍기타 플레이를 가만히 듣고있자면 서로 막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것 같기도 하다. 조 월시는 이렇게 말했다.

'마치 둘이 경쟁하듯 저돌적인 에너를 담고 서로를 향해들이 댔다. 'Hotel California'의 기가막힌 연주는 그 덕분에 가능했다'

조 월시와 돈 펠더의 균열은 곧 밴드 전체의 분열로 이어졌다. 찰떡 궁합이었던 돈헨리와 글렌 프라이도 사이도 이미 틀어져있었던 것이다. 이글스는 한장의 앨범을 더 발표한 뒤 공식적으로 해체한다. 82년의 일이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1957년 Hey schoolgirl라는 곡으로 톰과 제리(Tom&Jerry)라는 듀오가 데뷔를 한다. 톰과 제리는 실패를 거듭하여 만남과 이별을 되풀이 한다. 톰은 헤어진 동안에도 솔로로 활동하며 송라이터가 되기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제리는 뭐 틈틈히 노래 연습하면서 대학생활을 즐겼다. 그러던 중, 그들의 실패한 1집 앨범의 프로듀서 톰 윌슨이라는 양반이 톰과 제리에게 말도 않고 그들의 곡을 지멋대로 편곡해 발표한다. 헌데 '어머나' 그곡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이름이 알려지자 톰과 제리는 재결합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 '졸업'의 사운드 트랙에 참여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더니, 1970년 최고의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바로 Bridge Over Troubled Water. 톰과 제리로 시작한 이 듀오의 이름은 바로 사이먼 앤 가펑클이다.


Fire Egg Friend 인증샷.


앨범 Bridge Over Troubled Water 천만장에 가까운 성적을 올렸다. 동명 타이틀 곡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물론이요, The boxer, Cecilia, El condor pasa등이 연속으로 히트하며 그래미 6개부분 수상이라는 당시 최고 기록을 세운다(복습: 훗날 마이클잭슨에의해 이 기록은 깨진다). 최고의 성공과, 성취였다. 폴 사이먼의 송 라이터로서의 역량과 아트 가펑클은 아름다운 목소리는 최고의 조합이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이들 역시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숨막히는 멜로디. 아름다운 가사. 환상적인 하모니. 그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녹음할 당시 사이먼과 가펑클의 균열은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가펑클은 사이먼의 능력에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고(훗날 헤어진 후 솔로공연을 하던 아트가펑클은 '이곡은 폴 사이먼이 만든 노래가 아니다'고 멘트했을 정도였다), 녹음 중에 해외로 영화촬영을 가기도 했다. 한간에 폴 사이먼은 'Bridge Over Troubled Water'을 만들고 아트 가펑클에게 부르라고 했으나, 아트 가펑클은 오히려 사이먼에게 부르라고 했단다. 서로를 위해 그랬다고 하기도 하고, 서로 자기가 부르겠다고 다퉜다고 하기도 한다. 결국 아트 가펑클이 부르게 되었고, 엄청난 히트를 치게 되자 폴 사이먼이 땅을치고 후회했다고도 한다. 물론 백뿌로 확인 된 건 아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이 앨범을 끝으로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많은 팬들이 그들의 노래를 듣고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보자 의지는 다지는 동안, 그들 사이의 다리는 이미 붕괴되어 철거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화 '톰과 제리'의 주인공인 톰과 제리도 결국 이별했듯이, 뉴욕출신 톰과 제리 역시 그렇게 이별하고 만다.






The Winner Takes It All

1976. U2가 고등학교에서 밴드를 결성할 무렵. 아그네사, 애니프리드, 베니, 비욘으로 구성된 스웨덴 그룹 아바(ABBA)는 그해 발표한 앨범 Arrival에 수록 그 유명한 춤의 여왕(Dacing Queen)으로 첫 빌보드 1위를 달성했다. 이듬해 스웨덴 기업 중 최고 수익을 올린 기업은 볼보로, 90억이었다. 그리고 아바의 수익은 110억으로 스웨덴 수입 '갑'을 차지하게 되는 상상키 힘든 기록을 남긴다. (사실은 2위였다는 설도 있다. 스웨덴 정부가 자국이 문화강국임을 알리기 위해 일부로 순위를 바꿨다는 것이다). 1973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등장하며 순식간에 세계적인슈퍼스타의 자리에 오른 아바. 그들의 시작은 다름아닌 '사랑'이었다.


