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5일 월요일

[쾌거] '더 딴지'


 
 
 
 
 
 
'D-5'

10월 30일 기준 D-5. 정확히 11월 10일을 의미한다. 그렇다. 본지는 지금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는 '그것'의 등장을 준비하고 있다. 하늘이 열리고 땅이 갈라질 기세엔, 열리고 갈라진 구녕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초조함이 서려있다. 사이트 개편 직후 디도스에 후려 맞아 너덜해진 게시판에 대한 독자들의 사자후와 같은 요청에도 묵묵부답, 초지일관의 모습을 잃지 않았던 본지의 대답은 바로 '그것'이다. 이 대답이야말로 독자덜의 향한 본지의 애정 어린 '성동격서 聲東擊西'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카피가 등장한지 10년이 넘었지만 벌렁거리는 슴가를 주체할 수 없어 한번만 더 우려먹는다.

'독자덜이 무엇을 상상하던 상상한 것과는 다른 것을 보게 될 것이다.'

 

WIRED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로 사망. 사인은 췌장신경내분비종양. 바로 애플의 스티브 잡스다. 그가 만들었지만 한 때 쫓겨나기도 했던, 다시 돌아와 한 때 자신을 쫓아냈던 지랄 맞은 기업을 충격적인 제품들의 연이은 히트를 통해 시가총액 707조라는 슈퍼울트라그레이트 기업으로 만들어놓은 장본인.
그가 떠난 날 애플은 자사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순백색의 바탕에 그의 모습을 넣는 것으로 애도의 마음을 담아 전세계로 보냈다. 그리고 같은 날, 미국의 유명한 IT, 디지텁 잡지인 와이어드 WIRED는 자사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애플의 홈페이지와 반대의 이미지를 올려 그와의 이별을 진심으로 추모 했다. 스티브 잡스와 각별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와이어드 메인 페이지


1993년 3월. 저널리스트 루이스 로제토, 그의 친구 제인 멧칼프, 소프트웨어 기술자 찰리 잭슨, MIT 미디어랩의 리콜라스 네그로폰테와 의기투합해 창간한 와이어드 WIRED. 본적(本籍)이 닷컴버블의 진원지 실리콘벨리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와이어드는 첨단기술과 문화를 전문적으로 다룸과 동시에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디자인을 선보임으로서 창간 이후 지금까지 후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름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 잡지 되겠다.
 
그들과 스티브 잡스와의 각별한 관계는 디지털기술+문화라는 잡지의 컨셉 때문만은 아니었다. 창간 이후 지금까지 20년의 잡지 역사상 가장 폭발적인 성공이 바로 2010년 1월 27일 스티브 잡스가 손에 들고 '쫘잔'하며 선보였던 바로 그 제품 바로 '아이패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짜잔~


'별로 놀랍지 않아. 커진 아이폰이니깐'. (닌텐도 사장 이와타 사토루)

'아이폰을 보고는 내가 좀더 빡세게 살아야겠구나 했는데, 아이패드 보고는 어째 대충 살아도 되겠더라구'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 빌 게이츠)


예나 지금이나 제품의 실체를 확인하고는 '혁신은 없다'는 회의적 시각들이 이런 식으로 언론을 통해 전달되었으나, 보란 듯 '쌩' 까고 '때는 이때다. 돌격 앞으로'를 외친 기업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와이어드였다.

 

뉴스가판대
 
와이어드의 디지털 매거진이 세상에 등장한 건 아이패드가 발표된 지 2개월이 지난 후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이패드용 매거진 앱을 공개하고 $4.99에 책정한 디지털 매거진의 다운로드 수는 1달 만에 10만 건. 하루에 2만 4천건 정도의 유료 다운로드가 진행된 셈이며, 이는 종이 책 판매부후의 150퍼센트에 해당하는 결과였다. 하지만 당장의 행운은 아니었다. 디지털 매거진 전투에서의 완벽한 선점은 93년 창간이래 꾸준히 생산해온 개성 있는 컨텐츠와, 어도비와 손잡고 진행한 2년 여간의 재식훈련 덕에 가능했다. 현재의 디지털 매거진 제작 툴의 표준이 되다 싶이 한 Adobe DSP(Digital Publishing Suit)는 바로 와이어드와 어도비간의 협업의 결과물이다.
 
 
IDEAS, TECHNOLOGY, CULTURE, BUSINESS = WIRED
 
 
2012년 현재. 뉴스가판대에 등록된 전세계 신문, 잡지의 수는 대략 3000여 개. 와이어드의 1개월 10만 다운로드라는 성공적인 기록은 같은 해 10월 1/5(2만 2천건)수준으로 떨어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나, 현재 등록된 3000여 개의 컨텐츠들은 사실 아이패드의 등장과 와이어드의 성공이 불러온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은 와이어드를 최고의 선두주자라 꼽는다. 그들의 개성 있고 현란한 표지는 그렇게 지금도 뉴스가판대를 채우고 있다.

 

무규칙 2종 매거진 '더 딴지 The DDanzi'

 
아이패드로 시작된 디지털 태블릿 시장은 이제 강호의 고수 모두가 덤벼 각축하는 살벌한 전쟁터가 되었다. 9인치 아이패드를 시작으로 삼성의 캘럭시 탭, 7인치 아마존 킨들을 시작으로 구글의 넥서스와 아이패드 미니까지. 하드웨어의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만큼, 하드웨어(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컨텐츠 시장도 무지막지하게 성장했다. 이 거대한 시장에, 아니 하루가 다르게 진입과 퇴출이 반복되는 살벌한 전장에 사~알짝 뜬금없이, 디지털 매체의 홍수 속에 스스로 방주가 될 것임을 만천하에 알린 시가총액 확인불가(?) 기업이 있었으니 그것이 '딴지일보' 바로 본지였다
 
아이패드 미니가 발표된 지 일주일 만에 등장한 'D-11'이라는 전격적인 발표는 정확히 2년을 준비하고 아이패드가 발표된 지 2달이 지나서야 등장한 와이어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신속함과 민첩함을 보여주었다. 국내 유일, 국내 최초 사이버 민족정론지라는 찬사가 지 맘대로 달라 붙은 게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께 알린 실존적 메시지와 같은 충격의 공지였던 것이다.



