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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0일 금요일

[좌충우돌세계사] 참수 혹은 린치 - 린치 '정몽주'




 
**지난 ‘신돈’편을 읽고 넘어오믄 더 재미질지도 모름. 아님 말고…




포은 정몽주 1337~1392


The Politician.

1392년 어느 날.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포은 정몽주에게서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이성계가 개성에 컴백했다는 것은 루머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전치 30주의 중상을 입었다는 첩보를 접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혁명파’의 수장 이성계는 개성에 입성해 있었다. 정몽주는 보좌진에게 ‘이성계가 어떻게 개성에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 있느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성계의 개성 컴백과 함께 ‘정몽주 제거설’이 프락치를 통해 입수되었지만 당사자인 정몽주는 그리 불안해 하지 않았다. 그래도 뜻을 같이했던, 무인이지만 문인을 아끼고 따랐던 이성계가 뒤에서 칼을 꽂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등에 칼을 쑤셔 넣었다간, 그들이 꿈꾸는 혁명의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믿음도 살짝 있었다. 불안해 한 건 정몽주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보좌진들이었다.



정몽주에게 일정을 전해 받은 보좌진들은 정몽주를 만류했다. 정몽주가 제시한 일정은 두 가지였다. 오전엔 이성계 문병 및 독대 일정, 오후엔 절친이었던 전 판개병부사(현재의 서울시장) 유원의 문상일정이었다. 당연 보좌진들은 오전 일정을 취소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취소하지 않았다. 공양왕을 우습게 보는 이는 있어도, 자신을 우습게 보는 이는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이성계의 옆에는 그의 ‘원 투 펀치’ 삼봉 정도전과 조준도 없는 터였다. 차림을 마친 정몽주는 차분하게 사택을 나서 이성계에게로 향했다. 허나 정몽주가 잊고 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돌아가는 판세를 읽고는 중상을 입고 벽란도의 응급실에서 링겔을 꽂고 있던 이성계를 개성으로 긴급 호송한 이, 26세의 이방원이었다.


가장 최근의 이방원.







이성계의 사저에 도착한 정몽주는 이성계와 독대했다. 그러나 그 둘은 별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 둘은 각각 열쇠를 쥐고 있었다. 고려라는 현재의 왕국의 열쇠를 지닌 정몽주, 그리고 새나라라는 혁명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이성계. 그들은 말없이 자신들이 쥐고 있는 열쇠만을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었다. 자리를 뜬 정몽주를 잡아 세운 건 다름아닌 이방원이었다. 이성계의 사택에서 불꽃이 튀었던 곳은 이성계와 정몽주가 독대했던 안채가 아니라, 이방원가 정몽주가 마주하고 있던 사랑채였다. 이방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여차역하여 여피역하여)
城隍堂後壇 頹落亦何如(성황당후단 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이런들 긔 엇더리, 뎌런들 긔 엇더하리
성황당 뒤담이 해인들 긔 엇더하리
우리도 이러히여 살어이신들 긔 엇더하리


26세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도발적이면서 정중한 노래 ‘하여가(何如歌)’를 이방원이 먼저 읊었다. 고려를 대표하는 학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다름아닌 ‘뭐 볼 거 있다고 거기서 그러고 있냐’는 것이었다. 애둘러 가지 않는, 다분히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정몽주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장본인이 이성계가 아닌 이방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속으로 ‘이런 어린 좆밥 쉐이가 어른들의 싸움에 건방지게 숟가락 올리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방원의 하여가를 듣고는 만만한 놈이 아님을, 잘못 건드렸단 조땔 수 있음을 느꼈다.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방원을 지긋히 바라보며 입을 열였다. ‘어이 친구 이게 바로 진정한 프리스타일이야’라는 표정이었다.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지여)

이 몸이 주거 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 되여 넉시라도 잇고 없고
님 향 일편단심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정몽주의 답변은 ‘단심가(丹心歌)’였다. 정몽주가 풋내기인줄만 알았던 이방원에게 답한 메시지는 ‘여기 볼 거 없어도 너한테는 안가 이 쉐이야’였다. 쿨 하게 한 곡 프리스타일로 읊어 준 정몽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대문인 다운 답가로다. 그것도 프리스타일로 거침없이 쏟아내다니’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그의 제거를 주저하는 이유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문밖에는 그의 수하 조영규가 투엑스라지급 오함마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쉽게 오다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몽주는 애초 일정대로 절친 유원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한 시대가 저물지도 모를 역사적인 순간, 긴히 상의할 친구 하나 없다는 것이 아쉽고, 고독한 그런 순간이었다. 술 몇 잔으로 아쉬움과 고독을 달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정몽주의 눈에 선지교가 들어왔다. 문득 스승이었던 이색과, 후배인 정도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눈 앞에는 스승님도, 후배도 아닌 시커먼 장수 한 놈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오함마가 들려 있었고, 그 오함마는 주저 없이 정몽주에게 향했다.


그가 죽던 날,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 낫다고 하여 선지교는 선죽교로 불리기 시작했다. 자식을 잊지 못한 노모의 비석은 다리 옆에 세워졌는데 죽어서도 멈추지 않는 눈물로 늘 젖어있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유원의 문상을 마치고 돌아가던 정몽주가 죽음을 예상하고 말을 거꾸로 타고 갔다는 설도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한 장면으로 인해 정몽주는 ‘지조의 아이콘’이 되었다. 목숨과 신념을 맞바꾼 위대한 사상가가 되었다. 정몽주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정몽주에 의해 유배에 처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조선건국의 프로듀서 정도전은 새나라를 반대한 간신 정몽주가 ‘지조의 아이콘’이 될 거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단심가의 원작자가 정몽주라는 확증도 없었다.(1)


정몽주가 살해되고 3개월이 지난 고려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500년의 왕조, 조선이 건국되었다. 정몽주가 죽은 지 6년 뒤, 정도전은 정몽주를 보낸 이방원에 의해 참수 당한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정몽주를 지조를 지킨 학자로 복권했다. 정몽주의 지조를 기리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신하들을 향해 자신에게 ‘지조’를 조공하라 던지는 일종의 메시지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렇듯 정몽주가 ‘지조의 아이콘’이 되는 데에는 그를 죽이고, 동시에 그를 복권한 이방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정몽주는 성리학자의 창시자라 불리우는 학자 중의 학자였다. 동시에 이성계, 정도전의 태그팀과 스틸케이지 매치가 가능한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정. 치. 인.



스틸케이지매치




WELLCOME.

1337년. 성균관 재생인 아버지 정운관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몽주는 유복한 환경에서 아무런 모자람, 걱정 없이 자랐다.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고 나았다고 해서 ‘몽란’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나, 이름은 몽란에서 몽룡으로, 최종적으로 아버지가 중국의 주공(주나라 문왕의 아들)을 만나는 태몽을 꾸었다는 이유로 ‘몽주’로 바뀌었다. 동생이 셋이 더 있었지만 사는 데는 문제 없었다. 아버지가 성균관 재생으로 박봉이었으나 집안은 제법 명문 있는 양반가였다. 동생이 열명 더 있다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어머니 이씨는 형제들 중 정몽주를 유독 아꼈다. 장남인데다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총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씨에 눈에는 미친 듯이 총명한 정몽주의 미래가 불안해 보였다. ‘백로가’(白鷺歌)(2)를 지어 정몽주에게 선물하며, 명심 또 명심케 하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희 빛을 새울세라.
청강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어머니가 그토록 까마귀덜, 그러니까 간신(奸臣), 역신(逆臣) 무리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너는 내 인생의 백로'(You Are The 백로 Of My Life)라고 그리 노래를 부르며 당부했건만, 정몽주는 이를 어기고 혁명의 수괴 이성계, 수괴의 브레인 정도전 등과 무려 일촌 같은 것을 맺으며 어울렸다. 예나 지금이나 하지 말라는 게 더 꼴리는 법이다.


아버지 정운관과 당시 잘나가던 유학자인 이색(3)은 맞팔을 하는 사이였다. 자연스럽게 이색의 문하생이 되어 엘리트코스를 밟아 장원급제를 하게 된 정몽주는 어느 날 자신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건장한 사내를 마주하게 된다. 조선건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스승 이색의 문하생 중 단연 돋보였던 정몽주를 오래 전부터 흠모하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정도전의 나이가 17세, 정몽주의 나이 23살 때의 일이다.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대학, 중용, 맹자 등을 추천했고, 정도전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때는 바야흐로 신돈이 성균관을 재건하고,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신진사대부들을 기용해 성균관 곳곳에 배치하던 때였다. 이색은 성균관 대사서가 되었고, 정몽주등이 학관이 되었다. 뒤를 이어 추천에 의해 정도전도 학관이 되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들의 부패가 임계점을 넘어서고, 공민왕이 프론트맨으로 세운 신돈이 토지제도와 노비제도의 개혁을 진행하던 바로 그 시점. 성균관 학관이었던 정몽주는 정치인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끼던 후배 정도전도 마찬가지였다.



정몽주보다 조금 더 잘생긴 삼봉 정도전


Once Upon A Time.

1371년, 신돈을 날려버린 공민왕은 이름도 요상한 자제위(子弟衛)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 말은 왕의 경호를 위한 귀족 자제들의 계모임 같은 것이라 하였지만, 사실은 동성애과 관음에 빠진 공민왕의 여흥을 위한 클럽이었다. 미쳐가는 공민왕은 다양한 동성파트너와 ‘음음’은 물론 동성파트너로 하여금 자신의 부인들을 간음하게 하여 왕자를 얻으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파트너 중 한 명인 홍윤이 부인 중 한명인 ‘익비’를 임신시키자, 공민왕은 홍윤과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내시 최만생을 날려버리려 했다. 그러나 선수는 이를 안 홍윤과 최만생이 쳤다. 술에 취해 떡이 된 공민왕에게 연장세례를 퍼부은 것이다. 공민왕은 연신 ‘고마 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를 외쳤지만 홍륜과 최만재는 이제 막 건전지를 갈아 끼운 자동 처키 인형과 같았다. 찌른대 또 찌르고, 안 찌른대 찾아 찔러댔다. 이렇게 그 어떤 왕보다 가장 잔인하게 죽은 공민왕의 빈자리는 우왕(반야의 아들)의 몫이 되었다.

신돈과 공민왕이 '빠이빠이' 하고 우왕이 들어선 뒤 권문세족(4)이 중심이 된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세력과 권력의 모순을 혁파하려는 개혁파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웃나라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가 일어나 노쇠한 원을 압박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공민왕의 대중외교 기본방침은 ‘반원’이었다. 잘나가던 기황후(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를 등에 업는 기황후의 형제들은 원나라는 물론이요, 고려도 지 꼴리는 대로 쪼물딱거리려 했다. 공민왕은 그 꼬라지가 보기 싫어 죽을 지경이었다. 원이 슬슬 쇠퇴하자 공민왕은 친원 세력들을 치기 시작했고, 그에 위기를 느낀 친원 세력들은 공민왕을 제거하려 했다. 결국 사태는 친원 세력 싹쓸이에 성공한 공민왕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해 기존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권문세족을 아쌀하게 거시기해버리려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공민왕이 빠이빠이하자 권문세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왕을 앞세워 다시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시 꺼내든 외교카드는 바로 뻔하디 뻔한 ‘친원’카드였다. 어쨋거나 신돈과 공민왕 콤비에 의해 살짜꿍 전진한 역사가 순식간에 뒷걸음질 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반대하고 나선 이들은 바로 정몽주, 정도전, 박상춘등 YG패밀리, 아니 이색 패밀리들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였다. 그들의 요구는 ‘끝물인 원과 뭘 하자는 것이냐 씹세들아’라는 현실적인 제안이며, 기득권세력을 향한 정당한 일침이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내주는’ 논스탑 유배살이었다. 총알 유배 시스템을 통해 친원주의를 반대한 대부분이 즉각 유배 길에 올랐다. 그래도 정몽주는 운이 좋았다. 박상충과 전녹생등은 형벌의 후유증으로 유배 도중 숨을 거뒀다. 사실 정몽주는 운이 나쁜 적이 없었다.




Nothing Bad

정몽주에겐 나쁜 일이 거의 없었다. 스스로 나서 어쩌다 역적으로 몰린 김득배(과거에서 자신을 선발한 은인)의 시신을 수습해 제를 지내도 별 탈이 없었고, 자신을 성균관 학관에 오르게 했던 신돈이 처형 되었을 때도 별 탈이 없었다. 친원 정책의 부활을 반대했을 때도 유배 갔다 와 별 어려움이 없이 복귀했다.

집에는 한섬의 곡식도 없고,
애덜은 춥고 배고프다 울고,
내가 어떻게든 끼니를 꾸리고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책만 보고
그래도 성공할거라 기대했는데,
집안에 광명이 깃들거라 생각했는데
훗날의 영광과 성공은 개뿔.
우리에게 남은 사람들의 웃음뿐.

