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3일 목요일

트로트 유감에 유감이... 유감?







반론을 환영한다.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다. 옆엔 놈이 싼 똥을 보고 '그게 니 똥이다' 하면 끝날 것을 '니가 싸지른 똥 존나 굵다'고 하면 그때서부터 '분분한 시츄에이션'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한국 성인남성의 평균 똥 굵기 자료를 들이밀며 '정확히 평균에 0.5파이 부족한 평균 미달인, 죽어라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지친 가장을 대변하는 가늘디 가는 똥이다 씹세야'라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씨바야. 똥만 보지 말고 똥이 말린 모양을 좀 봐라. 그건 굵기로 치환될 수 없는 미적 가치를 지닌 토리야마 아키라의 이상에 완벽히 부합하는 예술작품이다'고도 할 것이고, '저는 그냥 똥이 굵어 굵다고 한 것인데, 굵을 똥을 보고 왜 똥이 굵냐고 물으시면… 이처럼 말할 수 있는 너야 말로 장금이 같은 필자로다'라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른다. 뭐 이렇게 한 사람이 싸질러 놓은 의견, 혹은 논리의 정리라는 것이 완벽할 수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없는 일. 게다가 일정주기로 공개적인 곳에 마치 숙변 싸질러 놓듯 글 질 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론, 반론 등은 필자의 글에 담긴 여백을 훼손, 아니 채워주는 두손들고 환영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뭐랄까 벌어진 내 모공이 꽈~왁 쪼여 드는 느낌. 예의상 시작한 서론치고는 말이 길었다. 간만에 똥 얘기나 함 하고 싶었던 거다.


트로트에 대한 유감의 심정을 써 갈긴 글이 마빡에 오르는 영광의 희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춘심애비에게 이런 멘션이 날라들었더랬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누가 말했던가. 누가 이 청년에게 건강하지 않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 청년이 술자리에서 쉼 없이 피워대는 담배는 너무나 건강한 육체 탓에 자칫 고리타분해질 수 있을지 모를 자신의 인생을 개선하기 위한 일종의 노력(육체의 다운그레이드)인 것이다. 멘션을 보라. 정중히 '반론제기'의 윤허를 문의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필자, 머릿속에 '돌직구'와 'ㅋㅋ'의 의미가 중첩되믄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필자 고민했다. '쓰지 말어. 두번 쓰지 말어'하고 말까. 아님 '제 뒤통수는 님을 위한 것. 날 가져요'라고 대인의 정취를 공유하여 볼까 싶기도 했다. 허나 본 필자. '너클볼러'라는 베이스볼틱한 닉을 괜히 들고 다니는 게 아닌 바, 아래와 같은 멘션을 날렸더랬다.




보론과 반론의 여지가 존나 많은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속으로 '그런데 왜 니가 쓸려고 그러니'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대인봬. 게다가 공개적인 트위터 멘션이니 당연 더욱 '대인봬'임을 뽐낼 수 밖에… 하지만 대인봬놀이가 채 무르익기도 전에 게임은 이렇게 끝났다.




돌직구는 언제나 환영이라고, 하지만 힛 바이 피치 볼은 '마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 강조했건만. 이거슨 그냥 힛 바이 피치 볼이 아니었다. 게다가 '너클볼러에게 날리는 힛 바이 피치 볼'이란 부제는 내가 날린 멘션에 기인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하라'는 포청천 문체까지 구사하다니… 그렇다 춘심애비는 과거 샌디쿠팩스와 함께 다저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미스터 헤드 헌터 돈 드라이스데일과 같은 캐릭이었던 거시다. 알다시피 돈 드라이스데일은 나름 한 제구력 하는 선수, 그런 그의 힛 바이 피치 볼의 특징은 바로 '고의'라는 데 있다. 오죽하면 유격수 딕 그로트가 '드라이스데일을 상대하는 건 치과의사와 데이트하는 것과 똑같다'는 농담을 했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멘션 보내고 두 시간 만에 힛 바이 피치 볼을 완성하다니.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춘심애비에게 하나만 묻자. '두 시간 만에 쓴 거시 사실인가?'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모든 걸 사전의 모의하고 마치 내 의사를 묻는 척 쇼를 한 것에 대해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춘심애비의 반론이 머리를 노린 돌직구라면 춘심애비의 반론에 대한 나의 반론은 2003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뉴욕 양키스의 코치 돈 짐머에게 시전했던 '패대기' 되겠다. (참고로 난 춘심애비보다 나이가 많으니 윤리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럼 춘심애비. 거기 고대로 있어봐봐…