 

똥꼬가 헤질 때까지


하지만 늘 남들이 '똥침'이라는 찌르는 1차원적 행위에만 집착할 때, 똥침 후 묻어 나올지 모를 건더기에 대한 고찰에까지 사유의 영역을 확장에 왔던 본지 아니었던가. 앞서 말한 본지 답지 않은 신속함, 민첩함과 더불어 '더 딴지' 컨텐츠의 내용이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됨으로 인해 발생한 불안과 냉소를 원샷에 종식시키는, 개성적인 디자인의 대가 와이어드 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표지디자인까지 선보이는 디지털 매체 역사의 쾌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남들이 인형과 피규어 등으로 집을 장식할 때 책으로 집을 데코뤠이션했던 필자의 수많은 장서 중 유일하게 두 책과 살짝 닮아있는 그 표지. 필자 그제서야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만화 체게바라, 평전 체게바라, 그리고 '충격'


그렇다. '더 딴지' 표지는 그 자체로서 거대한 디지털 미디어 시장에 던지는 숭고한 포고문이자 결연한 출사표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여백의 미가 한껏 느껴지는 표지. 새롭게 개정될 21세기 디자인 백서에는 코카콜라, 폭스바겐 비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 자켓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 이 필자 확신, 두 번 확신하는 바다.



2012년 11월 10일


2012년 10월 30일 너불 편짱의 역사적인 트윗에서 밝힌 'D-11'로 유추해본 '더 딴지'의 발표일은 2012년 11월 10일이다. 발표와 함께 대대적으로 치뤄질 컨퍼런스는 요즘 커피가 예전만큼 팔리지 않아 살짝 걱정인 BUNKER1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너불 편짱의 PT로 진행될 KEYNOTE는 본지 홈페이지를 통해 전세계의 생중계 될 예정이다.

2011년 11월 10일 이후. 사람들은 선두주자를 와이어드로, 끝판왕을 '더 딴지'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11월 10일이 '더 딴지'가 나와봐야 확인 가능 한 것이다. 본지의 열혈 독자시라믄 필자의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도 남을 것이다. 자. 역사적인 발표일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필자의 글 한 토막도 예정대로라면 실리게 될 것이다. 물론 최종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는 필자 역시 전혀 모르고 있다. 하지만 결과를 떠나 살짝 꼴리는 새로운 시작임은 확실하다.
자, 우리 모두 남은 며칠 동안 귀두를 쫑긋 세우고 주목해보도록 하자. 그렇다고 독촉하지는 말자. 독촉해봐야 '안될 건 안된다는 거' 누구보다 본지 독자덜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 11월 10일에 보자.
 



추신) 예나 지금이나 딴지는 어려웠지만 늘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필자가 팬 일 때도, 이렇게 시덥잖은 글 나부랭이로 손을 보태고 있는 지금도 말이다. 그렇다고 딴지가 힘들다고 유세한적도 없다. 그래서 딴지를 지켜준 딴지 편집부와 딴지를 거쳐간 수많은 선배필진들에게 가끔 졸라 감사한다. 이런 멘트 서로간에 닭살스러워 아무도 하지 않는다. 이 참에 날 잡은 필자가 한번 씨부려본 것이니 너무 뭐라들 마시길. 더 딴지 The DDanzi는 진짜 좀 잘 됐으면 조케다. 꼭 한번이라도 고료를 받아보고 싶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2012년 11월 2일 금요일

선수들 - 프롤로그

 




단도직입적으로다가… 지금부터 도둑들, 아니 '선수들' 얘길 시작할까 한다. 존나 잘하고, 잘하는 만큼 천문학적인 대접도 받고, 언론의 플래쉬 세례를 독차지하고, 몸에서 광채가 나는 여친도 있는, 뭐, 그런 슈퍼스타들 말고 이런 선수들 말이다.

선수입장

메이저리그에 보스턴과 뉴욕이라는 앙숙이 있다면 한국프로야구엔 기아와 롯데라는 앙숙다운 앙숙이 있다. 보스턴과 뉴욕이 앙숙인 이유는 같은 지구여서만이 아니다. 보스턴이 민주당의 큐브와 같은 곳이라면 뉴욕은 공화당의 아크원자로 같은 곳이다.
게다가 보스턴이 베이브 루스를 양키스에 넘긴 이유로 우승을 하지 못한다는 밤비노의 저주(물론 2004년에서야 첫 우승을 하면서 깨지긴 했지만)로 얽혀있는 철천지 웬수 사이이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 이 두 팀의 맞대결만큼 뜨거운 경기는 없다. 게다가 두 팀의 팬들만큼 극성쩌는 팬들도 없고.
 
<앙숙간의 난투극이야 말로 최고의 난투극>


기아와 롯데도 뉴욕과 보스턴 못지 않다. 롯데의 연고지인 부산이 새누리당 우세의 경상도라면, 민주당의 연고지 광주는 민주당의 텃밭이다.
게다가 선동렬과 최동원이라는 전대미문의 라이벌 역사가 서려있는 앙숙다운 앙숙되겠다. 그런 앙숙간의 올 시즌 첫 경기. 기아의 주포 김상현이 부상으로 빠져있고, 롯데의 슈퍼타자 이대호는 롯데가 아닌 일본 오릭스의 선수였다. 하지만 스타가 빠졌다고 해서 앙숙이 베프가 될 수는 없는 법. 경기는 앙숙답게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화끈한 라이벌전의 희생양은 타자가 아니라 투수였다. 기아 선발투수 앤서니가 3이닝 5실점 강판, 롯데 선발투수 사도스키가 4와 1/3이닝 5실점 강판, 양팀의 선발이 모두 무너져 마운드에서 내려간 이후 기아가 4명의 투수, 롯데가 6명의 투수를 투입, 총 12명의 투수가 긴급 출동한 이 경기에서 롯데가 11-7로 승리하면서, 롯데는 무려 1462일만에 단독 1위 자리에 올랐다.
4월 7일부터 시작해 10월 6일(182일)에 끝난 올 시즌 정규시즌을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대략 9년 만에 첫 단독 1위의 자리에 오른 셈이다. 이 미션 임파서블한 게임에서 김성배는 이날 투입된 롯데의 7명 투수 중 한 명이었다. 김성배가 공 10개로 2명의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온 지 며칠 뒤 한 언론은 짤막하게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
 