이 가사는 계속된 유배와 유랑으로 가난에 지친 자신의 처지를 아내의 입을 빌어 풀어낸, 라임이 일품인 랩 ‘가난’(5)의 일부다. 정도전은 유배 3년, 완전 복권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의 4년간의 칩거를 통해 리얼 궁핍과 슈퍼 고독을 체험했다. 그러한 가난과 고독의 실존적 체험은 정도전으로 하여금 고려가 아닌 이성계를 선택하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전과 달리 정몽주는 2년뒤 언제 그랬냐는 듯 사신으로 복귀했다. 그의 학문적,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시대와 권력에 크게 거슬리지 않으려했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고려 말 공민왕 때도, 우왕 때도, 창왕 때도, 공양왕 때도 그는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다.



Show Must Go On.

너에게 모든 걸 뺏겨버렸던 마음이 다시 돌아오는 걸 느꼈지.
너는 언제까지나 나만의 나의 몽주라 믿어왔던 내 생각이 틀리고 말았소.

어쩌면 1392년 재활치료중인 이성계의 사저 사랑채에서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하여가에 대한 답가로 단심가를 받고서는 뒤돌아서는 정몽주에게 불러주었던 노래는 서태지의 하여가였을지도 모른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불 같은 승부사. 1392년 정몽주를 오함마로 보내면서 고려의 ‘쫑’을 고하게 한 그 남자. 태조 이성계와 실세 정도전의 푸쉬로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도전과 방숙을 깔끔하게 저승길로 보내버린 '1차 왕자의 난'의 주인공이었던 그 남자. 방숙의 빈자리를 차지한 방과를 재끼려던 방간(회안대군)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가볍게 제압한 뒤 왕위에 오른 그 남자. 여색이 짙어 간통질을 하고 지랄을 했던 장남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충녕대군(세종)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해 한글창제가 가능하게 했던 그 남자. 암튼 그 남자. 바로 이방원이다.


1400년 하윤등이 이방원을 세자로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더랬다.

‘정몽주의 난에 만일 정안공(이방원)이 없었다면 큰일이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정도전의 난에 정안공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정몽주는 조선의 건국을 방해한 구시대를 대표하는 간신이요, 정도전은 태조의 계비, 강비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던 겁대가리를 상실한 간신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 둘은 모두 이방원에 의해 이승과 굿바이. 이렇게 간신이었던 정몽주가 지조를 지킨 불멸의 충신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그 시작은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보내버린 태종(이방원)때였다. 복권도 태종 때 이루어졌다.


그러나 반대의 의견도 있었다. 공민왕 때 픽업되어 우왕과 창왕을 모두 모시고, 게다가 창왕을 폐위시킨 뒤 공양왕까지 모신 철새즘(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가 서식하는 주의)의 종결자. 그것이 바로 정몽주의 본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했던 것이 바로 ‘우왕신씨설’이다. 우왕(모니노)이 공민왕과 반야사이가 아니라, 신돈과 반야 사이의 씨라는, 곧 신씨라는 설이다. 이렇게 되면 정몽주는 공민왕(왕씨), 우왕(신씨), 창왕(우왕의 자식이니 곧 신씨), 공양왕(왕씨)을 모두 탈없이 모신, 철새 이인새, 김민새우원등은 명함도 못내밀 철새즘의 본원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의 우상화 과정에서 이 이유는 ‘우왕과 창왕이 씬시임을 몰랐을 것이다’는 것으로 가볍게 거세된다. 만약 ‘우왕신씨설’이 사실이라면 한때 신돈에게 견제를 받았던 이성계가 우왕이 신돈의 씨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이를 가장 중요한 학자이자, 정치인인 정몽주가 의심하지 않거나, 몰랐을 리... 없다.  고려 족보를 개족보로 만들기 위해 등장한 ‘우왕신씨설’은 정확히 입증된 바 없다. 허나 권문세족(5)을 무장해제 시키려 했던 공민왕, 권문세족을 등에 업은 우왕, 이성계에 의해 왕좌에 오른 공양왕 때도 모두 정몽주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Trouble.







정몽주와 이성계는 함께 개혁을 논한 절친(6)이었다. 권문세족들의 권력과 토지 독점. 반명친원의 외교정책. 불교의 폐단등이 주요 개혁사안들이었다. 무인인 이성계와 문인인 정몽주는 함께 전장을 누비며, 동시에 막사에서 토론하고 논쟁했다. 뒤이어 정도전이 합세했고, 정도전은 이성계의 브레인이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개혁을 함께 꿈 꿨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함께 그렸던 그들이 틀어지게 된 결정적 사건은 바로 위화도 회군이었다. 명나라가 고려의 북쪽 영토가 자신들이 나와바리라며 반환을 요구하자 최영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이를 반대했다. 오히려 반환은 커녕,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지역이 우리 나와바리라며 요동정벌을 주장했다. 이에 이성계가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격한다. 하지만 이성계와 5만군사는 압록강의 위하도까지 간 뒤에 다시 내려왔다. 이유는 심플하게 4가지만 들었다.


작은 나라가 큰나라(명)의 뜻을 거스를 수 없음.
농번기에 군사모집은 개뿔.
명과 싸우다보믄 오랑캐가 빈집 털이를 들어올 수 있음.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유행할 것임.


사실 이성계는 애초부터 요동정벌엔 관심이 없었다. 요동정벌을 강력히 요구했던 이는 최영이었다. 그러나 우왕은 최영을 아끼고 또 아꼈던 터, 자신의 옆에 두고 싶어했다. 해서 5만의 군사를 이성계에게 내어주고 대신 가게 했다. 한때 최영과 이성계는 최고의 무신 콤비였다. 이 콤비는 북으로는 홍건적, 남으로는 오랑캐를 거침없이 몰아냈다. 하지만 최고의 자리는 늘 최영의 것, 이성계는 만년 2인자였다. 어쨋든 이성계는 북진하라는 왕의 명의 거역하고 개성으로 회군했다. 군 통수권자의 명을 거역했음으로 군법에 의해 이성계가 최고형에 처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처벌은 커녕, 수도를 포위하고 재빠르게 선수 친 이성계는 일단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최영부터 작살내고, 곧이어 우왕을 폐위시켜 버렸다. 권력이 이동하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이성계가 기득권세력 붕괴를 위해 선택한 것은 바로 공민왕의 신돈이 추진했던 바로 그것. 토지개혁이었다.


정도전과 함께 이성계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조준은 토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전제개혁안, 즉 과전법을 내놓았다. 권문세족이 독점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여 신진사대부들에게 토지가 아닌 세금 징수의 권한인 수조권을 나누어 줌으로서 관료가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것을 막고, 동시에 권문세족의 권력을 무력화 시키는 수단이었다. 당연 보수세력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 중심엔 이색이 있었고. 제자 정도전은 반대편인 개혁진영에 서 있었다, 하지만 정몽주의 스탠스는 어정쩡 했다.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했지만 토지 제도의 개혁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렇게 정몽주와 개혁파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보수파에 있던 이들은 이성계에 의해 탄핵 후 유배되었다. 이색 역시 떨어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재분배, 혹은 국가로 귀속시키는 전제개혁은 계속 진행되었다. 1391년 새로운 토지대장이 반포되었고, 권문세족들이 지 꼴리는 데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몰수 뒤 재분배 되거나 국가에 귀속되었다. 땅을 빼앗겨 일개 노비로 전락했던 양인들이 신분을 되찾았다. 그러나 정도전의 회고처럼 토지개혁은 개혁의 중심에 ‘민’이 있는 완벽한 형태로 진행되지 못했다. 일분 권문세족에게 편중되어 있던 권력이 신진사대부에 넘어가는 형태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권력은 이성계 쪽으로 완벽하게 이동되었다. 이성계로의 권력이동이 서서히 확실해져 가면서 정치인 정몽주의 스탠스도 확실해졌다. 정몽주의 결론은 고려왕조를 지킨 뒤에 개혁을 하자는 것이었다. 정몽주가 변한 것이 아니었다. 공민왕, 우왕, 창왕을 거쳐 공양왕까지… 늘 그는 고려의 학자이자, 고려의 정치인이었다. 늘…


Again 1392.
이제 정몽주는 무너져가는 고려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 지키고자 하는 정몽주의 눈에 이성계는 고려왕조를 쪼물딱거렸던 기황후의 형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의 스승 이색을 유배 보낸 정적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는 이성계의 소식은 정몽주에게 이성계 패밀리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처럼 다가왔다. 정치인 정몽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빠르게 이성계의 핵심 브레인 조준과 정도전을 비롯해 남은, 윤소종, 조박등의 측근들을 탄핵, 유배길로 모셨다.



긴. 급. 호. 송


무릇 조직을 '박살'내기 위한 프로세스는 핵심의 제거에서 우두머리의 제거로 다단계스럽게 올라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핵심의 제거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정몽주의 작업은 올스톱된다. 이성계가 개성에 컴백했기 때문이었다. 정치인 정몽주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국가의 존망을 놓고 권력과 권력이 벌인 사투에서의 패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몽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몽주는 스페이드 에이스를 들고 있었다.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쥐고 있던 카드는 이방원이라는 조커였다.


정치인 정몽주는 에이스를 던진 판에서 실패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아무리 이성계의 신망이 두텁다 하더라도, 때는 혁명전야였다. 만약 정몽주가 카드를 보여주지 않고 판을 덮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성계의 옆에 정몽주가 있고, 정도전의 옆에 정몽주가 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조선왕조는 오백년이 아니라 천년을 갔을려나. 에이스를 던진 정몽주의 한수는 성공이었을까. 실패였을까. 만약 던지지 않았더라면 ‘지조의 아이콘’ 될 수 있었을까. 정도전의 곁에서 민심에 기반한 진짜 혁명을 이룰 수 있었을까.


고려에서 조선까지를 놓고 보면 포은 정몽주는 무너지는 왕조를 지키고자 한 ‘지조의 아이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만을 놓고 보면 그 공민왕 이후의 모든 왕들과 함께한 오랜 정치권력자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뭐 이 정도다. 정몽주가 꺼내든 칼은 제대로 휘두르기도 전에 부러졌고, 이방원이 꺼내든 오함마 한 방에 정몽주는 이승과 작별했으며, 그가 이방원 앞에서 불렀다는 하여가와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불러주었다는 백로가의 원작자는 명확하지 않으며, 그가 복권되고 ‘지조의 아이콘’ 되기 시작한 건 그를 저승으로 보낸, 자신의 권력에 그와 같은 상징적 이미지가 필요했던 태종(이방원)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믄 지금의 ‘지조의 아이콘’이란 이미지는 좀 오바일 수 있겠다.


필자의 생각은 뭐 그렇다는 것이다.



(1)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단심가는 정몽주가 아니라 백제여인 한주가 부른 것이라 주장
(2)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작자미상, 이희령의 약파만록(藥坡漫錄)에서는 연산군때의 김정구 작품이라 되어 있다.
(3)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충신을 일컫는 삼은 중 한 명.
(4) 원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한 백성의 등골을 뽑아먹는데 정통한 고려시대 문벌귀곡 가문.
(5) 삼봉집 4권. 가난을 변형한 것임.
(6) 이성계가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 삼개를 칠 때 정몽주도 함께 했다. 당시 서로에게 감화되어 절친이 됨.



붙임.
이 글의 일부 내용들은 김용헌의 ‘조선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을 참고, 인용하였다.


추신.
홍솨덕이가 정도전이 프로듀싱하고 이성계가 부른 역성혁명(조선건국)을 5.16 군사 쿠데타와 ‘고거이 고거’라고 했다지. 쌍팔년도 역사의식이라고 치부하고 말기에도 참으로 덜 떨어진 비유다. 지금이 조선시대냐. 무식하면 여럿 고생한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2012년 5월 25일 금요일

[좌충우돌세계사] 참수 혹은 린치 - 참수 '신돈'





우리는 지난 시간, 타 죽은 세르베투스, 전기의자에 앉자 세상과 안녕한 윌리엄 켐러와, 로젠버그 부부의 최후의 순간을 함께 했다. 더불어 그들의 최후의 순간에 작동한 권력일 수 있는 그 무언가의 적나라한 모습도 함께 확인했다. 헌데 확인하면 뭐하나. 간 사람들은 간 사람들일 뿐이다. 이 연재에 이젠 역사가 되어버린 그들의 처형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시금석으로 삼자는 거창한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뭐. 더욱이 그때 작용한 권력과 현재의 권력 사이의 페어링 지점을 쑤시고 찾아보자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옛날 얘기일 뿐이다. 그저 재미지게 옛날 얘길 함 해보자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얘기한다는 것, 이게 때론 존나 흥미롭다. 정확하게 존재하는 사실을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과 견해가 등장하며 갈라지기 시작하는 그 좌표의 지점이 상당히 꼴릿하기 때문이다. 파열은 곧 에너지를 의미하기도 하니깐…

자. 다시 한번 과거로 떠나보자. 현실이 피로해서가 아니라, 그냥 좀 심심하니깐, 연재할 때가 되었으니깐. 편집 부국장이 빨리 써내라니깐… 유럽을 시작으로 북아메리카 함 찍었으니 이번엔 고려 말 한반도, 우리땅으로 가자. 사실 고려가 망하고 난 뒤에나 고려말인 거지, 당시 사람들에겐 그저 고려였을 뿐이다. 사대부들에겐 ‘요승’으로 불린, 동시에 노비들에겐 ‘성인’으로 불렸던, 신돈에게나, 그를 멘토로 모시다 ‘한 칼 받으실레예’로 쿨하게 보내버린 공민왕에게나 그땐 영원할 것만 같았던 ‘고려시대’였을 뿐이다.