트로트라는 장르.

일단 '트로트 유감'은 트로트라는 장르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자 끄적거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재료가 트로트라는 점,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예로 들었다는 점, 그리고 컨트리와 트로트를 전통적인 장르로 등치시켜 설명한 몇가지 점들에 대해서는 살짝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컨트리는 전통, 트로트는 일제 산물.

트로트는 일제시대 유입된 엔카의해 정립된 것이 맞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신민요와 엔카의 교배의 결과물이 트로트.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엔카의 우성을 결정해버렸다. 결국 엔카와 가장 흡사한 장르가 이미자, 남진, 나훈아등의 슈퍼스타의 등장으로 국민장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제의 잔재라 쉽게 치부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렇게 따지면 컨트리 역시 미국에 정착한 빈곤층들이 자신들의 고향인 유럽에서 불렀던 것들을 부르기 시작, 다양한 유럽의 하층민 정서가 짬봉되믄서 시작된 것. 락앤롤역시 백인들이 지들 장르라 그리 떠들지만 재즈, 컨트리, 무엇보다 흑인민요 블루스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이런 것을 볼 때 트로트 역시 (일제의 의해 강요 주입된 시기를 제외하더라도) 전통적인 한 장르로 보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겠다.


'낭만에 대하여'?

 '트로트의 가능성'

필자는 분명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 말은 트로트를 포함한 2가지 이상의 장르가 접붙이기(grafting) 되었다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대목(rootstock 영양분을 공급하는 바탕나무)이 트로트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트로트가 다른 장르와 붙으면서 어떠한 결과물이 나왔느냐를 보자는 것이다. American Idiot으로 슈퍼밴드가 된 그린 데이의 음악을 펑크로 보던, 혹은 보다 넓은 모던 롹으로 보던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뭐 애초의 주제가 낭만에 대하여가 트로트인가, 아닌가였다면 가장 중요한 주제일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트로트유감'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일단 장르에 대한 얘긴 이 정도로만 하자. 게다가 트로트에 대한 장르논쟁은 이미 한참 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마빈 게이.

1959년에 설립된 모타운 레코드는 흑인음악의 성지와도 같다. 소울은 모타운에 의해, 그러니까 모타운이 뮤지션을 발굴하여 발매한 수많은 앨범들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흑인 음악의 대부로 불리우는 마빈 게이 역시 모타운 출신이다. 마빈 게이의 모타운 생활은 드럼 세션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모타운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순식간에 모타운이 미는 신인이 되어버렸다. 베리 고디의 누이 안나는 마빈 게이보다 무려 18살이나 더 많았다. 이렇게 그는 모타운을 대표하는 아이돌이 되어버렸다. 데뷔곡 역시 아이돌에 어울리는 빠른 댄스곡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유행하던 댄스곡이 아닌 자신의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자신의 생각대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음반 제작에 대한 모든 권한은 마빈 게이 꺼'라는 모타운의 확답을 얻는데 정확히 2년 걸렸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해 온 결과물을 내놓게 되는데 그게 바로 마빈 게이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앨범 'What's Going On'이다.