<이성배>



그렇다. 그는 시즌 초 그저 2차 드래프트에서 간신히 롯데에 이름을 올린 성이 '김'인지 '이'인지도 햇갈리는 이름조차 생소한, 나이 많은(31세) 선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즌 기록은 69경기에 등판 53 1/3이닝 3승 3패 14홀드 방어율 3.21로 선방했다.
올 시즌 롯데가 야심차게 영입한 연봉 3억 5천의 이승호(48 2/3이닝 방어율 3.70)보다 좋은 성적이었고, 부상으로 3경기 출장밖에 하지 못한 연봉 5억의 정대현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을 정도.
게다가 SK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역전승의 주인공이 되어 게임MVP에 올랐다. 연봉 1억 5천에서 5천으로 삭감되어 두산에서 롯데로, 그것도 2차에 트레이드 된, 31살 김성배의 시즌은 이렇듯 너무나 훌륭했다. 더 이상 임경완을 잡지 않았다 비난하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롯데는 게임스코어 3-2로 패배가 담긴 쓴 잔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앞으로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댈 선수들. 바로 김성배와 같은 선수들이다.




'선수들'

 
'세상은 넓고 선수는 많다.'


최고라는 호칭을 얻지도, 그에 걸맞는 최고의 대우를 받지 못해도, 성공의 주변을 맴돌거나 성공의 근처에서 나자빠져도 늘 뜨거운 선수들. 때론 눈에 띄지 않아도 늘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하며 땀을 흘리는 선수들. 2002년 오클랜드의 20연승(1-아래 주 참조)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선수들. 그런 선수들을 종목을 불문하고 발굴, 디비고 조명하는 것이 바로 이 연재의 역사적이고 친환경적인 사명이라 하겠다.
 
 
독자들의 애정 어린 제보와 선정위원(축구의 필독, 프로레스링의 UMC, 스모의 죽지않는 돌고래, 비키니 미식축구의 춘심애비 등, 아직 본인들은 모르고 있음)들의 듣보스런 분석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다양한 종목에서 선정된 선수들을 향해 시도 때도 없이 헌사하고, 딴지 명예의 전당에 주저 없이 헌액함으로서 선수들의 땀과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널리 알리고 보전해 나갈 것이다. 숭고하고 결연한 이 길, 딴지 아니믄 누가 걷고 자빠져 있겠는가.




It Ain't Over 'Til It's Over

'It Ain't Over 'Til It's Over'. '끝나기 전에 끝난 것이 아니여'란 이 말은 메이저리그 명예전당에 오른 뉴욕양키스의 레전드 요기 다니엘, 아니 요기 베라의 명언이믄서 동시에 필자가 졸라 좋아라하는 레니 크래비츠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여 – 요기 베라 with 우승반지>


요기 베라의 말처럼, 게임은 시작되었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종목을 불문하고 게임엔 슈퍼스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는 선수(팀)가 있어야 이기는 선수(팀)가 있는 게 게임의 섭리니 어쩜 슈퍼스타에 가려진 '선수들'덕에 게임은 더 흥미진진한 걸지도 모른다. 김성배가 그러했듯 말이다. 이제 우리에겐 맥주 한 캔씩 들고 경기장에서, TV 앞에서 신나게 떠들며 보는 일만 남았다. '알고보면' 스포츠만큼 재밌는 것도 없다는 말이다. 가을이 왜 독서의 계절인가. 스포츠의 계절이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수많은 '선수들'이 여전히 땀 흘리고 있다.

(주1) 2002년 8월 13일부터 9월 14일까지 벌어진 오클랜드의 20경기 성적은 20승 무패. 20연승은 103년의 아메리칸리그의 역사상 최고의 기록이기도 했다. 게다가 마지막 3게임은 모두 끝내기 승리.
특히 마지막 경기는 11-0으로 이기고 있다 11-11로 동점허용. 끝내기 홈런으로 막장드라마틱한 승리를 만들어냈다. 당시 1억 2592만 달러로 연봉총액 1위(오클랜드는 4004만달러로 28위)였던 양키스와 같은 103승으로 지구 1위. 리그MVP(미구엘 테하다), 사이영상(배리 지토)을 모두 휩쓸었다. 2002년 시즌 초 꼴지였던 오클랜드는 그렇게 2002년 포스트시즌에 기적처럼 진출했다.

** 독자덜은 눈치챘을지 모르겠으나 딴지 명예의 전당엔 이미 한 선수가 헌액 되어있다. 바로 전 보스턴 레드삭스의 너클볼 투수 '팀 웨이크필드'다.


팀 웨이크필드(기사 링크)


당시 '천번은 아파야 어른이 된다'는 훈계가 하도 어이없어 결론을 그리 맺긴 했지만 '선수들' 연재의 시작이… 맞다. 본토에서도 보기 힘든 분량의 팀 웨이크필드에 대한 헌사다. 이런 헌사 딴지 아니믄 어디서 디벼 보겠는가. 그러니 본문 뒤에 프롤로그가 붙는 게 뭔 경우냐고 항의들 마시라. 그것도 다 딴지니깐 가능한 것이니.


**팀 웨이크필드(MLB)에 이은 다음 헌액자는 농구나 씨름 선수일 확률이 현재까지는… 높다.


** 명예의 전당 후보들에 대한 독자덜의 다양의 제보를 기다린다. 앞서 말한 자격요건을 갖춘 '선수들'에 대한 의견이나 제보는 종목을 불문하고 ddanzitheplayer@gmail.com으로 보내주시라. 독자들의 관심과 참여야 말로 반인권적이고 공포스런 딴지의 독촉에서 필자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유일한 구원의 손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참. 레니 크래비츠의 노래는 게임(스포츠) 얘기가 아니라 '사랑' 얘기다.
 

2012년 10월 17일 수요일

팀 웨이크필드 (선수들 ver.)