그러고보믄 '정권말'인데도 대책없는 지금은 도대체 뭔지 참...



1.

1371년 수원, 아무리 중이었어도 한때 민중의 지지를 한껏 받은 최고권력자였던 그였다. 게다가 중이었어도 고기를 비롯한 산해진미 모두를 두루두루 맛보았던 미식가 중의 미식가였던 그다. 완벽히 숙성시킨 한우 1등급 스테이크를 내놓은 쉐프도 간간히 그에게 핀잔을 듣곤 했다. 그런 그가 유배라니, 그 개고생을 했는데, 그것도 토속음식마저 화려하지 않은 수원에 유배라니… 그저 애초 중이었던 그가 중으로 돌아왔으면 되었을 것을, 이미 모든 것을 맛본 그가 다시 사바세계의 욕망에서 자유로운 불자로 돌아온 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불평도 모두 사바세계에 숨 붙이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 그는 본능적으로 얼마 남지 않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1047년 8월, 고려 문종왕은 이렇게 말했더랬다.

‘사람의 목숨은 귀중한 것이여. 한번 가믄 다시 돌아올 수 없당께. 사형수를 처리할 때 3번씩 거듭 보고하게 하고 있지만 그래도 억울함을 있을까 염려 되부러. 그러니 신중하게 처리하자고…’  (고려사 형법지)

그러니까 고려시대 사형을 처리하려면 삼복제를 거쳐야 했다. 초심, 재심, 삼심을 거쳐 확정되어야야만 사형의 집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손창민과 정보석. 아니 신돈과 공민왕


그러나 반역의 수괴로 지목된 신돈은 구체적인 물증이 없음에도, 삼복은 개뿔, 신속히 수원으로 압송되었다. 최초 수괴로 지목된 뒤 3일 후의 일이었다. 신돈은 자신이 수괴로 지목되었음을 알고는 압송되기까지의 며칠동안 차분히 최후진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차라리 초심이 열리기 전에 자신의 주치의에게 말해 그동안 미뤄왔던 사랑니 발치건을 이유로 초심을 미뤄볼까도 생각했지만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을 스승처럼 떠받든 공민왕에 대한 믿음이 살짝 남아있었다. 자신의 생애를 정리해줄 자유기고가를 수소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격적으로 압송이 결정되자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직감했다. 더구나 귀빈 압송용 리무달구지가 아닌 전륜구동 방식의 불편한 일반 달구지라니... 밖과 안이 너무나도 다른 그안에서 그는 떠올렸다. 고작 노비의 아들이었던 그 자신을…



2.

편조라는 SCV가 있었다. 그는 경상도 창녕 화왕산에 자리잡은 커맨드센터 ‘옥천사’ 소속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믄 편조의 소유권은 옥천사에 있었다. 어머니가 옥천사 소유의 노비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인근의 영산 유지였지만 소용없었다. 부모 둘 중 하나라도 노비면 자식도 노비였다. 게다 자식의 소유권은 어미의 소유권자에게 있었다. 그렇게 편조는 옥천사의 소유였다. SCV의 역할은 뻔한 것이다. 커맨드센터의 지시에 따라 ‘굿 투 고’(Good To Go)해서 ‘좝 피니쉬’(Job Finish)하믄 그만. 일개 노비였던 어린 편조의 삶이 그러했다. 인생사 일장춘몽이라 하였던가. 노비 편조는 훗날 공민왕의 지지와 믿음으로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신돈辛旽이 된다. 그러나 결국 공민왕에 의해 처형당한다. 한편으론 화려하지만 참으로 싱거운 개인사. 어쨋든 그가 처형당한 뒤 커맨드센터 ‘옥천사’도 파괴된다. 파괴된 옥천사에서 보여지듯 편조에 관한 자료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없는 자료 바탕으로 정리한 편조의 유년기는 아래와 같다.

‘노비 편조는 그럭저럭 청년이 되었다.’

고려는 백성들이 소유한 토지에 대한 조세징수권을 공무원들에게 위임했다. 부패없는 청렴한 사회를 지향했던 공무원들은 ‘조세징수권 양도에 관한 법률’이 고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소리없는 환호를 지르고 지랄들을 했다. 곧바로 공무원들은 청렴하고, 강직하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다. 우선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려 농사에 필요한 모든 원자재의 가격을 올린 뒤, 원자재 값이 오른데다, 생산량마져 줄은 양인들의 연체가 빈번하게 발생할 수 밖에 없게 되자, 공시지가 조작을 통해 연체된 조세대신 그들이 토지를 헐값에 상납받는 등의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토지를 늘려갔다. 때에 따라 위장전입등의 새로운 방법들을 시전하기도 했다. 종종 발각되는 경우 과거급제를 위한 자식사랑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둘러대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조세의 의무를 강력하게 요청함과 동시에 자신들은 다양한 탈세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실행했다. 탈세로 인한 조세의 부담과 고통은 고대로 백성에게 전가된다. 완벽에 가까운 20:80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조까튼 현실을 청년 노비 편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렇게 흉흉한 시대일수록 백성들의 위로 받고 싶은 기대가 극도에 달한다는 것도 감각적으로 캐치해낼줄 아는 센스있고, 총명한 청년이었다. 글을 읽지 못했지만 독경을 말하고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베이시스트 빌리 시안(Billy Sheehan)도 악보를 읽지 못하지 않았던가. 청년 편조에게도 빌리 시안의 천부적인 능력과 같은 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최고의 베이시스트가 되는 거 어렵지 않~아요.


외롭고 지친 시대의 백성들, 그는 원나라 유학 중에 터득한 카마수트라를 옵션으로 한 명랑 포교를 통한 민생 행보를 해나갔다.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일찍 깨우치고 정진했던 것이다. 주로 주요지역의 5일장을 타겟으로 했고, 악수와 주전부리 흡입 등의 퍼포먼스를 맘껏 뽐내기도 했다. 그렇게 백성들의 명랑법사가 되자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왕실의 외척이었던 김원명이다. 편조는 자신을 따르는 김원명과 곧바로 맞팔을 맺는다. 그러던 어느 날. 김원명은 느닷없이 편조에게 ‘궁 나들이나 함 합세다’는 멘션을 날린다. 편조는 흥쾌히 ‘콜’ 한다.

얼마후...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공민왕은 급히 참모를 불렀다.

‘야. 궁 앞 편의점가서 로또 하나 사와. 롸잇 나우. 자동으로 만냥.  고고고. 무브. 무브’

순식간의 튀어가는 참모의 모습은 흡사 제로백 4초대의 포르쉐를 연상케 했다. 폭주하는 참모의 모습에 의아한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가 공민왕에게 다가와 연유를 묻자 공민왕이 답하길.

‘맘. 어제 드림에 갑자기 어떤 킬러가 나와서 나이프로 날 막 쑤시는데, 갑자기 소림사 스킨헤드가 등장해서 날 구해줬어요. 유노.’

이를 들은 명덕태후는 ‘얘가 얼마나 외로우면 스킨헤드 꿈을 다 꿀까. 혹 취향이 바뀐 건가’라며 생각하지만 차마 얘기하지 못했다. 공민왕은 여전히 숨을 헐떡거리며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창 밖 멀리 누군가의 모습이 공민왕의 눈에 들어왔다.

‘오 마이 갓. 맘. 스킨헤드, 롸잇 히어’

공민왕의 눈에 들어온 이는 다름아닌 김원명과 함께 나들이 온 편조였다. 드디어 왕을 만난 것이다. 외롭고 지친 왕은 편조에게 한눈에 반했다. 허나 공민왕 주변의 왕차관들은 갑자기 등장한 스킨헤드를 수위 높게 경계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편조는 지금은 때가 아님을 직감하고 평소 자신의 롤모델로 여긴 원효대사처럼 민중의 곁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민심 행보 시즌2가 시작된 것이다. 편조는 그때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3.

공민왕은 늘 외로웠다. 왕좌의 게임에서 그는 어머니가 몽골공주가 아니라는 치명적인 핸디캡때문에 조카들에게 카운터 펀치를 두차례 후려 맞았다. 결국 그의 선택은 자신을 불안해하는 원나라의 후광을 통해 패자 부활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원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시절, 극적으로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와 정략 결혼에 성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원의 힘을 업고 왕좌의 게임 에 다시 도전한다. 화끈하게 컴백한 그는 곧바로 현충원, 아니 경령전(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참배 후 인수위를 조직한다. 얼마 후 강화도로 위배된 13살의 충정왕이 독살되고 모든 권력은 고스란히 공민왕과 인수위에 전달된다.

공민왕은 왕위를 얻었지만, 원의 간섭과, 자신의 반대파에 대한 견제, 자신의 세력에 대한 불안, 조카 충정왕을 재낀 것에 대한 죄책감등을 짊어진 채 끊임없이 권력투쟁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민왕의 권력투쟁에 기존의 기득권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개혁적 마인드가 일부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공민왕이 스카우터를 통해 재벌개혁과 소득분재, 상식적인 인재 등용 등의 개혁정책에 능통한 이색을 영입, 계약을 서두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권력투쟁, 반란, 진압, 원의 보이콧,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수도 개경을 잃을 뻔 하는 등 편할 날 없는 과정들이 끊임없이 공민왕을 괴롭혔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불안과 분노, 흥분과 우울등에 시달리면서 그의 성적 능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스 개경 출신 후궁의 S라인을 보믄서 고추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싶다가도, 자신의 잡아먹으려는 원나라 세력과, 개경을 치고 들어왔던 홍건적의 샛누런 치아가 떠오르며 사그라들기 일수 였다. 원기가 부족하니 시련과 격변의 시기에도 늘 곁을 지켜준 노국공주의 침소에 드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고, 왕자 생산도 기약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게다가 원과의 긴장관계가 지속되는 탓에 대원무역이 원할하지 않아 비아그라의 복용도 쉽지 않았다. 불안과 무기력, 욕구 불만 등으로 인해 그는 난폭해지기 시작한다. 지방에서 민생 행보 시즌2를 거침없이 진행하고 있던 편조는 이러한 공민왕의 사정을 전해 듣는다. 재래시장을 방문 중이던 편조는 때가 왔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오뎅을 한입 베어 물고는 출사표를 던진다.



재래시장에 맛보는 오뎅의 맛.


신돈은 공민왕과의 첫번째 만남에서 공민왕과 주변부의 권력 관계 맛을 확실히 봤다. 그리고 공민왕 주변부의 권력들이 자신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공민왕은 그때보다 더욱 지쳐 있었고, 편조는 왕을 배경으로 뭔가를 시작한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한 주변의 모든 정황을 고려해볼 때 이번에야 말로 편조는 폴포지션에서 게임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첫 번째 만남에서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머리 속으로 되내였다.

‘스텝 바이 스텝’
‘한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거슨 아니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공민왕은 기꺼이 편조를 맞이했다. 맑고 한가로운 거사라는 뜻의 청한거사라는 호칭을 하사하고 궁의 중심부에 위치한 외빈용 VIP 스위트룸을 내주며 편히 궁에 머무를 수 있게 했다. 편조는 서두르지 않았다. ‘슬로우, 슬로우, 퀵, 퀵’ 차분히 한 스텝씩 밟아 나갔다. 현란한 포교활동을 통해 왕의 측근을 한둘씩 자신의 사람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포섭된 한 신도로부터 노비를 한명 선물 받는다. 아리따운 아가씨. 편조는 그녀에게 푹빠져 ‘얼레리 꼴레리’, 편조는 최고의 지혜를 뜻하는 반야라는 이름을 선물한다. 하지만 반야는 공민왕과도 ‘얼레리 꼴레리’. 한참동안 무기력했던 공민왕은 반야를 통해 슈퍼 파워 업. 1364년 노국공주가 여름에, 반야가 가을에 임신을 한다. 반야의 임신사실을 모른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태교에 만전을 기했지만, 결혼 15년 만에 아이를 가진 노국공주는 결국 출산도중 숨을 거둔다. 다들 지들 권력 타령만 하는 이들 사이에 사람으로 공민왕 옆을 지켜주었던 유일한 여인. 공민왕의 허탈과 슬픔은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두웠다. 얼마가 지난 뒤 안정을 되찾은 공민왕에게 편조는 반야의 순산소식을 전했다. 노국공주의 빈자리는 민생 행보를 통해 터득한 친서민적인 편조의 설법과 반야와 왕자 모니노(牟尼奴, 석가모니를 뜻함, 훗날 우왕)가 대신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공민왕, 본격적으로 권력강화를 위한 드라이브를 시작한다.