 
게이가 아니라 마빈 게이


필자는 '낭만에 대하여'나 '갈대의 순정'이 존나 멋있는 트로트라는 것, 대성의 '대박이야'와 '날봐 귀순'이 가벼워 보인다는 의견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모든 트로트가 '낭만에 대하여'나 '갈대의 순정'과 같은 '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다. 굳이 마빈 게이의 예를 꺼내든 이유도 바로 그것 이다. 마빈 게이와 같은 아이돌도 필요하지만 모든 아이돌이 모두 마빈 게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장르던 같은 장르 안에서 패턴이던 한쪽으로 과하게 편중되면 재미없다. 필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대중은 다양한 요구와는 무관하게 가벼운 패턴들로 편중되는 일종의 경향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뿌리깊은 경향이 현재는 더 심해졌다는 것이고…


90년대, 침체기를 맞은 트로트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곡들 중엔 영턱스 클럽의 '정'과 김혜연의 '서울 대전 대구 부산'등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춘심애비의 말처럼 '대중들이 원하는=인기를 얻은' 곡들이다. 동시에 '낭만에 대하여' ''서울탱고' '내 마음 별과 같이' '애모' '립스틱 짙게 바르고'등의 다양한 패턴들의 트로트 곡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중의 요구로만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나마 지금보다는 다양한 곡들이 소개될 수 있었던 환경을 덧대야만 가능해진다.


1993년. 이때 가요계는 서태지, 김건모, 신승훈. 이렇게 세 명의 이름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 해 이 세 명의 스타와 '다이다이'를 했던 가수가 있었으니. 그 가수는 다름아닌 김수희였다. 김수희의 애모는 3년 전인 1990년에 발표되었던 앨범 '서울여자'의 수록곡 이었다. 하지만 애모는 대중들과 만나지 못했다. 언론과 방송은 음반사에서는 미는 일부 타이틀곡만 내보내는 관행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곡가 유영건이 우연히 기자에게 소개한 애모가 기사화된 후 노래가 소개되면서 3년 후 폭풍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1993년 대학가요제를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대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트로트 1위에 선정되었다. 소개도 되지 못해 3년이나 묵혔던 곡의 성공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의 대단한 성공이었다.


'애모'의 케이스는 대중의 취향과 구조(공급자에서 수요자인 대중에 이르기까지)의 통로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필자가 가볍다고 말한 트로트의 일련의 경향들을 대중들의 요구에 의한 결과라고만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0~20년 뒤 박상철의 '무조건'을 흥얼거리는 사람이 있겠지. 

내가 말한 가벼움에 누군가는 동의할 것이고, 누군가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가벼움이라는 표현은 좋음과 나쁨으로 치환될 수 없다. 누군가에게 가벼움은 현실의 버거움을 잊게 해주는 청량제일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현실의 진중함을 무시하는 개그일수도 있듯이 말이다. 더욱이 음악을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도 없다. 가벼움에 매몰되는 일종의 경향에 대한 비판이었지, 가벼움 자체에 대한 지적이 아니었단 것이다.


춘심애비는 내게 물었다. '낭만에 대하여'를 최백호가 아닌 장윤정이 불렀어도 그렇게 감동했겠느냐고. 같은 결과물을 다른 사람이 부르는데 어떻게 감동이 같을 수 있겠는가. 세르지오 멘데스의 Mas Que Nada를 윌 아이 엠이 존나 멋진 스타일로 불렀어도, 돈 헨리의 The Heart Of Matter를 인디아 아리가 존나 구슬프게 불렀어도,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After The Love Has Gone을 브라이언 맥나잇이 존나 멋지게 불렀어도 느낌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더 좋거나, 더 나쁘거나. 아마 장윤정이 부른 '낭만에 대하여'도 둘 중 하나이겠다. 수수한 차림의 장윤정의 의자에 걸터 앉자 기타반주에 맞춰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암튼.