야구는…
야구는 돈도 많이 들지만, 드는 돈 만큼 위험한 경기이기도 하다. 고무를 주 재료로하는 공 하나만을 쓰는 여타의 주요 구기 프로스포츠와는 달리 나무로 만든 빠따. 코르크나 고무 등을 가죽으로 감싸 108번(108번뇌와는 아무 상관없는) 꿰맨 돌덩이 같은 공을 함께 쓴다. 어디 그뿐인가. 규칙도 위험천만하기 그지 없다. 투수는 타자가 서있는 홈플레이트로부터 18.44미터 떨어져있는, 게다가 30cm나 높이 위치한 마운드에서(타자에게 위협감을 주기 위해) 시속 120-150km 정도의 속도로 공을 뿌린다. 어떤 선수들은 맞고도 아무렇지 않게 1루로 걸어나가지만(필자 이건 분명 '안 아픈 척'이라 본다) 잘못 맞았다가는 조때기도 한다.







주니치 드래곤스 시절의 이종범이 한신 투수 가와지리 데스로가 던진 120km짜리 커브에 팔꿈치를 맞아 골절상을 입었고(한국인 선수에 대한 고의적 빈볼이란 얘기도 있었지만, 홈플레이트 쪽에 무리하게 붙은 이종범의 스탠스와 스트라이크존에 가까운 공의 코스를 봐서는 고의라 보기 어렵다), 얼마 전 미쿡에선 가장 많은 연봉을 받아 처묵는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시애틀의 에이쑤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뿌린 148km짜리 직구에 왼손등을 맞고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어디 그뿐인가, 보호장비 없이 몸과 몸이 가장 결렬하게 홈에서 부딛히기도 하는데, 지난 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미래라 불리우던 버스터 포지는 플로리다의 포수 스캇 커즌스와 홈에서의 충돌로 다리골절에, 발목인대 세군데가 손상되는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흔치 않은 경우이긴 하나, 야구가 한방에 훅가는 위험한 경기라는 걸 설명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다.

 



야구라는 게…

야구는 단순하게 말하면 던지고 치는 게임이다. 그게 꽃이다. 빠따를 잡은 타자의 미덕은 정확하게 멀리 쳐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번트가 아닌 홈런에 열광한다. 김재박의 공중부양 개구리 번트 정도가 아니고서야 대개는 힘껏 멀리 날아가는 시원한 타구에 열광한다. 당연한 거다. 마찬가지로 투수의 미덕은 정확하고 빠른 공이다. 투수든, 타자든 파워의 시대에 걸맞게 튜닝되어 있어야 주목받을 수 있게 된다. 물론 구속보다는 다양한 구질과 완벽한 제구를 갖춘 컨트롤의 마법사 그렉 매덕스(그 역시도 초기엔 150km짜리 설익은 패스트볼을 뿌리기도 했다) 같은 투수도 있지만 대개 빠른 공을 선호한다. 시원한 투구폼을 사랑하고, 160km(100마일)의 직구가 포수의 미트를 찢어버릴 듯 쑤시고 들어가며 내는 질퍽한 '뻑' 소릴 사랑한다. 때문에 포수 뒤의 관중석은 가급적 포수와 가깝게 설계된다. 고로 가장 비싼 자리가 된다.




<가장 핫한 파이어볼러 저스틴 벌랜더와 염문설이 난 케이트 업튼>


관중들을 흥분시키는 광속구를 뿌려대는 투수를 우린 '퐈이어 볼러'라고 한다. 메이저리그 투수 연봉 5위안에 드는 요한 산타나, CC 사바시아, 클리프 리, 저스틴 벌랜더, 로이 할러데이 모두 포심 평균 구속이 140km(90마일)이상이다. 국내 최고의 우, 좌완이라 불리우는 윤석민과 류현진 역시 최고 150km이상, 평균 140km대의 직구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못해도 140km 이상은 스피드 건에 찍혀줘야 직구다운 직구라 불리 운다. 거기에 볼 끝의 무브먼트까지 좋다면야 죽음인 거고.


2011년 45세의 나이로 200승을 달성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팀 웨이크필드의 직구는 평균 120km에도 미치지 못한다. 파워의 시대에 직무유기도 이런 직무유기가 없다. 그런 그가 역대 111번째, 2번째로 많은 나이에 200승을 달성했다. 6이닝 동안 5실점이라는 좋지 않은 투구내용이었지만 팀이 18점을 얻어준 탓에 선발승을 따내고야 말았다. 200승을 달성하고 며칠 뒤 시즌 마지막 등판은 뉴욕 양키스와의 어웨이 경기였다. 5회 말. 선두타자 데릭 지터가 출루, 다음 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상대한 웨이크필드가 던진 마지막 공은 105km(66마일)짜리 너클볼이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너클볼을 받아 쳐 출루했고, 이미 4실점한 팀 웨이크필드는 무사 1,2루 상태에서 강판되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던진 105km의 너클볼은 결국 시즌 마지막 공이 되었고, 동시에 그의 야구인생의 마지막 공이 되었다. 몇 달 뒤 그는 은퇴를 발표한다. 45세의 너클볼러는 그렇게 마운드를 떠났다.





팀 웨이크필드 #1

 
팀 웨이크 필드 Tim Wakefield


1988년. 1루수 팀 웨이크필드는 드래프트 8라운드에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지명, 월급 700불짜리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2할을 전전하는 타자에게 팀은 오랜 시간을 주지 않았다. 마이너에 합류 후 1년이 넘어가자 서서히 방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스프링캠프 감독인 우디 하이키가 제게 왔죠. 제가 다른 1루수와 캐치볼을 하면서 너클볼을 던지는 걸 본 거예요. 이렇게 말하더군요. '스트라이크도 던질 수 있나?' 그래서 '네. 고등학교 때 투수도 했어요. 못할 것도 없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날 시합이 끝나고 마운드에서 조금 던져봤어요. 감독님은 아무 말 없었죠. 잠시 후 사무실로 저를 불렀는데 코치들이 앉자서 저를 평가하더군요. 영화 <열아홉 번째 남자>에 나오는 상황 같았어요. 케빈 코스트너가 감독에게 불려가는 장면 말입니다. '참 나도 하기 싫은 일이지만… 위에서 그렇게 결정해서 내려온 건데… 구단에서 자네가 1루를 맡는 걸 원하지 않아 투수로 변신했으면 하는 모양이야'


저는 싫었습니다. 뭐랄까. 기분이 상했어요. 이렇게 빨리 나를 포기하는 건가 싶었죠. 저는 아직 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감독님은 '안 돼'라고 말하니까요. 그러니까 간단하게 보면 투수로 전향하던가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좋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죠.


-다큐멘터리 '너클볼' 중 팀 웨이크필드.