공민왕은 편조를 스승으로.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한) 개혁의 수장으로, 반대파 숙청의 지휘자로 임명한다. 이에 공민왕을 옆에서 지켜 봐왔던 편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해하지 않겠다는 각서와 친필사인, 공증을 요구했다. 혹여나 생길지 모를 최악의 경우 들이밀 수 있는 ‘까방권’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민왕은 기분이 졸라 상했다. 머리 기른 중놈이 왕에게 각서를 요구하다니, 하지만 공민왕의 권력을 위해서는 편조가, 편조의 개혁을 위해서는 공민왕이, 서로가 서로를 참으로 필요한 순간이었다. 공민왕은 앉은 자리에서 즉시 작성, 사인, 공증까지 논스탑으로 처리. 드디어 공민왕, 편조라는 파워 키스톤콤비가 탄생하게 된다.



4.

공민왕, 편조 이 파워 키스톤콤비의 첫 번째 작품은 바로 최영을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최영이 누구냐. 밖으로는 외적을 후려패고, 안으로는 왕차관 조일신등의 분란을 제거, 게가다 홍건적에게 개경을 빼앗이고 공민왕이 튄 상황에서, 개경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운이도 바로 최영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는(사실 이말은 그의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이었다) 청렴의 상징이기도 했다. 군에게 그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키스톤콤비는 그를 날려버려야 군을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군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놔야 쾌적하고 원할한 숙청을 진행할 수 있을거란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최영을 계림(경주)로 보낸 뒤 편조는 이제 사바세계를 떠날 수 없음을 인정하며 이름은 돈旽으로 개명한다. 성은 신辛이요, 이름은 돈旽으로, 이렇게 편조는 사바세계의 최고권력자 신돈辛旽이 되어 갔다.



신돈, 공민왕. 아니 안치홍, 김선빈.


편조가 신돈이 되었으나 공민왕은 공민왕이었다. 그는 물러난 것이 아니라 포지션을 살짝 바꾼 것 뿐이었다. 신돈에게 모든 걸 맡겨 놓았지만, 모든걸 보류할 수 있는 권력 또한 역시 공민왕에게 있었다. 그 어느 정파에도 속해 있지 않았던 신돈이 과도한 권력을 누리고 있던 권문세족들을 숙청하는 모습을 공민왕은 지켜보고 있었다. 신돈이 날라다니는 덕분에 그에겐 좀더 많은 여가가 주어졌다. 반야와 아들 모니노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안정감을 찾으니 왕자가 하나 뿐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워지기 시작했고, 그노무 안타까움을 해소하고자 몇 명의 왕비를 추가로 궁에 들였다. 젊고 아리따운 왕비들을 연이어 상대하기 힘들었지만 혼자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불안하고, 우울했던 날들에 비하면 ‘행복한 나날들’ 그 자체였다. 그렇게 생긴 긍정적인 마인드는 다양한 성적호기심을 부추겼다. 그 호기심은 언양 출신 쾌남 김흥경과의 연애로 이어진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신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돈은 부처 말씀은 물론이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육체의 설법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인은 물론이요, 산해진미를 마다하지 않았다. 고기가 땡기면 고기를 쳐묵하고, 술이 당기면 술 한잔 들이켰다. 청탁을 목적으로 몸을 상납하는 세도가의 부인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크게 문제되지 않는 청탁들은 보좌관들을 통해 민원 처리하듯 해결해주기도 했다. 의복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늘 빈티지 핏을 고수했지만, 궁의 출입이 원활한 집무실을 따로 소유해, 거처 하면서 국정개혁과제를 몰두하기도 했다.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나 가능했던 일을 무려 600년 전에 신돈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완벽한 자유에 몸이 된 신돈은 드디어 숨겨둔 히든카드를 꺼내 든다.




5.

신돈발 개혁의 핵심은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를 통해 토지와 노비의 변정(변별하고 옳게 결정), 기득권세력들에게 편중된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전민변정도감’의 설치 후 신돈은 스스로 결정을 주관하는 판사가 되었다. 빼앗긴 땅을 돌려주기 시작했고, 땅을 빼앗겨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이들의 신분을 복구해주었다. 사실 노예출신 신돈은 무엇보다 노예제 자체를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노예제를 고려사회의 근간이기도 했다. 그 근간을 섣불리 건드렸다간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모든 개혁이 올 스톱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노예제는 그대로 존속되었으나 변정하는 과정에서 신돈은 노비의 입장에 섰다. 일부 노비가 해방되었고, 땅을 잃었던 양민들이 제 땅을 되찾게 되었다. 왕도 짜증나고 눈치 보여 하지 못했던 일을 신돈이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개혁이 거침없어 질수록 슬슬 신돈의 반대세력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신돈은 더욱 강력한 권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 하지 않던가. 이 과정에서 신돈과 공민왕은 틀어지게 되고 만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지방자치를 관리, 감독하는 사심관제도의 부활을 요청했다. 더불어 사심관의 오야봉인 ‘5도 도사심관’이 되고자 했다. 사심관제도는 공민왕의 아버지인 충숙왕이 사심관이 지방을 과도하게 소유, 지배하는 문제가 심각해지자 폐지했던 제도였다. 신돈은 여전히 부실했던 자신이 세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세력을 장악하고 싶어했고, 이를 공민왕이 모를 리 없었다. 이에 공민왕은 신돈의 요청을 반려, 또 반려했다. 그러던 중 비슷한 시기, 지방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신하 한 놈아가 신돈에게 먼저 브리핑 후 자신에게 온 것을 알고는 1년 감봉의 징계를 내린 후에 정사복귀를 선언한다. 신돈과의 예정된 균열은 그렇게 시작된다.

기득권세력들에겐 왕과 나란히 앉자 자신들을 숙청하고, 수시로 왕에게 ‘천도’(수도이전)나 함 하자고 옆구리 쑤시는 신돈이 괴벨스처럼 보였다. 공민왕이 복귀를 선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신돈 보내기’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프로젝트는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신돈이 그의 몇몇 무리들과 구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황을 꾸미는 것이었다. 몇 회에 걸쳐 구데타에 대한 실명제보가 왕에게 핫라인을 통해 들어갔고, 제보에 기명된 몇몇 무리들이 영장 없이 긴급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일반 경찰 조사과가 아닌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미란다 원칙이고 묵비권이고 나발이고 간에 소용없었다. 곧바로 추국부터 시작되었다. 모진 추국에 일부는 사바세계와 안녕을 고했고, 일부는 스스로를 구데타세력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며칠 후 신돈마저 긴급 체포, 곧바로 수원으로 긴급 압송된다. 그렇게 신돈은 권력의 정점에서 밑바닥까지 정확히 마하 3의 속도로 곤두박질 쳤다.



6.

신돈이 압송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공민왕은 신하들에게 신돈의 처리에 관련한 상소를 올리라 지시했다. 신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극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수원에서의 유배생활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스티브잡스의 전기를 읽으며 자신 또한 그렇게 화려하게 컴백하겠노라 다짐 또 다짐했다. 그리고 그에겐 공민왕의 친필사인은 물론 공증까지 마친 ‘까방권’도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다 읽은 어느날, 왕이 보낸 사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긴머리를 흩날리며 문 밖으로 뛰처 나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건 복귀용 세단형 가마가 아닌, 자신의 목을 기다리는 큰 칼이었다.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노비였던 어린 시절, 민생 행보하며 맛보았던 오뎅들, 자신의 취향에 너무나 잘 맞춰주었던 쉐프들, 그리고 몸을 나누었던 여인들, 여인들 중 더욱 또렷하게 떠오르는 반야, 그리고 왕… 공민왕…



고우영이 그린 신돈


그래도 내 덕에 땅을 되찾은 양민들, 노비에서 해방된 이들 때문에 저승길로 가는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는 않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자신이 재건한 성균관, 자신이 학관의 자리에 앉힌 정몽주, 정도전 등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라면 내 생애를 제대로 후대에 정직하게 전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하던 차, 이미 칼은 목에 와 닿아 있었다. 설사 시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정몽주와 정도전 모두 신돈에 의해 쫓겨나기도, 신돈의 정권에 참여하기도 했던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신돈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권문세족들과, 공민왕의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7.

신돈이 목이 떨어진 1371년으로부터 정확히 21년 뒤, 고려를 대표하는 충신이자 성리학의 조종이라 일컫는 정몽주는 이방원이 고용한 킬러와 선죽교에서 마주하게 된다.


To Be Continued…


2012년 3월 9일 금요일

[좌충우돌세계사] 윌리엄 켐러, 로젠버그 부부 전기의자에 앉다(2)






트루먼 대통령이 원자폭탄을 능가하는 수소폭탄의 제조를 지시한 것이 1월, 조지프 매카시 의원이 주도한 빨갱이 사냥이 시작된 것이 2월. 한국전쟁 발발이 6월, 미국의 원자폭탄 기밀을 러시아에 넘겨주는 일에 협력한 죄로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그의 아내 에셀 로젠버그가 각각 체포된 것이 7월과 8월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1950년의 일이다.

검찰은 에설 로젠버그의 남동생인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이하 그린글래스)의 증언에 따라 로젠버그 부부를 기소했다. 그린글래스가 검찰조사에서 자신이 핵관련 기밀을 비밀리에 입수했고, 누이 부부, 즉 로젠버그 부부의 간곡한 요청으로 인해 자료를 넘겨줬으며, 넘겨받은 자료를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측에 전달했다 증언한 것이다.

당시 사건을 주도한 기관은 ‘지구대륙의 4분의 1과 전 인류의 3분의 1을 지배하는 무신론적인 공산당독재 정권’의 타도가 목표였던 J 에드가 후버(이하 후버)의 FBI였고, 재판을 담당했던 어빙 코프먼 판사는 후버와 절친(절친이라 쓰고 꼬붕이라 읽는다)이었으며, 당시 대통령 트루먼은 ‘트루먼 독트린’이라 하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원조하는 ‘공산당도 싫고’ ‘소련도 싫은’ 정책을 펴던, ‘이쯤 되면 막 나가는’ 바로 그런 시대였다.



 
로젠버그 부부


광기로 가득 찬 1950년, 맨하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클라우스 푹스라는 독일출신 물리학자가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그 후 연락책인 해리 골드가 엮였고, 자료를 유출한 넘으로 그린글래스가 엮였다. 그리고 그린글래스는 자신의 누나와 매형, 로젠버그 부부를 자신에게 모든 것을 사주한 제일 나쁜 놈이라 지목한다. 게임은 그렇게 신속하게 끝났다.

클라우스 푹스, 데이비드 그린글래스 징역 13년형.
줄리어스 로젠버그, 에셀 로젠버그 사형.





복습. 1890년 8월 6일 윌리엄 켐러가 사형수 최초로 전기의자에 앉잤다. 집행관의 착오로 1000볼트의 전기가 켐러의 몸 곳곳을 쑤시고 들어갔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당황한 집행관이 2000볼트로 몇차례 더 켐러에게 때려 부었다. 그렇게 켐러는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반면교사라 했던가. 이런 잔인한 방식을 교훈 삼아 인간이 체득한 거라곤 덜 고통스럽게 보낸다는 명분으로 2000~500볼트로 2-3차례 가해 편안하게 쇼크사 시킨다는 참으로 휴머니즘한 전기의자 처형 프로세스의 정립 바로 그것이었다.

윌리엄 켐러가 죽어간 그곳에서 멀지 않은 싱싱교도소, 때는 1953년 6월 19일. 먼저 남편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앉았다. 새롭게 개선된 처형 프로세스 대로 진행되었다. 다음으로 부인인 에셀 로젠버그. 그러나 그녀에겐 2-3차례 추가로 2000볼트가 가해졌다.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눈 뜨고 보지 못할 고통스런 처형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법정에서 후버의 절친 어빙 코프먼 판사는 ‘로젠버그 부부가 핵정보를 소련에 전달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렇기 때문에 살인보다 죄질이 더욱 흉포하다’는 덜 떨어진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FBI와 법원, 권력이 함께 만들어낸 판결로 인해 로젠버그 부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당시 재판 중 어빙 코프먼 판사에게 한 장의 서신이 전달된다. ‘로젠버그 부부의 유죄는 확실한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니며’ ‘설사 로젠버그 부부가 기밀을 전달했음을 시인했다 하더라도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보다 가혹한 형량을 받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고’ ‘과거 중요한 원폭 자료를 빼돌린 이들 중에도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므로 사형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서한이었다. 그러나 어빙 코프먼 판사는 검토는커녕 FBI의 후버에게  곧바로 ‘조공’해 버린다. 그 서한을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었다.