아바를 결성하기 전, 비욘과 베니는 자작곡 파트너였다. 그렇게 몇해를 알고 지내던 중 비욘은 한 텔레비젼 쇼에서 당시 잘나가던 여성 싱어 아그네사를 만나게 된다. 같은 시기 베니 역시 콘테스트 출신인 애니프리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을 키우게 된다. 1971년 비욘과 아그네스가 결혼, 베니와 애니프리드는 약혼, 동거에 들어간다. 이렇게 두쌍으로 부부로 아바는 탄생하게 되는데, 이름 역시 돈독했던 관계처럼 자신들이 이름 앞글자를 따 ABBA로 정하게 된다.


당시 스웨덴엔 같은 상호의 통조립 기업이 있었으나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아바는 대신 B를 하나 뒤집어 사용했다. 이렇게 탄생한 아바는 1973년 유로비젼 송 콘테스트 스웨덴 예선에 참가하지만 3위를 차지하며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다. 스웨덴 예선 당일은 사실 아그네사의 출산 예정일이었다. 예선을 마치고, 아그네스의 순산과, 산후조리가 완벽하게 마무리 된 1974년 스웨덴 대표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 영국대표로 참여한 올리비아 뉴튼 존을 제치고 'Waterroo'로 1위를 차지한다. 스칸디나반도의  두 부부가 유럽은 물론이요, 전세계의 스타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선포와도 같았다. 그들은 머지않아 미국 정복은 물론이요, 러시아에서까지 앨범이 고가에 밀거래되는 진짜 슈퍼스타가 된다. 


부부친목계가 아니고 ABBA.


아바의 열풍은 70년대를 넘어 80년대를 향하고 있었다. 오랜 동거를 했던 베니와 애니프리드가 78년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려 팝스타에게선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부부애를 팬들에게 확인시켜주는 듯 했으나, 몇 달 뒤 비욘과 아그네스가 이혼 수속을 밟기 시작한다. 이듬해 비욘은 이혼의 아픔을 담아 술김으로 1시간만에 The Winner Takes it all을 써재낀다. 스튜디오에서 아그네스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곡으로 유럽 각국에서 1위, 미국에서 7위를 거둔다. 하지만 이곡이 사실상 그들의 마지막 히트곡이었다. 81년 베니와 애니프리드 역시 갈라선다. (비욘과 아그네스는 '육아'문제로 인한 갈등 때문이었고, 베니와 애니프리드는 원래 다툼이 심했다고 한다. 뭐 부부간의 일, 당사자 아님 누가 알겠는가.)


두 부부의 이별과 함께 밴드의 인기역시 하락. 83년 공식 해산한다. 사랑하는 두쌍의 부부로는 가능했으나, 헤어지 네명의 돌싱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부부간의 사이는 물론이요, 환상적인 화음을 보여준 아그네스와 애니프리드는 불화도 심각했다. (아그네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받고 자랐고, 애니프리드는 사생아에 힘든 유년기를 보낸, 애초부터 잘 맞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비틀즈 다음의 성공은 누구냐?'는 질문에 존 레논은 망설임없이 '아바'라 답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슈퍼밴드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


이글스는 1994년 MTV가 주최한 Uplugged공연을 통해 컴백한 후, 투어를 통해 다시한번 슈퍼밴드임을 확인했고,(현재 조 월시와 경쟁했던 돈 펠더는 탈퇴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1981년 그 유명한 50만명이 운집한 뉴욕 센트럴 파크 공연등 종종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2000년 투어조건으로 10억달러를 제안받았으나 '쌩'깐 아바의 재결합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헤어진 연인이 친구사이가 되지 못한다는 일부 의견을 증명하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여전히 뮤지컬, 영화로 '맘마미아'의 흥행이 계속되고 있으니 뭐.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 옛말로 깔끔하게 들은 척을 마무리 하도록 하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들은 척 매뉴얼을 깜지 백장 페이스로 숙지했다고 하더라도, '들은 척' 은 넘치믄 조땐다. 같은 자리에 진정한 고수가 있다면 언제든 튈 준비를 하자.  아무쪼록 이번에도 독자 제위덜의 성공적인 '들은 척'을 기원하는 바다.