 

1992년 깜짝 전향한 이 듣보 너클볼러가 거둔 성적은 13경기 8승 1패 방어율 2.15였다. 2할을 전전하던 타자가 투수로 전향해, 그것도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전향하고서 방어율 2점대 초반을 찍은 것이다. 피츠버그는 이 듣보 신인 너클볼러에게 1993년 홈 개막전 선발을 맡긴다. 하지만 결과는 최악(볼넷 열개), 그 해 성적은 6승 11패 5.16. 다음해 팀은 그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당신 감독인 짐 릴랜드(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는 그의 깜작 데뷔를 '괴상한 일'이라고, 그의 급작스런 몰락을 '끝난 동화'라고도 했다. 너클볼은 그런 것이었다. 완벽하게 제구 되어도 늘 의심받는, 부상, 성적부진으로 인해 쫓겨나지 않기 위해 선택되는, 던지는 투수조차도 결국 어디에 꽂힐지 모르는 그런 구질. 최초의 너클볼러라 불리는 더치 레오나드의 너클볼 역시 '어깨부상으로 인한 퇴출'에 대한 불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94년 피츠버그에서 방출된 팀 웨이크필드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계약을 맺는다. 팀 웨이크필드가 팀에서 방출되자, 눈여겨보던 보스턴이 필 니크로에게 팀 웨이크필드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필 니크로가 '가능성이 있으니 무조건 잡으라'고 조언했다. 보스턴은 팀 웨크필드에게 선배 너클볼러인 필 니크로에게 너클볼을 전수 받는 조건을 포함한 마이너 오퍼를 넣었다. 팀 웨이크필드는 계약서에 사인하고 필 니크로와 만나게 된다. 필 니크로는 1960년대를 호령한, 46세의 나이로 300승을 거둔 너클볼의 제왕이었다. 하루아침에 노숙자가 된 신데렐라가 다시 드레스를 고쳐 입는 순간이었다.



웨이크필드를 지켜보는 필 니크로

 
 
너클볼Knuckleball

대부분의 투수들이 구사하는 구질들의 대부분은 잡는 모양, 스핀 등을 통해 안에서 밖으로, 위에서 아래로, 밖에서 안으로, 혹은 스트레이트로 공을 던질 수 있게 된다. 108개의 실밥이 그립에 따라 회전하며 다양한 형태로의 궤적를 만들어준다. 손가락 끝으로 회전을 주기 때문에서 투수들에게 손톱 관리는 필수적이다. 대부분의 구질이 손과 손가락을 이용해 잡아 긁으며 던진다면, 너클볼은 '밀어' 던진다. 대부분의 구질들이 인위적으로 공의 회전을 만들어 홈플레이트까지의 다양한 궤적을 만들어내는 것과 반대로 너클볼은 공을 찍어 밀어 던져 회전을 만들어내지 않음으로서 바람, 공기의 밀도, 습도 등의 저항에 의해 듣보스런 궤적을 만들어낸다.


최훈이 그린 너클볼에 대한 완벽한 써머리.
 

일반적인 포심패스트(직구)의 구속의 2/3의 속도로 날아오는 너클볼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힘을 잃으며 저항에 의해 투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 무브먼트에 타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하지만 그건 제구와 환경이 완벽할 때 얘기다. 공에 회전이 1-2바퀴라도 들어가게 되면 그 순간 너클볼은 타짜의 빠따에게 '어서옵쇼'하는 배팅볼이 되고 만다. 밋밋하고 느려터진, 치기 딱 좋은 배팅볼이 되는 것이다.


제왕 필 니크로도 이 마구를 완성하는데 10년이 걸렸다. 빠른 구속(좋은 어깨)을 요구하는 구질이 아니므로 누구나 입문할 수 있지만, 제어가 힘들다는 점 때문에 누구나 완성할 수 없는 구질이 된다. 제어가 되지 않음이 확인되는 '폭투'의 경우 필 니크로는 한 경기 두 자리 수 이상(10개 이상)을 11번, 전담 포수가 따로 있었던 팀 웨이크필드 역시 5번을 기록했다. 게다가 느린 구속으로 인해 도루허용이 빈번해 진다. 팀 웨이크필드는 2010년 4월 텍사스와의 경기에서 9개의 도루를 허용하기도 했다. 구단은 이러한 너클볼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팬 역시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팀 웨이크필드는 말한다. '너클볼이 내 인생과 닮았다'고…




 
팀 웨이크필드 #2

200승이라는 결과는 그가 19년 동안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방어율로만 놓고 보면 그리 화끈하지 않다. 시즌 중반에 데뷔해 13경기 8승 1패 방어율 2.15를 결과를 얻은 1992년과 시즌 풀타임 27경기 16승 8패 2.95를 기록한 1995년을 제외하고 풀타임 선발로 출장하여 4.0 미만을 찍은 적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를 오가면서 19시즌을 뛴 평균방어율은 4.41(463선발 200승180패) 한때 팀 동료였던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경우 18시즌 평균 방어율은 2.93.(409선발 219승 100패) 비슷한 승수를 거두고 은퇴한 존 스몰츠의 경우 21시즌 평균방어율은 3.33이다.(481선발 213승 155패)


 
전성기 시절, 페트로 마르티네스


그런 팀 웨이크필드가 19시즌을 뛰는 꾸준함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패전전용 중간계투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론 '모욕'을 느끼면서도 그는 팀이 요구하는 자리에 앉자 있었다. 불펜 강등에 따른 항변도, 트레이드 요구도 하지 않았다. 너클볼러로 전향하지 않으면 팀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던 데뷔 1년차 상황을 19년 동안 반복 또 반복해왔던 것이다. 그것도 극성맞은 팬으로 치면 뉴욕 양키스와 더불어 최고라 하는 보스턴에서 말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팀 웨이크필드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순간은 200승을 따낸 순간보다, 펜웨이파크의 그린 몬스터를 뒤로하고 은퇴기자회견을 하는 순간보다 2003년 앙숙 뉴욕 양키스와 붙은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쉽 7차전의 그 순간일지 모른다. 팀 웨이크필드는 1차전 6이닝 2실점 승리, 4차전 7이닝 1실점 승리로 시리즈 MVP로 거론되고 있었다. 게다가 팀이 8회까지 5-1로 앞서가고 있는 상황. 85년 만에 밤비노(미국 메이저리그의 보스턴 레드삭스가 1920년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트레이드시킨 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을 루스의 애칭인 밤비노에 빗댄 표현)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8회 동점허용. 결국 연장 10회 월드시리즈 진출을 대비해 휴식을 취하던 팀 웨이크필드도 출격한다. 10회를 잘 틀어막고 맞이한 11회 말. 팀 웨이크필드는 애런 분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는다. 밤비노의 저주를 깰 수 있는 기회를 날린 장본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뉴욕은 환호했고, 보스턴은 절망했다.