 
WIN-WIN의 좋은 예.




 

1918년 세계 1차대전에서 백기를 흔든 독일에선 빌헬름2세가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주변국들이 그러했듯,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자유민주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패전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등의 총체적 불황을 쉽게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혼란 속에 등장한 이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 여차저차 1919년 나치스에 입당한 히틀러는 1923년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 육군형무소에 투옥된다.

수감 중 출간한 ‘나의 투쟁’(나치사상 해설서)과 재판 과정을 통해 얻은 대중적 인기, 그리고 선동가적 기질을 바탕으로, 히틀러는 출옥 후 나치스를 재건했다. 나치스는 1930년 9월 시행된 총선거에서 사민당에 이은 제2당이 되더니, 1932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히틀러가 37% 득표율로 미스’선’ 아니 대통령’선’에 올랐다. 같은 해 11월 진행된 총선거에서는 나치스가 608석 중 230석(33%) 의석을 차지, 독일의회의 최대 세력이 된 후, 본격적으로 유대인과 마르크스 주의를 패키지로 엮어 탄압하믄서 본격적인 게르만제국주의의 시동을 걸어제낀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로 인정받던 아인슈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 탄압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 아니 유대인인 이상 그 또한 주요 제거 대상이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일단 그는 엄친아가 아니었다. 1879년 3월 14일 독일에서 매우 조용히 태어났으며, 엄친아의 기본조건인 수 개 국어 구사라는 기본 퍼포먼스도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니콜라 테슬라처럼 졸라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유럽 깊숙히 배인 반유대인 정서에 늘 괴롭힘을 당했다. 학교성적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으며, 주변에 화려한 절친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찌감치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뻥튀겨주는 스캇 보라스 같은 슈퍼에이전트도 없었다. 그는 그냥 수학을 좀 잘했을 뿐이다. 한 가지 그가 유독 싫어했던 것이 있다. 바로 통제와 관리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 징집을 거부하고 스위스로 뜬 것, 모두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



 
엄친아는 아니었다능.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물리학, 그러나 물리학을 시작한지 스무 해를 조금 넘긴 1921년. 그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된다. 광전효과, 브라운운동, 상대성 이론 등 가히 혁명에 가까운 이론을 발표한다. 동시에 양심적 병역거부, 무기개발 반대, 반나치 운동 등의 사회적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1932년 나치스의 유대인 탄압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자 아인슈타인 또한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었다. 독일군 총사령관은 ‘이제 더 이상 당신의 목숨은 안전하지 않다’는 내용의 서한을 통해 친절히 그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유대인과 히틀러 반대자들 색출, 폭행 등의 활동을
서슴지 않은 히틀러의 보이스카웃 ‘유겐트’


수많은 유대인 지식인들이 독일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독일 내 유대인들이 약탈과 폭행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며 아인슈타인 역시 불안해했으나 즉각 탈출 대열에 합류하진 않았다. 그 해 예정된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을 준비하며, 고향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예견하고 차분히 보낼 뿐이었다. 그러나 반대쪽 미국에서도 모두 그를 반긴 것만은 아니었다. 1918년 재력 있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름조차 애국스러운 ‘여성애국단’은 아인슈타인의 초청이 확인되자 곧바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 달갑지 않은 외국인인 아인슈타인, 조지 버나드 쇼의 입국을 반대한다.
  • 아인슈타인은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된 불순한 사상의 소유자다.
  • 국가와 교회, 과학적 원리를 부정해 혼란에 빠뜨린다. 특히 교회.
  • 끝으로… 영어를 못한다.
여성애국단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더구나 아인슈타인은 영어를 왠만큼 했다. 오렌지를 ‘어륀지’로 자연스럽게 발음하지 못하는 독일식 액센트의 소유자였을 뿐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비방에 의존한 미국무부가 아인슈타인 초청을 엎을 뻔도 했지만, 1933년 1월 12일, 아인슈타인 가족 일행이 탄 배는 캘리포니아에 무사히 도착한다. 미국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떠나온 독일에선 같은 달 30일 히틀러가 드디어 수상의 자리에 오른다.





수상에 오른 히틀러는 그 해 7월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한다. 세계2차대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1935년 군대의 현대화, 모든 남자사람의 군복무를 골자로 한 거대한 군국주의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당시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은 상대를 디스하기 바빴다.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증오했고, 스탈린을 독일을 자본주의 파시즘으로 규정했다. 헌데 뜬금없이 이 앙숙들이 1939년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그저 서로의 이해와 요구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쪽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쪽 모두 조졌다간 조땔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1차대전을 통해 학습한 터였다. 그리고 소련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연합과 손잡기보다는 차라리 독일과 일촌을 맺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해서 독일과 소련은 지들 사이에 낑겨있는 폴란드를 중심으로 유럽을 나누고 서로 사이좋게 나눠 갖자는, 대신 서로 싸우진 말자는 ‘쇼부’. 아니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이다.


 
쇼부치는 소련 외무부장관 몰트로브. 그리고 스탈린


모든 준비가 끝났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할 명분이 필요했다. 없는 명분을 만드는 방법은 하나다. 바로 ‘조작’하는 것. 히틀러의 지시에 의해 독일과 폴란드 국경에 위치한 글라이비츠 방송국이 털린다. 그리고 폴란드의 공격이라 공포. 침략자 폴란드의 동부를 친다.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는 서부를 친 뒤, 나란히 폴란드를 나눠갖는다. (정확하게는 서쪽의 1/3을 독일이, 동쪽의 2/3을 소련이)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듣보잡 히틀러’를 외치며 개입을 선언한다. 1939년 세계2차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독일과 소련이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은 그해 8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편지가 한통 전달된다.

루즈벨트 님하.

원고 형태로 나에게 전달된 페르미(E.Fermi)와 질라드(L. Szilard)의 최근 연구를 보고, 나는 우라늄 원소가 가까운 장래에 새롭고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발생한 상황의 특정 국면들은 예의주시되어야 할 것 같으며, 필요하다면 정부 쪽에서 신속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과 건의안에 대해 당신의 주의를 촉구하는 것은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이 새로운 현상은 또한 폭탄 제조로 이어질 것이며, 따라서 보다 덜 확실하긴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극도로 강력한 폭탄이 제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출처] 1939년 8월 2일,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에게 처음으로 보낸 편지 (『C.F.H』역사의 진실을 찾는 카페(세계사 & 국사 전문 카페)) |작성자 세계사광

b) 현재 대학 실험실의 예산 범위 내에서 실시되고 있는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그러한 연구기금이 필요하다면, 그 담당자가 이 사업을 위해 기부할 의향이 있는 민간인들과 접촉하여, 기금을 제공하고, 아울러 필요한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산업체 실험실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독일은 실지로 자신이 인수한 체코슬로바키아 광산들로부터 나온 우라늄 판매를 중지한 것으로 나는 알고 있습니다.(중략)
[출처] 1939년 8월 2일,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에게 처음으로 보낸 편지 (『C.F.H』역사의 진실을 찾는 카페(세계사 & 국사 전문 카페)) |작성자 세계사광

요약하자면 ‘독일이 우라늄 확보에 나서고 있다. 심상치 않다. 국가, 민간, 전문가가 나서서 핵무기를 개발하자’는 편지의 마지막엔 익숙한 이름의 서명이 들어가있었다. 아인슈타인이었다.



 
과연 원자폭탄은 이 편지 한 장으로 인해 만들어졌을까?




 

이렇게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론 그랬다. 1939년 시작된 원자폭탄 개발은 1942년 암호명 ‘맨해튼 프로젝트’라 이름 붙으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시기적으론 서유럽이 히틀러의 손에 들어갔고, 이탈리아와 독일이 대미선전포고를 했으며,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뒤였다.

1941년 컬럼비아대학 연구팀이 우라늄 조립을 완료했으나 이를 무기화하기 위해서는 톤 단위의 우라늄이 필요했다. 이에 별도의 우라늄 공급팀이 꾸려졌다. 미국의 주요 3개 업체가 참여했고, 그중 하나는 바로 에디슨과 전류전쟁을 펼쳤던 웨스팅하우스였다. 웨스팅하우스는 즉각 우라늄을 조공하란 정부의 요청이 있자마자 순식간에 공급망을 만들어 3개월만에 3톤의 순수우라늄을 공급했다.(웨스팅하우스는 얼마를 벌어제꼈을까. 도대체 무슨 수로 3개월만에 3톤을 퍼다 날랐을까? 상상 한 번 해보자) 우라늄이 준비되자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진 연구소에서 그 해 12월 원자폭탄의 기반이 되는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에 성공한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중심, 오크리지 공장에도 등장한 히어로 엉클 샘.



이후 우라늄을 가공해 핵분열을 쉽게 졸라 해대는 원소를 만들어냈고, 이 원소에게 지옥의 마왕을 뜻하는 플루톤을 빗댄 플루토늄이라 이름을 붙여준다. 풀루토늄이 준비되자 1945년 7월 16일, 미국은 뉴멕시코주 앨러배머 고도에서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은 성공적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이미 독일은 패전의 기색이 역력한 터였다. 미국의 입장에선 독일은 물론, 전세계가 두려워 할 원자폭탄을 손에 쥐었는데, 꽂을 상대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흥분하지 않았다.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 실험 성공 직후, 독일의 패전 도시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질, 중국의 장제스는 ‘일본이 즉각 항복과 항복 하지 않을 시 조땐다’는 내용이 포함된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다. 사실 이때까지 소련은 일본을 때려눕히기 위해 참전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뒤늦게 포츠담 선언에 가담한 소련은 훗카이도 분할 통치를 요구했으나, 막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의 대답은 확실했다. ‘조까’.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각각 리틀보이와 팻맨으로 이름 붙여진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포츠담 선언의 의거, 일본이 즉각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첫 번째 원폭이 있은 후 많은 이들이 트루먼의 결정에 항의했다. 이미 일본은 항복 일보 직전이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항의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원폭까지는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두 번의 원폭으로 12만 명이 죽었다. 미국이 이런 무자비한 결정을 내린 이유로 많은 전문가들은 소련의 2차대전 참전을 꼽는다.

미국은 가열찬 ‘스파이질’로 소련의 참전 결정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소련이 새로운 국제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를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미국은 사회주의 소련에게 원자폭탄이 있음을, 그리고 그 폭탄을 어디든 떨어뜨릴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철의 장막, 핵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소련의 스탈린 역시 전방위 ‘스파이질’을 통해 일본에 원폭이 떨어지기 전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상당 부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핵개발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가열한 ‘스파이질’은 늘 그렇듯 쌍방향이었다. 트루먼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는 원자폭탄의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의 몫이었다. 아인슈타인도 그중 하나였다.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에선 난리가 난다. 그렇게 빨리 ‘소련이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유는 온리 ‘정보유출’뿐이라 정부와 언론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빨갱이 색출이야말로 부국강병의 기본옵션이라 온몸으로 부르짖는 후버에게 절체절명의 미션이 주어졌다. 후버는 곧바로 다음과 같이 ‘간첩소탕’이란 오다를 내린다.


 
닉이 많으면 내용을 적을 수가 없다는 게 진리


1950년 2월 초 클라우스 푹스가 간첩 혐의로 영국에서 구속된다. 증거는 영국 정보부 요원의 증언과 클라우스 푹스의 자백뿐이었다. 푹스는 미국에서 소련첩자와 접촉하였으나 이름도, 인적 사항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근데 접촉한 넘도 모르는 넘을 FBI가 잡아낸다. 그리고 줄줄이 엮기 시작한다.