추신.
자료를 찾다보니 SG워너비의 'SG'가 사이먼 앤 가펑클처럼 되고 싶다는 의미라는데... 난 그말이 뭔소리인지 아직 이해를 못하고 있다.



딴지뮤직 수석쉐프
너클볼러


2012년 6월 11일 월요일

[들은 척 매뉴얼] 마이클 잭슨


들어가는 척 하며… 아니 들어가며…

들은 척’이란 대개의 경우는 고의로, 아주 드물게는 착오에 의해 어떤 곡을 전혀 듣지 않았음에도 들은 것처럼 행세하는 모든 행위의 통칭이라 정의할 수 있다. 도박판의 판돈이 원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듯 어떤 유형이로든 들은 척을 시작하게 되면 그 결과는 득이 될 수도 있고, 실이 될 수도 있다.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사람들의 지위에 대한 집착은 곧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한 수단을 확보하기 위함에 있다고 분석했다. 어쩌면 들은 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도는 이 이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요컨대 들은 척의 성공 여부가 가져다 주는 득실은 개인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기대감과 정확히 비례하는 그 무엇이라 하겠다.


'척' 계의 코란.


대부분 딴지 독자 제위들께서는 ‘척’ 보고 알아챘을 것이다. 위 서문은 바로 트위터 플픽과 실제의 모습과의 싱크로율 백뿌로를 자랑하는 너부리 편집장의 불후의 저서, <<읽은 척 매뉴얼>>의 서문을  ‘책’을 ‘곡’으로, ‘읽은’을 ‘들은’으로만 바꾼 바로 그것이다. <<읽은 척 매뉴얼>>이 무엇인가? 서문이 좋으면 본론이 개판이라는 ‘용두사미즘’마저 과감히 부정한 위대한 저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척’계의 코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척’을 아우르는 경전인바, 서문의 감동이야 이루 말할나위가 없겠으나, 트위터 플픽과 실제의 싱크로율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요지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너무 그러지들 말자. 외로운 게 싫다고 호소하지 않나. 그게 정 싫으면 실제로 함 보고 말하자. 그리고 사람 너무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하는 거 아니다. 더욱이 연재될지 안될지 모를 본 시리즈, 대놓고 <<읽은 척 매뉴얼>>의 왕창 오마주인 바. 이 기획이 모두 다 너부리 편집장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니 이해하고 또 이해하자.


어떤게 플픽이게?



3천만을 위한 매뉴얼.

5월 14일자 이동통신 업계에 따르면 11일 기준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는 2천672만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이동전화 가입자 5천255만명의 50.84%로 절반을 넘어선 것이다. 이거슨 언제든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어재낄 수 있는 사람 수가 무려 2천672만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 매뉴얼은 바로 2천672만명, 아니 반올림해 3천만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단순 감상자는 물론이요, '옆에 있는 아리따운 여인 귓구녕에 이어폰 한 짝 대뜸 꽂아 넣기'등의 응용기술을 시전하는 고급사용자들을 위한 매뉴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듣고 느낀다는 본질적인 기능을 뛰어넘어 ‘척’계의 경전 <<읽은 척 매뉴얼>>를 베이스로 하여 연인 사이에, 친구 사이에, 동료 사이에, 듣보 사이에 다양한 응용기술을 가미할 수 있는 음악계의 초연히 등장한 하이브리드 ‘본류’이자 그 어떤 쉐프도 듣도보도 못한 극강의 레쉬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 가슴 떨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이고, 위대한 등장과는 달리 사용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등장하는 뮤지션, 혹은 곡들에 얽힌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꼼꼼히 읽어 내려간다. 그리고 관련된 곡들을 음미하듯 감상한다. 얼마 전 우리 쉐프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음식의 맛은 말이죠. 미각보다 후각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해요’ 그렇다. 와인의 진정한 맛도 와인 잔에 코를 쑤셔 넣고 ‘큭큭’해야 느낄 수 있듯 먹고, 씹고, 맛보고, 즐기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후각과 미각을 총동원하여 맛의 본질에 접근하듯, 한곡 한곡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복기하며 듣는다. 일종의 청각을 통한 이미지프로세싱, 득도의 과정인 것이다.