다행히 다음해인 2004년. 또다시 리그챔피언쉽에서 뉴욕 양키스와 맞붙은 보스턴은 역사적인 리버스스윕(3게임을 진 뒤 4게임을 이겨버리는)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내셔널리그 우승팀 세인트루이스와 만난다. 월드시리즈 1차전에 선발로 등판한 팀 웨이크필드는 4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5실점 한 채 강판되었으나 불펜의 선전으로 승리. 2차전 실링의 6이닝 1실점(무자책), 3차전 마르티네스의 7이닝 무실점, 4차전 데릭 로의 7이닝 무실점 호투로 시리즈를 스윕하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챙긴다. 아마 우승을 못했더라면 그에게도, 너클볼에게도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2003년 홈런의 순간(좌) – 좌절의 순간 (우)


 
2007년 보스턴은 또 한번의 우승을 경험 한다. 2009년 팀 웨이크필드는 메이저 데뷔 13년 차에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발된다. 하지만 경기에 출전하진 못했다. 2011년 마지막 시즌에 거둔 성적은 7승 8패 방어율 5.12. 3,006이닝(통산 3224.1이닝)으로 보스턴 프랜차이즈 사상 최다 이닝 기록을 세웠고, 팀 최고령 승리투수(44세)가 되었으며, 단일팀(보스턴) 17년 활약이라는 투수 최장기록도 세웠다. 통산 2,000 탈삼진, 200선발승 이라는 기록도 만들어냈다. 2012년까지 계약이 되어있었고, 18승이 모자란 보스턴 팀 사상 최고승인 192승(사이 영, 로저 클레멘스)에 도전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은퇴를 결심했다.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1995년 보스턴 이적 첫해 활약 (16승 8패 방어율 2.95)으로 아메리칸 리그 재기선수상을 받았고, 2010년 사회공헌이라는 가치를 실현한 선수에게 주는 로베르토클레멘테상을 수상했다. 조직에서 외면 받고,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너클볼러다운 수상경력이라 할 수 있겠다. 2012년. 팀 웨이크필드는 조용히 마운드를 떠났다.






조상구

'일어나요. 빨리. 처자식 굶기고 싶지 않거든 어서 일어나서 던져요'


마동탁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다 마동탁에 친 공에 맞고 쓰러진 유성구단의 후보 투수 조상구에게 마동탁이 던진 말이다. 하지만 조상구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 조상구의 볼을 마동탁은 쪼개면서 홈런으로 연결시켰다. 마동탁… 씹쉐이.


조상구를 눈 여겨 본 전 유성구단 감독이었던 손병호 감독은 그가 준비중인 외인구단에 그를 초청한다. 손감독이 설정한 외인구단의 입단 조건은 '박대받고, 설움받는 선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박대받고, 설움받은 오혜성, 백두산, 최경도, 하국상, 외팔이 최관, 그리고 조상구 이렇게 여섯이 무인도로 지옥훈련을 떠난다.


지옥에서 돌아온 외인구단. 마동탁의 유성구단과 결전의 날을 앞두고 손병호감독은 선발로 조상구를 선택한다. 조상구는 경기에 앞서 아들에게 표를 건내지만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한다. 몇 해 전 마동탁의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연습상대로라도 제발 할 수 있게 해달라'며 애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탓이었다. 마운드에 선 조상구. 하지만 그는 예전의 조상구가 아니었다. 9이닝 4안타 무실점 완봉승. 아들도 결국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조상구가 마동탁의 최강 유성구단에게 물 먹인 구질은 바로 손가락까지 잘라가면서 체득한 '너클볼'이었다.


 
손가락을 잘라 완성한 조상구의 너클볼




찰리 허프와 손병호

너클볼러들의 유대감은 다른 투수들과는 달라 보인다. 선배들은 후배들의 도움 요청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세를 봐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유대감을 통해 너클볼은 더치 레오나드에게서 시작되어 호이트 빌헬름(너클볼 마무리투수, 마무리 투수로 최초 명예의 전당 헌액), 필 니크로와 찰리 허프를 거쳐 팀 웨이크필드에게 전수되었다. 현재 팀 웨이크필드에 이어 R.A 디키가 너클볼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R.A 디키 역시 팀 웨이크필드에게서 이어진 자신의 너클볼에 대해 너클볼러간의 유대감에 의한 결과라 주저 없이 말한다.


'(감독은)당장에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잘 못하더라도 지켜봐 줄 수 있어야 한다.'

 
현재 활동중인 R.A 디키의 멘토인 찰리 허프가 한 말이다. 첫 선발 데뷔에서 완투승을 거두고도 마무리로 12년 동안 활동하고 나서야 다시 선발에 나서게 된, 그 역시도 너클볼러 였다.

 

배팅볼 투수인 조상구에게 모욕감을 주던 마동탁에게 손병호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2억짜리 선수답게 굴어. 프로 세계에선 선후배 관계도 없는 줄 알아'


 
마동탁은 팀 최고 스타였다. 아무리 감독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마동탁이 불만스런 목소리로 '왜 지랄이냐'고 말하자 손병호감독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닥쳐 씹새야'

 
손병호감독


뭔가를 이룬다는 것이 혼자서는 쉽지 않다는 것, 세상 모든 투수가 퐈이어볼러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 팀 웨이크필드의 너클볼을 보면 알 수 있다.