FBI는 우선 뻘건 색, 혹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관련된 이를 추려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곧이어 수사, 감시하기 시작하는데, 그 중 한 명, 바로 그린글래스가 걸려들었다. 이유는 그린글래스의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던 공장에 군인신분으로 참여한 기록과, 누이 부부가 ‘청년공산주의자동맹’ 회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1950년 2월 FBI는 약식 조사 후 감시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몇 달 뒤인 5월, 드디어 FBI는 만난 넘도 잘 모르는 넘을 잡아낸다. 바로 푹스가 접촉한 적이 있다는 첩자. 바로 해리 골드였다. 해리 골드는 영장도 없이 들이닥친 FBI에게 친절하게 모든 것을 맡긴다. 결국 변호인도 없이 ‘내가 바로 첩자라능…’ 이러믄서 자백문서에 서명한다. (이 과정에 대한 내용은 여전히 비밀이다) FBI가 손쉽게 얻어낸 간첩 해리 골드의 진술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내가 옛날에 푹스랑 접촉할 때 결혼한 밀뤼터리맨도 한 명 있었다능’

‘생각해보니 그넘이 바로 그린글래스였다능’

수사는 클라우스 푹스에서, 해리 골드로, 해리 골드에서 그린글래스로 신속하게 넘어갔다. 그린글래스의 간첩 혐의 증거랍시고 제시한 건, 해리 골드의 진술과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당시 공장에서 빼내온 우라늄 견본이 전부였다. 그러나 우라늄 견본의 경우 당시 참여한 이들 상당수가 기념으로 한두 개 정도는 빼내 오는 게 일상적 관행이었다. 허나 그린글래스 역시 친절하게 자신도 간첩이며, 이 모든 건 누이 부부의 사주 때문이었다고 진술한다. 곧바로 매형인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구속된다. 이 과정에도 역시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처남 그린글래스의 진술만이 유일한 증거였다.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완강히 혐의를 부인하자 FBI는 부인 에셀 로젠버그를 구속하여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자백을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자신이 스파이란 그 어떤 자백도 하지 않았다. 자백은 50년이 지난 2001년 그린글래스가 했다

 ‘검찰은 내게 구명을 약속했다. 그 약속을 믿고 난 거짓증언을 했다’ – AP통신

그러나 재판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여러 과학자들, 특히 노벨화학상 수장자인 해럴드 유리의 ‘전달했다는 도면은 허접하여 정보로서의 가치가 없다’, ‘위증에 근거한 비상식적인 기소’라는 의견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제 로젠버그 부부가 스파이긴 했지만 전달한 자료는 핵과는 상관없는 전파탐지기와 수중 음파탐기지였다는 내용이 담긴 베노나 보고서(미국의 암호전문가들이 러시아 정보부의 통신문을 해독한 것)는 1995년이 되어서야 공개되었다. 후버와 미국에겐 그저 확실한 희생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연행되는 데이비드 그린글래스 (좌)




 

FBI의 후버는 졸라 기분이 나쁘고 쪽팔렸다. 마음이 편치 않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소련이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데다, 그 원인을 ‘스파이’ 때문이라 떡 하니 설정해놓았는데, 그 시작이 될 클라우스 푹스가 영국에서, 영국정보원에게 잡혔기 때문이었다. 해서 후버는 클라우스 푹스와 연관되었을 ‘스파이’(?)를 색출하는데 몰빵했다. 공산주의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게다가 외국인(유대인)인 모든 인사들을 쑤시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인슈타인이 제법 적합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아인슈타인이란 거물까지 이어지기만 하면 ‘해품달’을 능가하는 전 국민적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과 클라우스 푹스를 엮을 만한 한 가지 근거가 있었다.

클라우스 푹스는 1942년 캐나다 외국인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으나 아인슈타인의 천거로 석방되어 맨해튼 프로젝트에 결합하게 되었다는, 클라우스 푹스 부친의 증언이 바로 그것 것이었다. 결국 FBI의 최종타겟은 로젠버그 부부로 향하긴 했으나 그들의 ‘망’에는 늘 아인슈타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버와 FBI는 증언 이상의 그 무엇도 밝혀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나름대로 로젠버그 부부의 구명을 위해 움직였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을 보냈고, 코프먼 판사를 설득시키기 위한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의 행동은 철저히 개인적이었다. 사면추진위원회 등 그 어떤 단체에 속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자들의 정치투쟁에 재판이 악용되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변함없었던 그의 성격이기도 했지만, FBI의 타겟이라는 부담이 작용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1951년, 로젠버그 부부는 항소심이 끝나기도 전에 싱싱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싱싱교도소는 사형수만이 산다는 ‘죽음의 집’이었다. 항소심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사형수가 되었던 것이다. 아니 클라우스 푹스가 구속되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일지 모른다. 시대는 진짜 스파이를 요구하기도 했고, 동시에 가짜 스파이를 요구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로젠버그 부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 해,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나이 35세, 에셀 로젠버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들은 그렇게 떠났고, 남아있는 많은 이들 중 하나였던 아인슈타인은 죽기 전까지 매카시, 후버와 끊임없이 싸웠다. 많은 사람들이 뻘건 칠을 당하며 탄압받던 시기였고, 후버의 FBI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거대한 조직으로 확장하고 있던 광기의 시대였다.

아인슈타인이 간첩이라는 수많은 정보가 수집되었지만 확실한 것은 없었다.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이 부당하단 문제제기는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정당했음이 확인되었다. 로젠버그 부부는 자신들의 두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그들이 무죄임을 언제나 기억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작을 가능케 한 서한에 서명한 것을 두고 ‘내 인생에 있어 한 가지 큰 실수’라며 후회한 아인슈타인은 후학들에게 아래와 같이 당부했다.

‘인간의 창조력이 인류에게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되도록 해야 하며 과학기술 연구에 있어 핵심문제를 풀기 위해 애쓰고, 노동과 재화의 분배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로젠버그 부부가 처형 당한지 2년 뒤인 1955년 4월 18일, 자신을 초청한 프린스턴 대학의 인근 병원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어느 곳이나 넘쳐나는 정치적 격정, 희생자를 요구한다’는 최고의 물리학자의 마지막 글 제목은 이처럼 정치적이었다.




그리고… 1392년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던 정봉주, 아니 정몽주는 선지교(훗날 선죽교)에서 처형, 아니 이방언에게 사주 받은 해결사에 의해 린치를 당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씨유레이러~


2012년 2월 15일 수요일

[좌충우돌세계사] 윌리엄 켐러, 로젠버그 부부 전기의자에 앉다 (1)




처형.

같은 단어인데 하나는 아내의 언니를 뜻하고, 하나는 사형에 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후자가 뜻하는 처형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단두대로 머리를 자르는 참수형이 있고, 세르베투스와 같이 태워 죽이는 화형(지난 기사 ‘[역사]세르베투스, 타죽다’ 참고), 산 채로 살을 잘라내는 능지, 그리고 목을 매달아 죽는 교수형, 독극물을 주입하는 독살형 등이 있다. 미셀 푸코의 처형의 역사 서막은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잡힌 다미엥의 처형장면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의 딱 5페이지만 넘겨보면 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잔혹한지… 그리고 그러한 처형의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한 실존적 성찰에 접근하게 된다. 인간의 악랄한 본성만큼이나 다양한 처형 방법. 그 중엔 전기의자도 있다. 참고로 내 글은 그러한 실존적 성찰과는 전혀 무관하다.




세르비아 100디나르 지폐 속 니콜라 테슬라. 공식과 도면도 친절하게 들어가 있다.



1856년생, 니콜라 테슬라란 양반이 있었다. 보통 유명한 양반이 아닌 테슬라 역시 세르베투스, 칼뱅과 마찬가지로 엄친아였다. 따지자면 칼뱅보단 세르베투스에 가깝다. 전류전문가로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과 다이다이로 붙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크로아티아 출신인 테슬라는 5개 국어에 능통하고 수학에 탁월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풀고 해결하는 일종의 ‘독립식 엄친아’였다. 어린 엄친아 테슬라는 엉뚱하게도 우주와 UFO에 심취해 있었고, 자신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주와의 직접 교신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전기가 필요하다 졸라 명쾌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학비가 부족한 탓에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 에디슨 전자회사(지금의 GE)의 파리 지사에서 취업하게 된다. 범인은 때론 너무나 쉽게 눈에 띄는 법, 테슬라를 눈여겨 보고 있던 지사 책임자 찰스 베처러는 테슬라에게 본사 출동을 지시한다(발령 아니다. 출동이다). 어디 그냥 보내겠는가, 자신의 친필 추천서와 함께 말이다.



‘HI CEO. 세상엔 두 명의 천재가 있습니다. 하나는 졸라 존경해 마지않는 사장님이시구요. 하나는 사장님 앞에 서 있지 말입니다. YOU KNOW!’



약빨 지대로인 추천서를 들고 갔으니 본사취업 성공. 곧바로 에디슨은 자신의 직류 발전기를 효과적으로 개선하라 지시한다. 당시 에디슨의 직류와 웨스팅하우스일렉트로닉스(이하 웨스팅하우스)의 교류가 전기시장 정복을 위한 전투를 슬슬 벌이고 있었던 터, 에디슨은 지사장이 천재라 일컬은 테슬라에게 제법 중요한 미션을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테슬라는 직류를 부정하고 교류를 믿었다. 실제로 파리지사에 근무하면서 연구했던 것도 바로 교류였다. 더구나 에디슨은 천재 발명가임과 동시에 유능한 인재를 데려다 단물을 ‘쪽쪽’ 빨아 묵고 내치는 악덕 기업주가 아니었던가. 그로 인해 상황은 엉뚱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위인전과 실제가 다른 확실한 예.‘토머스 에디슨’



직류와 교류가 벌인 전류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알다시피 교류다. 비용, 실용적이면 모두에서 교류가 앞선 것이다. 그러나 포맷을 선점하기 위해 합리적이어야 할 게임의 진행은 상당히 더뤼 했다. 더뤼한 진영은 우리가 발명왕이라 일컫는 에디슨의 직류진영이었다.

1.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직류발전기를 개선하면 5만 불의 인쉔티브를 주겠다고 한다.

2. 테슬라는 성공적으로 직류발전기를 개선한다. 그리고 말한다 ‘기브 미 인쉔티브’

3. 에디슨은 ‘미국식 유머를 모르다니, 노 인센튀브다. 쉐이야’라며 쌩깐다.

4. 빈정상한 테슬라가 곧바로 퇴사한다.

5. 테슬라가 퇴사하자 곧바로 투자자들이 붙는다.

6. 테슬라 전기회사가 만들어진다.

7. 교류를 지지하던 웨스팅하우스가 테슬라와 붙는다.

8. 에디슨은 경쟁관계에 있던 웨스팅하우스가 테슬라와 붙자 격노한다.

9. 승기는 슬슬 테슬라+웨스팅하우스의 교류 쪽으로 기운다.

이렇게 되자 에디슨은 직류의 우수함이라는 포지티브 방식이 아닌 교류가 좆도 아니라는 네거티브 방식을 취하게 된다. 에디슨은 웨스팅하우스가 옛정을 생각해 제안한 일종의 연합기업 구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자사 엔지니어들의 교류전환 요구를 묵살했다. 대신 뉴욕의 개와 고양이들을 사들여 교류발전기에 놓고 죽이는 실험을 지시한다. 사람들에게 ‘교류는 위험하다’는 공포를 심는 전형적인 네거티브를 시도한 것이다, 실험을 주도한 해롤드 브라운은 순신간에 듣보잡 탑에 랭크되며 주목 받게 된다.


 
순식간에 1위 등극한 해롤드 브라운



더럽게 돌아가는 꼬라지를 확인한 웨스팅하우스는 뉴욕 타임즈등에 항의서한을 전달했고, 테슬라는 사람들 앞에서 교류를 직접 만지는 등의 퍼포먼스를 통해 안정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더뤼한 전류전쟁의 불똥은 엄한대로 튀고야 만다.

당시 뉴욕주는 교수형이 현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새로운 사형방법을 고민하고 있었고, 때마침 듣보잡 해롤드의 실험을 전해들은 뉴욕주위원회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사형방식으로 전기의자를 에디슨에게 제안한다. 물론 전류의 속도가 뇌가 반응하는 속도보다 70배 정도 빠르기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다는 참으로 휴머니즘한 이유를 함께 들면서 말이다. 에디슨은 ‘옳타쿠나’ 곧바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나마 상식적이었던 조지 웨스팅하우스



듣보잡 해롤드는 에디슨의 지시에 따라 교류 발전기를 이용한 전기의자를 개발한다. 여기서 골 때리는 건 에디슨의 계획이다. 개발한 다음. 웨스팅하우스에서 교류발전기를 사다가 완성한 후 이 사형방법의 이름을 Electricution 혹은 To Westinghouse 명명한 뒤 ‘교류’는 결국 사람을 죽이는데나 쓰이는 위험한 것이라 대중들에게 공포을 박는 것으로 자신의 뻘짓을 완성하고자 했다. 더 골 때리는 건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 당연 웨스팅하우스는 전기의자용 교류발전기 발주에 ‘조까’로 응수했고, 할 수 없이 에디슨의 자신의 직류발전기를 전기의자에 갖다 꽂았다. 세르베투스를 잡아다 태워 죽인 칼뱅의 삽질에 버금가는 삽질을 발명가 에디슨이 하고야 만 것이다. 그렇게 전기의자는 완성되었다.