헌데 지금의 구조라면 장윤정이 설사 '낭만에 대하여'라는 곡을 받았더라도 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설사 존나 밀었더라도 대중에게 소개되지 못할 확률이 높다. 게다가 십 수년 전 '애모'의 작곡가 유영건이 썼던 방법이 지금 통할 확률은 극히 낮아 보인다는 것이다. 이 구조를 뚫고 일개 가수가, 소형기획사가 시장을 개척해 대중을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빅뱅의 대성을 예를 든 건 바로 그 지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트로트라는 장르에 대한 논쟁을 할거라면 대성과 GD의 이벤트를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지상파 메인 프로에 등장하는 장윤정, 윙크, 박현빈과 같은 트로트 가수들이 '등장'을 위해 가능한 곡들을 만들어(이걸 창작의 노력과 결부할 수는 없다) 들고 나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대성(+GD)은 그 지점에서 보다 자유롭다 보았기 때문이었다. 싱글로 발표한 두 곡 중 한 곡 정도는 마이너풍의 정통 트로트 비스무리하게 갔었어도, GD+대성이라면 충분히 대중에게 소개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방송에서 볼 수 있는 윙크.


춘심애비가 말했듯이 10-20년 뒤에 박상철의 무조건을 흥얼거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흥얼거린다. 장윤정의 노래도, 박현빈의 노래도 가끔 흥얼거린다. 누군가는 윙크의 노래도, LPG의 노래도, 허경환의 노래도 흥얼거릴지 모른다. 하지만 10-20년 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장르로 전락 할 수도 있다. 동네 빵집이 이렇게 다들 쫓겨날지 누가 예상했겠는가. 장르가 가지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트로트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장르다. 필자가 가볍다고 칭한 곡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트로트가 무슨 월드 와이드 장르가 되어야 한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취향이라는 이름 아래 무시되는 또 다른 대중의 취향에 대해, 그로 인해 점점 외소 해져가는 장르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딱 그것이었다.




패대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이 글이 초장에 밝힌 원대한 '패대기'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애초에 이 글은 춘심애비의 반론에 대한 약간의 반론+'트로트유감'에 대한 보론의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실 현재 필자의 분노게이지는 평상시 평균치를 상회하고 있다. 춘심애비의 반론 때문이 아니라 반론을 쓰는 것보다, 반론의 반론을 쓰는게 더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한 춘심애비의 의도(?)가 괘씸해 보였기 때문이다. 눈에서는 불이 나오는데 글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두 시간 만에 써재낀 반론에 반론을 쓰는데 열 시간이 걸리는 꼴이다. 아오 빡쳐.


춘심애비가 그토록 강조하는 대중의 취향이라는 것이, 시대의 반영이라는 것이 지금의 구조상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트로트를 개그로 대하는 일부의 경향과 태도에 대한 의견이 어떻게 일방적 폄하로, 창작자들의 진지한 노력에 대한 무시로, 더욱이 메달을 따지 못하는 선수들에게 대한 편협한 시선으로까지 이어지다니… 슬프지 아니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게다가… 내 취향을 올드 하다고까지 하다니…


하지만 내 모든 분노가 누그러 들었으니, 그 이유는 바로 마지막 짤방 때문이었다. 그 짤방은 춘심애비가 넣은 것이 아니다. 동영상만 7개가 들어간 필자의 글에 대한 반론이라 올린 춘심애비의 최초 글엔 그 흔한 짤방 하나 삽입되어 있지 않은 무성의한 형태의 것이었다. 모든 짤방은 편집부가 넣은 것이다. 고자질이 아니고, 뭐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고 보니 최초의 글이 좀 모양새를 갖춘 꼴이 되었다. 내게 최초의 성의 있는(?) 반론을 제기한 춘심애비에게 쪼금… 아주 쪼금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렇다고 짤방으로 인해 누그러진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만간 오프에서 '올드한 취향의 중년'이 시전하는 패대기를 맛 뵈줄 테다.


그러니 춘심애비는 들어라.


나는 외롭지 않다.





존나…



2012년 8월 14일 화요일

트로트 유감.




컨트리.