** 릭키 스턴, 앤 선드버그감독의 다큐멘터리 '너클볼'과 김형준기자의 기사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2012년 9월 3일 월요일

김난도에게 드리는 너클볼

 



야구는…

야구는 돈도 많이 들지만, 드는 돈 만큼 위험한 경기이기도 하다. 고무를 주 재료로하는 공 하나만을 쓰는 여타의 주요 구기 프로스포츠와는 달리 나무로 만든 빠따. 코르크나 고무 등을 가죽으로 감싸 108번(108번뇌와는 아무 상관없는) 꿰맨 돌덩이 같은 공을 함께 쓴다. 어디 그뿐인가. 규칙도 위험천만하기 그지 없다. 투수는 타자가 서있는 홈플레이트로부터 18.44미터 떨어져있는, 게다가 30cm나 높이 위치한 마운드에서(타자에게 위협감을 주기 위해) 시속 120-150km 정도의 속도로 공을 뿌린다. 어떤 선수들은 맞고도 아무렇지 않게 1루로 걸어나가지만(필자 이건 분명 '안 아픈 척'이라 본다) 잘못 맞았다가는 조때기도 한다.


 



주니치 드래곤스 시절의 이종범이 한신 투수 가와지리 데스로가 던진 120km짜리 커브에 팔꿈치를 맞아 골절상을 입었고(한국인 선수에 대한 고의적 빈볼이란 얘기도 있었지만, 홈플레이트 쪽에 무리하게 붙은 이종범의 스탠스와 스트라이크존에 가까운 공의 코스를 봐서는 고의라 보기 어렵다), 얼마 전 미쿡에선 가장 많은 연봉을 받아 처묵는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시애틀의 에이쑤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뿌린 148km짜리 직구에 왼손등을 맞고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어디 그뿐인가, 보호장비 없이 몸과 몸이 가장 결렬하게 홈에서 부딛히기도 하는데, 지난 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미래라 불리우던 버스터 포지는 플로리다의 포수 스캇 커즌스와 홈에서의 충돌로 다리골절에, 발목인대 세군데가 손상되는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흔치 않은 경우이긴 하나, 야구가 한방에 훅가는 위험한 경기라는 걸 설명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다.





야구라는 게…

야구는 단순하게 말하면 던지고 치는 게임이다. 그게 꽃이다. 빠따를 잡은 타자의 미덕은 정확하게 멀리 쳐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번트가 아닌 홈런에 열광한다. 김재박의 공중부양 개구리 번트 정도가 아니고서야 대개는 힘껏 멀리 날아가는 시원한 타구에 열광한다. 당연한 거다. 마찬가지로 투수의 미덕은 정확하고 빠른 공이다. 투수든, 타자든 파워의 시대에 걸맞게 튜닝되어 있어야 주목받을 수 있게 된다. 물론 구속보다는 다양한 구질과 완벽한 제구를 갖춘 컨트롤의 마법사 그렉 매덕스(그 역시도 초기엔 150km짜리 설익은 패스트볼을 뿌리기도 했다) 같은 투수도 있지만 대개 빠른 공을 선호한다. 시원한 투구폼을 사랑하고, 160km(100마일)의 직구가 포수의 미트를 찢어버릴 듯 쑤시고 들어가며 내는 질퍽한 '뻑' 소릴 사랑한다. 때문에 포수 뒤의 관중석은 가급적 포수와 가깝게 설계된다. 고로 가장 비싼 자리가 된다.



<가장 핫한 파이어볼러 저스틴 벌랜더와 염문설이 난 케이트 업튼>



 관중들을 흥분시키는 광속구를 뿌려대는 투수를 우린 '퐈이어 볼러'라고 한다. 메이저리그 투수 연봉 5위안에 드는 요한 산타나, CC 사바시아, 클리프 리, 저스틴 벌랜더, 로이 할러데이 모두 포심 평균 구속이 140km(90마일)이상이다. 국내 최고의 우, 좌완이라 불리우는 윤석민과 류현진 역시 최고 150km이상, 평균 140km대의 직구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못해도 140km 이상은 스피드 건에 찍혀줘야 직구다운 직구라 불리 운다. 거기에 볼 끝의 무브먼트까지 좋다면야 죽음인 거고.



2011년 45세의 나이로 200승을 달성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팀 웨이크필드의 직구는 평균 120km에도 미치지 못한다. 파워의 시대에 직무유기도 이런 직무유기가 없다. 그런 그가 역대 111번째, 2번째로 많은 나이에 200승을 달성했다. 6이닝 동안 5실점이라는 좋지 않은 투구내용이었지만 팀이 18점을 얻어준 탓에 선발승을 따내고야 말았다. 200승을 달성하고 며칠 뒤 시즌 마지막 등판은 뉴욕 양키스와의 어웨이 경기였다. 5회 말. 선두타자 데릭 지터가 출루, 다음 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상대한 웨이크필드가 던진 마지막 공은 105km(66마일)짜리 너클볼이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너클볼을 받아 쳐 출루했고, 이미 4실점한 팀 웨이크필드는 무사 1,2루 상태에서 강판되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던진 105km의 너클볼은 결국 시즌 마지막 공이 되었고, 동시에 그의 야구인생의 마지막 공이 되었다. 몇 달 뒤 그는 은퇴를 발표한다. 45세의 너클볼러는 그렇게 마운드를 떠났다.





팀 웨이크필드 #1
 
 
 
 
팀 웨이크 필드 Tim Wakefield
 
 
 
1988년. 1루수 팀 웨이크필드는 드래프트 8라운드에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지명, 월급 700불짜리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2할을 전전하는 타자에게 팀은 오랜 시간을 주지 않았다. 마이너에 합류 후 1년이 넘어가자 서서히 방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스프링캠프 감독인 우디 하이키가 제게 왔죠. 제가 다른 1루수와 캐치볼을 하면서 너클볼을 던지는 걸 본 거예요. 이렇게 말하더군요. '스트라이크도 던질 수 있나?' 그래서 '네. 고등학교 때 투수도 했어요. 못할 것도 없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날 시합이 끝나고 마운드에서 조금 던져봤어요. 감독님은 아무 말 없었죠. 잠시 후 사무실로 저를 불렀는데 코치들이 앉자서 저를 평가하더군요. 영화 <열아홉 번째 남자>에 나오는 상황 같았어요. 케빈 코스트너가 감독에게 불려가는 장면 말입니다. '참 나도 하기 싫은 일이지만… 위에서 그렇게 결정해서 내려온 건데… 구단에서 자네가 1루를 맡는 걸 원하지 않아 투수로 변신했으면 하는 모양이야'
 
저는 싫었습니다. 뭐랄까. 기분이 상했어요. 이렇게 빨리 나를 포기하는 건가 싶었죠. 저는 아직 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감독님은 '안 돼'라고 말하니까요. 그러니까 간단하게 보면 투수로 전향하던가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좋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죠.