전기의자의 비극적 첫손님은 ‘도끼 살인마’란 닉을 가진 윌리엄 켐러였다. 그는 내연의 관계에 있는 여인을 살해한 혐의로 1889년 3월 28일 사형을 선고 받았다. 뉴욕주가 전기의자를 도입한 직후였다. 1890년 8월 6일 뉴욕주 오번교도소, 사형집행관이 켐러를 전기의자에 앉혔다. 8개의 가죽 끈으로 몸과 의자를 고정시킨 후 사형수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운다. 다리와 머리의 털을 잘라낸 후 전극을 붙이고 전원을 연결한다. 집행관들은 입회인들의 보는 앞에서 전원을 올렸다. 1,000볼트였다. 켐러는 고통 받았지만 죽지 않았다. 살이 타들어가고 연기가 났다. 켐러가 죽지 않을 것을 확인한 집행관들이 2,000볼트의 전기를 넣었다. 켐러는 고통을 몸을 뒤틀었고, 입회자들도 살이 타들어가는 광경과 냄새에 구토를 했다.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처형 중 하나가 시작된 것이다. 참고로 사형수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이유는 사형수가 아닌 입회자들을 배려한 것이다.




 
당시 처형장면을 묘사한 처형직후 8월 7일자 뉴욕해럴드 기사.



에디슨과 테슬라+웨스팅하우스가 벌인 어이상실판 전류전쟁 탓에, 엄한 윌리엄 켐러가 고통스럽게 처형당했던 그 시절, 미쿡은 실로 엄청난 팽창을 이루는 중이었다. 미쿡이 세계1등국이 되는 데에는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부터 1차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 딱 53년 걸렸다. 53년 동안 미쿡은 남북전쟁으로 피폐해진 농업중심국에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산업제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철도의 보급과 철강사업, 유전개발 등이 동시에, 게다가 화끈하게 진행되었고, 거기에 에디슨과 테슬라와 같은 이들에 의한 발명품, 생산에 필요한 전력 보급등의 문제가 해결, 개선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러한 화려한 발전 뒤엔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크 트웨인과 C.D. 워너가 그 시대를 다룬 책의 제목을 ‘황금빛 시대’ The Gilded Age라 붙였듯이 말이다.

황금빛 시대를 대표한 몇몇이 있다. 민간인 귀족으로 국가도 건드리지 못한 몇몇 말이다. 부당이득과 뇌물을 통해 뉴욕센트럴 철도를 건설한 윌리엄 밴더빌트, 신탁증서 발행을 통해 지주회사를 설립, 거대기업을 독점을 막는 법을 피해 막강한 독점을 행사한 존 D. 록펠러,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자 전직원을 해고하는 등, 정상적인 조합도 인정하지 않은 철강왕 카네기. 그리고 돈독이 제대로 오른 J.P.모건 시니어가 있다.

J.P. 모건 시니어는 젊은 시절 남북전쟁 때 징집되었으나 ‘행방불명’이 아닌 300달러를 주고 대역을 고용하여 징집을 불법적으로 회피한다. ‘대역’ 모건 선생이 탄생한 것이다. 징집을 거부한 그는 전쟁통에 자금을 모금해 장난을 친다.

1. 구식 카빈총을 3달러 50센트에 산다.

2.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고 11달러 50센트에 사들이게 한다.

3. 총을 사~알짝 개조해 22달러에 슬슬 팔기 시작한다.

4. 정부가 그 총을 원래 가격의 여섯 배를 주고 왕창 사들인다.

5. 정부는 돈지랄을 하고 ‘대역’ 모건 선생은 돈을 쓸어 담는다.

이렇게…

‘대역’ 모건 선생과 테슬라와 얽힌 일화가 있다. 테슬라의 기술을 알아본 ‘대역’ 모건 선생이 테슬라에게 투자한 것이다. 거기까진 좋았다. 테슬라는 수려한 외모는 물론이요, 과학, 문학, 음악, 미술 등 다방면에 해박함을 지닌 팔방미인이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냐고? ‘대역’ 모건 선생의 딸래미가 테슬라에게 ‘뿅’간 것이다. ‘대역’ 모건 선생은 자신의 딸이 한낱 기술자 나부랭이와 어울리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테슬라의 성격도 괴팍하기로 치면 에디슨과 쌤쌤에 가까웠다. 결국 지원했던 무선송신탑 개발이 끝나자 지원을 중지했다. 당연 관계 또한 드럽게 끝났다.


 
‘문어발’ 모건 선생. 혹은 ‘대역’ 모건 선생



‘대역’ 모건 선생은 국가를 상대로 돈놀이를 할 만큼 통이 큰 분이셨다. 미국정부가 자신에게 돈을 꿔달라고 하자 담보가 부족하다며 호탕하게 거절했다. 결국 국채를 받고 금을 넘기는 방식으로 대출. 국채는 즉시 되팔아 차액을 남겨 쳐묵한다. 당시 미쿡은 이런 장사꾼들이, 전 직원을 해고하고, 항의하는 근로자 수십 명이 죽어나가도, 주방위군 7천 명을 직원 대신 현장에 투입해버리고 마는 기업꾼들에 점령 당한 차가운 대륙일 뿐이었다.

이런 시대에 윌리엄 켐러의 고통스런 죽음이 시대적 부채로 각인될 리 없다. 에디슨과 테슬라 + 웨스팅하우스의 전류전쟁이 켐러의 고통스런 죽음으로 멈춰질 리도 없었다. 결국 시카고 만국박람회 입찰을 테슬라 + 웨스팅하우스가 따내어, 성공적으로 치루자, 나이아가라 발전소 수주도 결국 그들의 몫으로 돌아가면서, 그제야 전류전쟁은 교류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미쿡이 초강국으로 팽창하는 동안 소수는 초대박 졸부에 등극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은 빈곤노동자로 전락했다. 철로가 깔릴 때마다, 교각이 하나 생길 때마다, 발전소가 하나 생길 때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어나갔다. 어디 그뿐인가. 윌리엄 켐러가 죽은 1890년 그해 겨울 운디드니(wounded knee) 야영장에선 무장해제 당한 인디언 300여 명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그렇게 대륙의 원주인인 인디언 토벌은 그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몇 명이나 죽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늙어 그때를 돌이켜보니 살육 당한 부녀자들이 험난한 협곡을 따라 널브러져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그 광경을 내 젊은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 피투성이 진흙탕에 죽은 사람 말고 죽은 다른 것도 눈에 묻혀 있었다. 한 종족의 꿈이 사라져간 것이다.

존 G. 네이하트의 ‘검은 사슴 설화 Black Elk Speak’ 중 현장에 있었던 주술사 블랙 엘크의 말. 불과 백 년 전 윌리엄 켐러가 전기의자에 앉은 그때 미쿡의 모습이다.




 
당시 운디드니를 묘사한 Fredericc Reminton의 작품.



우주와의 통신이란 다소 오덕스런 목표를 향해 전기에 입문한 테슬라는 윌리엄 켐러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차라리 도끼로 때려 죽이지’하며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에디슨이 뭐라 반응했는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전기의자를 통해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에게 한 방 먹이려던 등신 같은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10대 시절에 잃은 청력으로 인해 웬만한 말은 잘 들리지 않은, 신체적 특징 때문인지, 자기 공장을 불타오르는 것에 감탄해 아부지에게 ‘언능 마실 오셔서 구경하라’며 전화를 건 기인적 기질 때문인지 알려진 바는 없다.

윌리엄 켐러는 그렇게 미쿡이 하루게 다르게 발전하던 시기에, 그것도 미쿡의 한 복판인 뉴욕의 오번 교도소에서 새 시대에 걸맞은 졸라 일렉트로닉하고 고통스런 방법으로 죽어갔다. 소식을 전해들은 일부가 충격을 받긴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1915년 에디슨과 테슬라는 함께 노벨상 공동수상 후보에 지명되어 수상이 유력했으나 받지 못했다.

혹자는 에디슨만 상금 2만 달러가 돌아가는 것이 싫어, ‘조까’라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테슬라만 에디슨이 너무 싫어 ‘에디슨 조까’라고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둘 다 서로 ‘조까’라고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수상 필요조건인 논문을 둘 다 가지고 있지 않아 당연한 결과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1000개 이상의 특허를 출원한 발명왕 에디슨은 1931년 세상을 떴고, 당시 미국인들은 1분 동안 모든 등을 끔으로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72개의 특허를 출원한 니콜라 테슬라는 1943년 맨하탄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다.

맨허튼 호텔에서 테슬라의 시신이 발견된 1943년 1월 8일, FBI는 테슬라의 모든 자료를 압수한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발명과 연구내용이 서구 공산당에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당시 테슬라가 기후를 조정하는 시스템, 공간이동 시스템을 개발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수호를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은 FBI는 정확인 10년 뒤인 1953년 6월 19일, 윌리엄 켐러가 감전되어 죽은 오번 교도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름도 상큼한 싱싱교도소(singsing prison)의 전기의자에 로젠버그 부부를 앉힌다. 소련에 핵무기 기술을 빼돌렸다는 이유였다.




 
이곳이 바로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싱싱교도소.



To Be Continued…

본문에 등장하는 미국사 일부 내용들은 케네스 데이비스의 ‘미국사’와 기류 마사오의 ‘세계사’를 참고, 인용했다. 지난 기사에서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의 예고했으나,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는 게 좋을 듯 해 바꿨다. 혹 기다렸던 독자제위분덜이 계실지 모르겠다. 사과는 언젠가 ‘고료’가 나오면 그때 가서 ‘고려’해 보는 것으로 하겠다.



2012년 1월 26일 목요일

[좌충우돌세계사] 세르베투스 타죽다.




원스 어 폰어 타임 인 에수파냐…


페르난도와 이사벨라. 그리고 콜럼버스


아라곤의 왕자였던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의 왕녀인 이사벨라와 결혼, 아라곤의 왕위에 오른다. 뭐 이 결혼을 ‘에스파냐’의 통일의 시작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페르난도 2세는 지 자식을 가지고 정략적 결혼을 진행시킴으로서 유럽에서 아라곤-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다. 독자인 후안 왕자를 신성로마제국 황제 딸래미인 마르가레테와 혼인시켰고, 둘째 딸래미 후아나는 역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아들래미 펠리페 대공과 혼인시켰다. 이에 앞서 장녀 이사벨은 이미 포르투갈의 왕자 아폰수에게 시집을 보냈다.

바야흐로 때는 1497년, 아라곤-카스타야 연합왕국은 이로서 가카와 효성, 가카와 한국타이어 같은 포르투갈, 신성로마제국과의 긴밀한 동맹을 이뤘다. 예나지금이나 졸라 아름다운 사돈의 관계들은 이런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사위가 죽고, 외손주가 죽고, 큰딸도 죽고, 프랑스 루이 12세의 질녀와 재혼해 낳은 아들도 죽었다. 결국 1506년 4월, 스페인 통치권은 딸 후아나와 사위 펠리페에게 넘어갔다. 허나 같은 해 9월 펠리페가 세상을 뜬다. 그러자 펠리페가 죽자 남편을 사랑했던 후아나의 멘탈이 붕괴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로 인해 후아나는 남편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은 채 마차에 싣고 여러 수도원을 전전했다. 재밌는 건, 펠리페의 아랫도리 제법 자유분방했던 탓에 수녀원으론 절대 몰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은 영혼이 수녀를 유혹할지도 모른다는 ‘소울의부증’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후아나는 미친 채로 40여 년간 스페인 여왕으로 남아있었지만 1510년 스페인 의회는 페르난도 2세를 왕국의 관리자로 임명하였다.




 
후아나 라 로차(미친 후아나)를 그린 영화 ‘광녀조앤’



이렇게 유럽 최고의 명문 왕가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슬슬 태동할 무렵, 그 이듬해인 1511년,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라는 똑똑한 양반이 에스파냐 나바라주에서 태어난다. 스페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의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 양반이 제네바의 광장에서 자신이 쓴 책 ‘그리스도교 회복’의 원고와 함께 산 채로 홀랑 타죽을 줄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종교개혁가인 칼뱅의 눈앞에서 말이다.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세르베투스의 출생년도는 1509년이라는 설도 있다. 허나 그게 그리 중요한가. 초단위로 수천 수만 개의 정보가 이동하는 네트워크 시대에도 4-5살은 속이고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천지인데 뭐. 세르베투스가 1509년에 태어났든, 1511년에 태어났든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야 엄친아였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말했듯 그는 스페인 의학사에 꼽히고도 남는 의학자이며, 동시에 종교인이며, 동시에 법률가였다. 어린 나이에 그는 모국어는 물론 라틴어, 희랍어, 히부리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하였으며, 15세에 성경을 원문으로 독파하고 수도사가 됨으로서 종교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이단으로 낙인찍히긴 했어도…

그럼 수도사가 된 엄친아 세르베투스는 어쩌다 이단으로 낙인찍혀 홀랑 타 죽게 되었을까. 그가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종교인으로 기득권을 누리며 살지 않고 종교를 비판하게 된 계기는 바로 1530년 2월, 볼로냐에서 거행된 샤를 5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관식에 참여하는 세르베투스는 교황의 거만과 허세, 세속에 찌들고 타락한 교황을 맹종하는 황제를 본 뒤, ‘신성한 종교가 이러다가는 조때겠군.’이라 생각하고는 후원자를 떠나 리옹, 제네바 등을 돌며 종교개혁 지도자들을 잇달아 만나고 댕긴다.