소개한 곡들을 앨범을 사거나, 제값(?)주고 다운받아 스마트폰에 집어 넣는다. 그리고 듣는다. 자신의 나와바리에서는 이어폰이나 오디오를 통해 틀어놓고 들은 척을 하거나, 음식점이나 술집 같은 공개된 장소의 경우, 학습한 곡들이 나올 때 잽싸게 들은 척 하시면 된다. 행여나 자신을 들은 척을 뛰어넘은 내용들을 나오게 되면 긴장들 마시고 이어폰을 잡아 빼거나, 잽싸게 ‘더 좋은 곡 들려 줄께’라는 멘트와 함께 다음트랙으로 넘기면 된다. 공개적인 장소에선 갑자기 '똥 마렵다'는 핑계가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대응방법 되겠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성공은 보장 못한다.


드디어 딴지 뮤직에서 본격적으로 제공하는 들은 척 매뉴얼의 시작을 가열차게 알리는 바다. 5월은 가정의 달. 살짝 늦었지만 - 뭐 언제 우리가 따박따박 시기 맞추고 그랬던가 – 가정의 달 특집이자, 슈퍼스타 추모 특집이다.  그래 봐야 <읽은 척 매뉴얼>의 대놓고 오마주이면서 뭐 그리 대단하게 호들갑이냐고? 그게 궁금하신가? 그 이유는 우리 함께 ‘진실과 사실 사이의 촘촘한 경계’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싫음 말고…


자. 그럼 이 영광스런 시작의 주인공은 바로... 팝의 황제. 상처입은 영혼 마이클 잭슨 되시겠다.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1958년 8월 29일 - 2009년 6월 25일)



시작하기 전에...




지금으로부터 3년전, 락앤롤 명예의 전당 기념 콘서트에 등장한 스티비 원더. 비비 킹, 스모키 로빈슨, 스팅, 제프 벡과 같은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과 함께 자신과 함께하는 뮤지션의 히트곡을 불렀다. 제프 벡과 스티비 원더와 함께 부르는 'Superstition'을 상상해보라. 뭐가 막 벌렁벌렁 그런다. 스모키 로빈슨이 내려가고 올라온 존 레전드, 스티비 원더는 존 레전드의 피아노에 맞추어 마이클 잭슨의 'The Way You Make Me Feel'을 부른다. 2절을 후렴을 부를 즈음 그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불과 몇달전 세상의 떠난 팝의 황제 마이클잭슨이 사무치도록 그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 그렇게 소울의 신은 팝의 황제에게 또다시 작별인사를 건냈다.


마이클 잭슨의 1982년작 'Thriller'의 프로듀싱에 참여한 슈퍼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2009년 마이클 잭슨을 허망하게 떠나 보낸뒤 이렇게 말했다.

"이 뛰어난 아티스트는 발소리 나지 않는 고양이 같은 우아함으로 무대를 누볐고, 음반업계의 기록을 경신했으며, 세계 전역에서 문화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어디 그뿐인가. 혹자는 마이클 잭슨이 있었기에 오바마의 당선도 가능했다고도 한다. 단일앨범 1억 1,000만장(2위 AC/DC의 Back In Black 4,900만장), 10장의 정규앨범 통틀어 7억 5천만장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의 보유자. 그래미 19회, 아메리칸 뮤직어워드 13회, 빌보드 어워드 40회 수상. 13곡의 넘버원 싱글등. 11살의 나이 'I Want You Back'으로 최연소 빌보드 차트 1위를 한 뒤로 늘 정상에 있었던, 더 떠들어봐야 내 주댕이만 아픈 그야말로 저스트 팝의 황제. 이런 슈퍼스타의 경우, 무지막지한 필모그래피에 대해 어설프게 들은 척 했다가는 자칫 조때는 결론에 '어서옵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아무리 이 매뉴얼을 달달 외운다할지라도 결코 ‘임진모선생’이나 ‘배철수선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여 이런 경우 '들은 척'의 정도가 아닌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길이 아니면 돌아가는 거다.