Edens Edge


요즘 난 이노래만 듣는다. 아이폰으로 듣고, 집에서 노트북으로 듣고, CD 돌리기도 하고, 어디갈 땐 차에서도 듣는다. 진짜 이 노래만 듣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못해도 백번은 들은 것 같다. 뻥 아니다. 진짜다.




Edens Edge의 Amen.



한장의 EP에 이어 데뷔앨범을 발표한 Edens Edge의 Amen은 전통적인 컨트리의 센스있는 팝튠화의 모범답안을 보여준다. 게다가 메인 보컬 Hannah Blaylock의 목소리는 컨트리와 팝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균형과 매력을 마구 뽐내고 있다. 아으 멋쪄... 국내 라이센스 발매는 안될 것으로 예상되며 (컨트리 앨범은 왠만큼 대박을 터뜨리지 않고서는 발매되지 않는다) 아직 음원사이트에도 등록되지 않았음으로 유튜브나, 아이튠즈를 통해 보고 듣는 수밖에는 없다. 시간되시는 분들은 우리집와서 들으셔도 되고...


컨트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Rock, Pop과의 유기적인 이종교배를 통한 대중화를 시도해왔다. 사실 컨트리는 이미 아뭬리칸들에겐 전통적인 인기 장르다. 갈스 브룩스같은 경우 앨범을 냈다하면 차트를 휩쓸기도 했고, 마일리 사일러스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빌리 레이 사이러스도 Achy Breaky Heart란 곡으로 가볍게 챠트 2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암튼 뭐 늘 인기있어왔던 장르다.


그러나. 그들만의 전통적인 '장르'는 그들의 영역밖에서는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자국의 챠트에선 늘 화려한 주목을 받아왔지만, 타국에서 철저히 외면받는 로컬 장르였다. 하지만 지금의 컨트리는 '전통'이 지닌 영역의 한계를 확실히 무너뜨린 것으로 보인다.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젊은 처자가 그래미를 휩쓰는 장면이 다소 어색하고 오바스럽게 보였을지 몰라도 컨트리는 다른 장르와의 세련된 조우를 통해 그들만의 리그 밖에서도 환호받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 선두에는 딕시 칙스, 테일러 스위프트, 레이디 앤터벨룸, 잭브라운 밴드 등이 있고, 에덴스 에지같은 후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제 비로소 컨트리는 월드 메인스트림 장르가 된 것이다. 더이상 컨트리는 네쉬빌같은 이름도 생소한 동네에서 수염기른 터프한 오리지널 양키 꼰대가 기타치고 노래부르며 지들끼리만 신난, 그들만의 장르가 아닌 것이다.


딕시 칙스 'Wide Open Spaces'


테일러 스위프트 'Love Story'



레이디 앤터벨룸 'Need You Now'


잭 브라운 밴드 'Chicken Fried'




다들 전통적인 컨트리 장르를 기반으로 해 약간씩 다른 음악들을 선보이고 있지만 모두 로컬을 넘어서는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다. 결국 가뜩이나 오만방자한 문화적 지배력 쩌는 아뭬리칸인데 신날 일이 하나 더 생긴거다. 아.. 부러버라.


트로트.

쿵짝, 쿵짝, 쿵짜짝 쿵짝.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추억도 있고, 눈물도 있는... 바로 트로트다. 이런 애절하고, 대중친화적인 우리의 장르 트로트는 로컬 중의 로컬, 로컬의 갑의 위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들어보자. 우린 이 곡을 통해 장르가 가지고 있는 서정성과 대중적인 멜로디, 고급스런 편곡등 트로트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헌데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 아닌 TV가요프로나, 밤업소 용으로 편곡된 곡들만이 쏟아져나와버렸다. 가사도, 멜로디도 편곡도 모두 그랬다.그로인해 몇년동안 트로트는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장르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트로트는 관광 버스에서 틀어놓고 몸을 흔들어대기 위한 장르로 전락해버렸다.