 
저 뒤로 화형 당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저 친목삼아 만나고만 댕겼으면 좋으련만, 세르베투스는 종교가 곧 권력이었던 시대에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를 상대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뉴끌리어 밤’를 날렸던 것이다. 1531년에 ‘삼위일체론의 오류에 대하여, 제7권’ (De Trinitatis erroribus libri vii)을, 1532년에 개정판인 ‘삼위일체에 관한 대화, 제2권’(Dialogorum de Trinitate libri ii)을 잇달아 발간한다. 그러나 당시로선 그 누구에게도 인정 받을 수 없었던 이 혐오스럽고(?) 시뻘건(?) 책은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 발간은 되었으나, 살 수는 없는, ‘파리의 나비부인’과 같은 뭐 그런 것. 하지만 그가 요주의 인물, 제거 대상으로 찍히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눈치도 빠른 엄친아 였다. 그는 재빠르게 빌라노바루스(Villanovarus)로 이름을 바꾸고 프랑스 리옹으로 튄다. 수 년간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던 그는 1538년 파리대학 의학과에 입학한다. 이렇게 미인은 박명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그가 의학과에 입학한 건 단순한 호기심이나, 애정 이상의 선택이었다. 그는 대주교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의학자로서 폐를 통한 혈액순환을 최초로 기술한다. (심장과, 동맥, 정맥, 순환과 생성등의 전반적인 이론은 1628년 영국의 윌리엄 하비에 의해 발견/정리된다.) 더불어 지리, 천문학, 예언에 관한 책들을 출판한다. 어쩌면 리옹에서 빌라노바루스로 살았던 이 몇 해야 말로 세르베투스에게 있어 가장 평온했던 시기였을지 모른다.

진짜 비극은 1546년 자신의 사상을 보충하여 개정한 ‘그리스도교 회복’(Christianismi Restitutio)의 원고를 칼뱅에게 우편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뜻을 담아 전하면서 시작된다. 세르베투스는 당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일인자인 칼뱅과의 맞팔을 통해 폭풍 멘션을 주고받고 싶었던 것이다.

1509년 프랑스 북부에서 태어난 칼뱅 (장 꼬뱅Jean Cauvin, 칼뱅의 본명)은 훗날 16세기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중심에 서있던 개신교(그중 장로교)의 지도자가 된다. 그 역시 세르베투스와 마찬가지로 엄친아. 어린 나이에 출세와 성공이 보장된 오를레앙 대학의 법학과에 턱하니 붙는다. 어디 그뿐인가. 인문학과 역사학, 성경의 해석 등을 두루두루 섭렵하며, 1535년 26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출간해 개신교 교리의 기반을 다졌다.


제네바의 신정정치를 이끈 E4(ELDER). 파렐.칼뱅.베자.녹스(좌측부터) 
제네바의 신정정치를 이끈 E4(ELDER). 파렐.칼뱅.베자.녹스(좌측부터)


이듬해인 1536년. 제네바에서 설교자 초빙된 칼뱅은 3개월 만에 개신교 개혁에 필요한 규정들을 시의회에 제출하였고,(물론 통과되었다), 곧이어 기본원칙이 담긴 교육서인 ‘교리문답서’를 제출한다. ‘오직 신앙뿐’ ‘오직 성서뿐’이라는 2대 원칙을 내세운 살벌한 제네바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종교개혁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갔고, 그 중심에서 칼뱅은 강력한 기득권과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영적 과잉의 시대에, 1541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중심에 있던 칼뱅에게 1546년 드디어 세르베투스가 들이댄 것이다. 그거도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믄서 말이다.

삼위일체란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으로 존재하며, 그것이 곧 하나라는, 예수가 곧 하느님이라는 것. 이 교리는 카톨릭이던 개신교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교리다. 근데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대해 성경에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그러므로 무조건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 개신교의 교리에 어긋나며,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는 별개라고 주장했다. 그러니 종교개혁의 집행자이자, 개신교의 수장이었던 칼뱅이 최측근인 파렐(Farel)에게 이런 내용의 멘션을 날리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 세르베투스는 칼뱅과 맞팔 뒤 폭풍멘션을 주고받고 싶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가지고 붙어볼 거면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유행과도 같았던, 부패한 절대권력인 카톨릭에 대항한 종교개혁의 수장인 칼뱅이 적임자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칼뱅은


 


이런 멘션을 보내오는 세르베투스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직접 만나서 오프에서 함 토론하자 제안했지만 칼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2년여 동안 진행되었던 서신교환은 이렇게 끝난다. 세르베투스를 블락한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칼뱅을 비난한 한 출판업자를 불로 달군 쇠꼬챙이로 혀에 구멍을 내어 추방시키는등 종교개혁은 상당히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형태를 띄었다. 칼뱅 이전의 종교개혁가인 루터의 경우 ‘이단’과 ‘실제 사회에 피해를 가하는 집단’을 분리해 이단의 경우 사법권을 행사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했던 반면, 칼뱅의 경우 칼뱅반대가 곧 이단이자 사탄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반면에 세르베투스는 앞서 언급했듯이 이 시기 프랑스 리옹에서 주교의 주치의(비엔나에서 였다는 설도 있음)로 조용히 활동했다. 그러나 1553년 세르베투스는 칼뱅에게 보냈던 원고의 완성본인 기독교 강요에 대한 반론이자, 카톨릭, 개신교 모두를 비판하는 ‘그리스도교 회복’를 들고 나타났고 곧바로 출판업자와 함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에 회부된다.



종교재판에 회부된 출판업자와 세르베투스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묵비권을 행사한다. 발간된 일부는 세르베투스의 가명인 빌라노바누스로 되어있었고, 세르베투스와 출판업자는 한 목소리로 ‘우린 그런책 낸 적 없다’고 우겼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재판에서 세르베투스는 사형을 선고 받는다. 일전에 칼뱅과 주고 받았던 원고가 칼뱅에 의해 종교재판소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똑하고 민첩하기까지 했던 엄친아 세르베투스 아니던가. 역시 감시의 소흘함을 틈타 탈출에 성공한다. 이단을 놓친 로마교회 재판소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의 초상을 앞에두고 ‘천천히 산 채로 태워 재로 만든다’는 사형을 선고하며 끝이 난다.



 
이런 분위기는… 아니란 거쥐.


그런데 탈출에 성공한 세르베투스는 그해 8월, 제네바의 거리에서 연행된다. 제네바. 바로 칼뱅이 있는 바로 그곳. 조갑제횽아가 주석궁에서 냉면 잡숫다 연행된 시츄에이션과 흡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세르바투스가 제네바에 등장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그에게 칼뱅은 운명적 연적이라는 것이다. 직접 만나 해결하지 않으면 도저히 끝나지 않을 논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스페인 출신인 세르베투스를 돈키호테에 비유하곤 한다. 세르베투스가 칼뱅의 목회에 목숨을 걸고 버젓히 참석했다는 썰은 이런 이유로 등장한다.

두 번째는 제네바 의회가 칼뱅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네바 시의회가 칼뱅에게 적대적이어, 가끔 세르베투스의 비판을 빌어 칼뱅을 공격하기고 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가정을 긍정적으로 보진 않는다. 세르베투스가 바보냐. 이미 세르베투스는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의 이단이자, 악마였다. 그런 이를 제네바시의회가 보호해준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이미 때는 제네바에서 종교개혁가로서의 칼뱅의 지휘가 막강하던 시기이자, 앞서 말했듯 칼뱅에 대한 가벼운 비판조차 용납되지 않던 사회였다.

세르베투스는 잡혔다. 그를 가장 필요로 했던 제네바에서 말이다. 곧이어 시의회 주관으로 재판이 열린다. 재판이 진행되며 칼뱅과 세르베투스의 법정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시의회는 재판에 대해 제네바와 자매관계에 있던 네 도시(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에 문의하기도 했다. 네 도시는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 베른의 경우 ‘우리 같으믄 화형이삼’이라며 구체적인 답변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렇게 두 달이 걸린 재판은 결국 제네바 시의회의 삼일간의 최종논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가장 고통스런 사형’인 화형을 선고하며 끝이 난다. 이로서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서 칼뱅에 의해 종교적 사형을 당한 최초의 케이스가 되었다.


 
이렇게 타죽는다.


1553년 10월 27일 샹펠(Champel)의 화형장. 화형에 필요한 집과 나무, 그리고 그의 원고가 차곡히 쌓여 있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집과 나무, 그의 원고는 물론이요, 그의 살덩어리도 서서히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어떤 문헌에서도 확인 할 수는 없다만, 아마도 화형이 거행된 당일의 날씨는 화형에 적당한 화창한 날씨였을 것이다. 화창한 늦가을, 세르베투스는 고통 속에 타 죽었다.

칼뱅은 화형장에 오지 않았다고도 하고, 사형 직전 세르베투스를 찾아가 ‘저주나 받아라’고 호통을 쳤다고도 한다. 칼뱅의 추종자들은 칼뱅이 ‘화형’만은 면하게 하기 위해 일종의 구명을 펼치기도 했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화형은 칼뱅이 로마교회에 세르베투스의 원고를 넘겼을 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몰래 탈출이라도 시켰다면 모를까, 설사 했더라도 의미없는 규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당시 가장 고통스런 처형을 당했다. 그 이유는 바로 ‘다름’과 ‘다름’을 행사한 ‘자유’ 때문이었다. 종교를 강요하던 시기에 강요를 거부했고, 오직 종교였던 시기에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350년이 지나 칼뱅의 후학들이 세르베투스를 태워 죽인 바로 그 자리에 속죄비를 세웠다.



 
속.. 죄.. 비

우리의 큰 종교 개혁가인 깔뱅을 존경하고 감사하는 그의 후손들은 개혁과 복음의 참된 원칙에 따라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거슬려 행한 그 시대의 실수이기도 한 그의 실수를 정죄하면서 이 속죄비를 세운다. – 1903년 10월 27일

표현의 ‘자유’를, 정치적 ‘다름’을 인정받지 못해 한 인간이 처형당했다. 350년이 지나서야 본인이 아닌 그의 후학들이 실수를 인정했다. 하지만 칼뱅은 여전히 역사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고 있고, 세르베투스는 초라한 ‘속죄비’ 만큼이나 역사의 기억 저편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그건 카스텔리오도 마찬가지였다.




1515년생 카스텔리오, 그는 24세 약관의 나이에 제네바 개신교학교 교장에 임명된다. 그의 교장 임명을 승인한 이는 바로 칼뱅. 그러나 카스텔리오는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접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한 인간을 죽인 것일 뿐이다.”

카스텔리오는 ‘이단자에 관하여’, ‘칼뱅의 글에 반박함’ 등의 저서를 써내지만, 칼뱅의 지시에 의한 검열로 인해 인쇄되지 못한다. 게다가 세르베투스에 이어 화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카스텔리오는 48세의 나이에 위경련으로 급사한다. 누군가를 이를 두고 ‘다행’이라고도 한다.



 
카스텔리오


속죄비가 세워지고 난 후 정확히 100년이 흘렀다. 칼뱅의 자료들은 수도 없이 넘쳐나지만 세르베투스의 자료는 졸라 찾기 어렵다. 역사란 공평해야 한다. 아마 그 정도를 우린 상식이라 말하는 것일 게다. 세르베투스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이제 ‘이단’과 ‘악마’는 없는가? ‘자유’와 ‘다름’은 온전하게 인정받고, 보호 받고 있는가? 만일 ‘NO’라 답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여전히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의 반증일지 모른다. 난 그저 이 질문을 던지고 싶어 달려왔을 뿐이다. 그리고…

2012년을 살고 있는 나의 대답은 안타깝게도 ‘NO’다.



끝으로, 1832년에 태어난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 대공은 1867년 6월 19일 멕시코 자유파에 의해 처형되었다.



* ‘처형모임’라는 듣보 사조직이 있다. 내기로 한 술값을 안 낸다거나, 조금 먼저 취한다거나 하면 돌아가면서 서로를 처형하겠다며 다소 하드코어한 농을 던지는 재미진 모임이다. 한참 남았지만 10월 27일엔 모임을 가져야겠다. 다행히 아직 처형된 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