마이클 잭슨. 그를 직접 보고, 들은 세대들에겐 당연 그의 이전에도, 그의 이후에도,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팝의 황제 그 자체이겠으나, 그를 보고 듣지 못한 세대들에겐 서서히 낯선 이름이 되고 있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아니 마이클 잭슨을 모르다니’라며 호들갑 떨지 말자. 누군가에겐 ‘문워크’는 양준혁의 홈런 쒜레머니(할라면 제대로 하든가)로 기억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니 말이다.


문워크를 모독한 양준혁의 쀍스텝


마이클 잭슨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2009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힘들게 복귀를 준비하던 시점이었다. 게다가 계속된 성형으로 인한 부작용과 결혼 실패, 아동 성추행 혐의등으로 팝의 황제라는 수식어에 깊은 상처를 입고 난 뒤였다. 아마 그의 음악 먼저 접하지 못했던 많은 이들에게 마이클잭슨은 성형 부작용으로 인해 마스크에 얼굴을 숨기고 다니는 흉칙한 정신이상자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언론은 마스크와 모자 속에 숨은 그의 모습을 헤드라인으로 뽑아냈다. 팝의 황제가 팝계의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클잭슨 사망 3주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 5월은 가정의 달.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몇곡 함께 들으며, 많은 이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느라 정작 자신은 외로웠던 슈퍼스타를 떠올려보자. 세계가 인정한 슈퍼스타였고, 동시에 가장 불우한 아들이기도 했던 마이클 잭슨. 입이 슬슬 간지러워들 지시는가. 그래도 참자. 매뉴얼 정독 후 들은 척해도 늦지 않는다.




들은 척 매뉴얼

PLAYLIST

  1. Billie Jean (Thriller. 1982)
  2. Beat It  (Thriller. 1982)
  3. Thriller  (Thriller. 1982)
  4. Bad (Bad. 1987)
  5. The Way You Make Me Feel (Bad. 1987)
  6. Man In The Mirror (Bad. 1987)
  7. Black Or White (Dangerous. 1991)
  8. You Are Not Alone (Dangerous. 1991)

마이클의 음악에 맞추어 춤도 출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고... 그리고 '음음음'도 할 수 도 있다. (제인 폰다)


위의 7곡은 마이클잭슨의 수많은 히트곡 중, 그러니까 춤추 출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고, '음음음'도 할 수 있는 흑과 백, 동과 서를 넘나드는 완벽한 크로스오버 트랙 중, 메가 히트곡정도가 되겠다. 이 정도의 히트곡으로 들은 척은 가능하다. 거기에

'Beat It'의 기타는 밴 헤일런의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의 작품.
'Black or White'의 기타 인트로는 건스 앤 로지스의 기타리스트 슬래쉬의 작품.
'Billie Jean'의 뮤직비디오는 MTV에서 방영된 흑인 첫 뮤직비디오.
'Human nature'는 몇년 뒤 여성 3인조 SWV의 'Right Here'로 샘플링되어 인기를 끔.