빅뱅의 지드래곤이 만들고 대성이 부른 몇곡을 봐도 그렇다. '대박이야'. '날 봐 귀순'에서 어떤 진지함 같은 게 느껴지나. 감정의 구구절절함. 구성진 멜로디 뭐 이런 거 있나. 없다. 물론 트로트라는 장르 전체가 모두 그럴필요는 없다. 문제는 모두 가볍고 우스꽝스러워져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귀여운 대성이가



이렇게 웃긴 대성이가 된다.



술에 잔뜩취해 들어오신 아버지는 '갈대의 순정'을 곧잘 부르시곤 했다.  들을 때 마다 잘은 몰라도 일종의 '남자의 숙명' 같은데 느껴지곤 했고, 술 취한 목소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트로트는 그렇게 멋드러진 장르였다. 생각해보면 우연히 남행열차를 타고다가 '남행열차'를 나지막이 따라부르며 빗물도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를 것 같기도 한 뭐 그런게 트로트 아니겠나 싶다. 암튼 마냥 몸만 흔들어대는 그런 장르가 아닌데, 죄다 그러고만 있다. 장르에 대한 진정한 고민보다는 장사꾼들의 상술만이 장르에 덧씌여있다. 이러다 돈이 안된다 싶으면, 장사가 안된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죄다 사라질 것이다.

트로트는 존나 멋진 장르다. 앞서 언급한 곡들 외에 내가 모르는 존나 멋진 곡들이 분명히 더 많이 있을게다. 하지만 멋진 트로트 곡들이 있다해도, 혹은 만들어진다해도 대중들이 쉽게 접하지 못한다는 시장의 한계도 있다. TV와 라디오는 늘 보여주고 들려준 것만 수없이 반복할 것이다. 대중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책무, 다양한 장르의 공존을 위한 미디어의 역할 이런 건 개나 줘 버린지 오래다. 생산자와 미디어의 요구가 명확해지면 비로소 동업자가 되믄서 일종의 파트너쉽이 체결된다. 이 파트너쉽이 아이돌위주의 공산품음악들이 쏟아지게 한, 철저하게 상품화된 곡들이 쏟아짐으로 인해 유통자, 대량생산이 가능한 대형기획사만 돈을 벌게하는 기형적인 시장을 형성케한 원인이다. 안타깝게도 이 바닥엔 그 파트너쉽만이 만개한 듯 하다. 좋은 곡들이 만들어지고, 대중들에게 쉽게 제공, 공급되며, 그것이 대중들의 만족, 수요로 이뤄지는 이런 판으로 전환 되어야 하는 것인데… 참으로 멀고 험난해 보인다. 40곡에 5천원이 뭐냐. 노래 한 곡당 150원도 안되는게 말이 되냐. 누가 음반을 사냐. 음반은 또 누가 만들고. 합리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내가 나이를 먹으믄 먹을수록 트로트를 찾는 이들은 줄어들거다. 그러니 제발 트로트를 이제 좀 진지하게 대해줬음 좋겠다. 멋지고, 슬프고, 신나고, 때론 섹쉬하기까지한 트로트에게 유감스러워야 되겠나. 트로트가 무슨 개그냔 말이다.
이런 날씨에, 게다가 비라도 내리는 날에 '낭만에 대하여' 가 어딘가에서 내 귀구녕을 파고든다고 생각해 봐라. 끊은 술도 다시보게 되고, 끊은 담배도 다시 물고 뿌연 하늘 바라보며 진하게 한모금 빨고 싶어진다. 이제라도 트로트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이고, 즐거운 장르로 다가갔음 싶다. 오늘 집에 아내도 없는데 부침개나 부쳐 술 한잔 먹으면서, 아버지 생각하며 '갈대의 순정'이나 함 흥얼거려 볼까 싶다. 가사가 다 생각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박일남 '갈대의 순정'

간만에 찾게된 '갈대의 순정'을 앞으로 자주 듣게 될 듯 하다. 아니 백번은 듣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