이런 내용들을 겯들인다면 들은 척은 더욱 감질날 수 있다. 더불어 초기 앨범은 퀸시존스, 후기 히트작 Danerous는 블랙스트릿의 멤버이기도 한 테디 라일리가 프로듀싱했다는 사실들을 뜬금없는 던져 먹혀들어간다면 당신은 순식간에 짝퉁임진모선생정도의 대접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히 일부의 선곡을 가지고 들은 척을 했다가는 ‘폴 메카트니가 작곡해준 Girlfriend 같은 곡은 어떻냐?’는 질문에 ‘폴메카트니가 뭐요?’라 되 물음으로서 허망하고, 개망신스럽게 종결될 수도 있다. 들은 척의 백미는 모르는 부분에선 과감히 침묵을 지키다, 들은 척이 가능한 미묘한 구녕을 파고들어 대화를 완벽히 주도한 뒤 홀연히 빠지는 ‘치고 빠지기’ 전술에 있다. 일단 마이클잭슨에 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면 차분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던진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 잘못 만나믄 천하의 마이클도 조때는 거죠.’

이제 청중들은 ‘이게 뭥미’스럽게 당신을 바라볼 것이다. 이제 무대는 당신의 것. 시원스럽게 들은 척을 시전한다.




들은 척의 세부스킬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나자, 팝계는 그를 추모하고, 동시에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사건과 오해들로 그가 성취한 음악적 업적마저도 듣보 취급당했기 때문이었다. 판권문제로 사이가 틀어졌던 폴 메카트니도 ‘잭슨과 함께 작업했다는 것 자체가 곧 특권을 누린것이다’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런 추모와, 재조명의 분위기 속에서도 유일하게 욕을 처묵는 분이 계셨으니 그분은 바로 마이클 잭슨의 친아버지 조 잭슨이었다. 아들 마이클 잭슨이 죽은 뒤 얼마되지 않아, 카지노를 들락거리고, 대놓고 죽은 아들의 판권 장사를 하겠다 떠들어대고, 아들이 재산의 일부를 자신에게 달라는 소송을 내고 자빠졌기 때문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능력 밖의 일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부모를 고르는 것이었다.

'나는 벨트로 채찍질을 했을 뿐이다. 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리는 것은 몽둥이로 후려 치는 것을 말한다.' 

-조 잭슨. 2005년 AP와의 인터뷰중-


마이클 잭슨은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클라니넷 연주자임과 동시에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고, 아버지는 크레인 기사이자, 밴드 팔콘스의 기타리스트였다. 아버지 조 잭슨은 만개하지 못한 음악인으로서의 꿈을 자신의 자식들을 통해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그 대리만족의 도가 지나쳤다.


못난 애비상 수장자. 조 잭슨


자신의 대리만족을 이뤄줄 만큼의 재능이 자식들에게 있다고 판단한 조 잭슨은 찬장 구석에 숨겨놓은 자신의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 악기를 구입한 뒤 자식들에게 악기와 함께 지옥훈련을 선사한다. 마이클 잭슨은 훗날 오프라윈프리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는다.


'8살 때부터 쉼 없이 일했다. 아버지만 보면 무서워 토할 것 같았다'


채찍을 들고 앉자 아이들을 연습시켰던 아버지, 그로인해 느꼈을 가족의 공백, 고통스런 기억, 순식간에 오른 스타의 자리, 하지만 음악적, 사회적 명성외에 마이클 잭슨은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 19살때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쥐를 사랑해요. 쥐를과 놀때면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 같아요'로 밝혔듯, 그의 정신은 이미 깊은 상처로 다시 회복하지 못할 심각한 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세상에 그 많은 것중에 하필 쥐라니... 앨범 Dangerous까지 끊임없이 성공하고 인정받았지만, 그의 피부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갔고, 그의 코는 인공적인 실리콘 구조물이 되어갔으며, 두번의 결혼에 실패했고, 2003년엔 아동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하게 된다.


아동성추행 혐의는 팝의 황제에게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무죄였다. 하지만 상처가 깊었다. 자신의 개인 테마파크인 네버랜드에 아이들을 초대해 같이 놀고, 같이 자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 오해를 더욱 부풀렸다. 온몸이 벗겨진 채 아버지에게 폭행당했던, 한번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러나 떨쳐버리지 못했던 그에게 아이들은 그가 받지 못한 것을 대신 해주고 픈 셀프힐링의 대상이었을 지 모른다. 유년시절의 상처는 그렇게 또 깊게 베어만 갔다.


한편으론 너무나 외로운 모습


마이클 잭슨은 어떻게든 재기하려 했다. 그의 외모와 기행을 놓고 사람들은 손가락질 하기 바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복귀 준비를 했다. 그렇게 팝의 황제가 힘겹게 다시 돌아오려 노력하고 있을 즈음 갑작스럽게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된다. 복귀를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This Is It에만 힘겹지만 최선을 다하는 마지막 모습이 담담하게 담겨져 있을 뿐이다.


늘 아버지에게 못생겼다는 말을 들어온 팝의 황제는 어릴 때와 너무 바뀐 얼굴을 한 채 떠났다. 스타가 되믄 뭐할 것이고, 기네스북에 오르는 뭐할 것이냐. 집 앞마당에 테마파크를 만들어놓고 식후땡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믄 뭐할 것이냔 말이다. 팬들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You Are Not Alone 노래를 불러도, 정작 자신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데 말이다. 아 씨발 안타깝고 불쌍하다.


어릴 적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오줌을 저렸던 아버지를 마이클 잭슨은 끊어내지 못했다. 몸서리치게 두려워했으면서도 자신이 슈퍼스타가 될 수 있도록 이끌었다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아버지덕에 잭슨5도 가능했고, 마이클 잭슨도 가능했다. 하지만 옳지 않았다.


원스 어폰어 타임 인 아뭬리카. 치과의사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트럼펫을 선물한다. 어머니는 아들이 피아노를 하길 바랬다. 허나 아들은 트럼펫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개인교사를 초청해 아들을 후원했다. 아들은 훗날 그 유명한 줄리어드 음대에 합격한다. 그러나 최고 명문대에 합격한 아들은 클래식과 백인위주의 수업대신 찰리파커와 같은 대가들과의 클럽 세션에 몰두했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에게 줄리어드 음대 자퇴를 선언한다. 아버지는 순순히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 자신의 것을 가져라'는 신념을 전했다. 그 아들은 훗날 음악사에 신화로 새겨졌다. 그 아들은 바로 '마일즈 데이비스'다.


재즈계의 뤠전드. 마일즈 데이비스


사실 스티비원더의 아버지도 살짝 난봉꾼에 가까웠다. 하지만 스티비 원더에겐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한줄기 빛을 느끼게 해주는 어머니가 있었다. 197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5개 부문을 휩쓴 스티비 원더는 어머니와 함께 무대에 서서 이렇게 말한다.

‘이분의 의지가 오늘날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1984년, 한큐에 그래미 8개 부문 수상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마이클 잭슨은 수상소감에서 이게 다 '간' 때문 아니, 아부지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스티비원더와 같은 어머니도 없었다. (조잭슨을 막기에 어머니는 너무 나약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했던 슈퍼스타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외로웠다. 세상은 슈퍼스타의 외로움을 토닥여주지 못했고, 한때 슈퍼스타는 괴물이 되기도 했다. 힘겹게 괴물로 덧칠된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슈퍼스타는 안타깝게도 복귀가 아닌 부고소식을 전하게 된다. 마이클잭슨 추모 3주기를 맞이하여, 그를 일그러진 얼굴의 이슈메이커가 아닌, 상처입고 아파했던 팝의 황제로 잠시나마 기억하며 대단원의 들은 척을 갈음하도록 하자.


근데... 이게 무슨 가정의 달 특집이냐고? 이 글을 보고도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소심한 독재자' 타입입니다. 끄~~읏





추신.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절, 이불 뒤짚어쓰고 몰래 들으며 위로받았던 곡이 바로 마이클 잭슨의 Man In The Mirror였다. 테이프가 늘어질대로 늘어지도록 힘들 때마다 듣고 또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 별 것 아닌 글을 힘들 때 같이 해준 그와 그의 음악에 바친다.


사족.

본문 중 '폴메카트니가 뭐요', 당신은 '소심한 독재자' 타입입니다  이 두개의 뜬금없는 멘트들의 저작권은 본지 필진 '춘심애비'님에게 있다는 춘심애비(@miiruu) 님 본인의 강력한 주장이다.






딴지뮤직 수석 쉐프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