-다큐멘터리 '너클볼' 중 팀 웨이크필드.



1992년 깜짝 전향한 이 듣보 너클볼러가 거둔 성적은 13경기 8승 1패 방어율 2.15였다. 2할을 전전하던 타자가 투수로 전향해, 그것도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전향하고서 방어율 2점대 초반을 찍은 것이다. 피츠버그는 이 듣보 신인 너클볼러에게 1993년 홈 개막전 선발을 맡긴다. 하지만 결과는 최악(볼넷 열개), 그 해 성적은 6승 11패 5.16. 다음해 팀은 그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당신 감독인 짐 릴랜드(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는 그의 깜작 데뷔를 '괴상한 일'이라고, 그의 급작스런 몰락을 '끝난 동화'라고도 했다. 너클볼은 그런 것이었다. 완벽하게 제구 되어도 늘 의심받는, 부상, 성적부진으로 인해 쫓겨나지 않기 위해 선택되는, 던지는 투수조차도 결국 어디에 꽂힐지 모르는 그런 구질. 최초의 너클볼러라 불리는 더치 레오나드의 너클볼 역시 '어깨부상으로 인한 퇴출'에 대한 불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94년 피츠버그에서 방출된 팀 웨이크필드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계약을 맺는다. 팀 웨이크필드가 팀에서 방출되자, 눈여겨보던 보스턴이 필 니크로에게 팀 웨이크필드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필 니크로가 '가능성이 있으니 무조건 잡으라'고 조언했다. 보스턴은 팀 웨크필드에게 선배 너클볼러인 필 니크로에게 너클볼을 전수 받는 조건을 포함한 마이너 오퍼를 넣었다. 팀 웨이크필드는 계약서에 사인하고 필 니크로와 만나게 된다. 필 니크로는 1960년대를 호령한, 46세의 나이로 300승을 거둔 너클볼의 제왕이었다. 하루아침에 노숙자가 된 신데렐라가 다시 드레스를 고쳐 입는 순간이었다.





웨이크필드를 지켜보는 필 니크로
 



너클볼Knuckleball

대부분의 투수들이 구사하는 구질들의 대부분은 잡는 모양, 스핀 등을 통해 안에서 밖으로, 위에서 아래로, 밖에서 안으로, 혹은 스트레이트로 공을 던질 수 있게 된다. 108개의 실밥이 그립에 따라 회전하며 다양한 형태로의 궤적를 만들어준다. 손가락 끝으로 회전을 주기 때문에서 투수들에게 손톱 관리는 필수적이다. 대부분의 구질이 손과 손가락을 이용해 잡아 긁으며 던진다면, 너클볼은 '밀어' 던진다. 대부분의 구질들이 인위적으로 공의 회전을 만들어 홈플레이트까지의 다양한 궤적을 만들어내는 것과 반대로 너클볼은 공을 찍어 밀어 던져 회전을 만들어내지 않음으로서 바람, 공기의 밀도, 습도 등의 저항에 의해 듣보스런 궤적을 만들어낸다.




최훈이 그린 너클볼에 대한 완벽한 써머리.
 

 
일반적인 포심패스트(직구)의 구속의 2/3의 속도로 날아오는 너클볼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힘을 잃으며 저항에 의해 투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 무브먼트에 타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하지만 그건 제구와 환경이 완벽할 때 얘기다. 공에 회전이 1-2바퀴라도 들어가게 되면 그 순간 너클볼은 타짜의 빠따에게 '어서옵쇼'하는 배팅볼이 되고 만다. 밋밋하고 느려터진, 치기 딱 좋은 배팅볼이 되는 것이다.



제왕 필 니크로도 이 마구를 완성하는데 10년이 걸렸다. 빠른 구속(좋은 어깨)을 요구하는 구질이 아니므로 누구나 입문할 수 있지만, 제어가 힘들다는 점 때문에 누구나 완성할 수 없는 구질이 된다. 제어가 되지 않음이 확인되는 '폭투'의 경우 필 니크로는 한 경기 두 자리 수 이상(10개 이상)을 11번, 전담 포수가 따로 있었던 팀 웨이크필드 역시 5번을 기록했다. 게다가 느린 구속으로 인해 도루허용이 빈번해 진다. 팀 웨이크필드는 2010년 4월 텍사스와의 경기에서 9개의 도루를 허용하기도 했다. 구단은 이러한 너클볼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팬 역시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팀 웨이크필드는 말한다. '너클볼이 내 인생과 닮았다'고…





팀 웨이크필드 #2

200승이라는 결과는 그가 19년 동안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방어율로만 놓고 보면 그리 화끈하지 않다. 시즌 중반에 데뷔해 13경기 8승 1패 방어율 2.15를 결과를 얻은 1992년과 시즌 풀타임 27경기 16승 8패 2.95를 기록한 1995년을 제외하고 풀타임 선발로 출장하여 4.0 미만을 찍은 적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를 오가면서 19시즌을 뛴 평균방어율은 4.41(463선발 200승180패) 한때 팀 동료였던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경우 18시즌 평균 방어율은 2.93.(409선발 219승 100패) 비슷한 승수를 거두고 은퇴한 존 스몰츠의 경우 21시즌 평균방어율은 3.33이다.(481선발 213승 155패)


 
전성기 시절, 페트로 마르티네스
 

 
그런 팀 웨이크필드가 19시즌을 뛰는 꾸준함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패전전용 중간계투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론 '모욕'을 느끼면서도 그는 팀이 요구하는 자리에 앉자 있었다. 불펜 강등에 따른 항변도, 트레이드 요구도 하지 않았다. 너클볼러로 전향하지 않으면 팀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던 데뷔 1년차 상황을 19년 동안 반복 또 반복해왔던 것이다. 그것도 극성맞은 팬으로 치면 뉴욕 양키스와 더불어 최고라 하는 보스턴에서 말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팀 웨이크필드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순간은 200승을 따낸 순간보다, 펜웨이파크의 그린 몬스터를 뒤로하고 은퇴기자회견을 하는 순간보다 2003년 앙숙 뉴욕 양키스와 붙은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쉽 7차전의 그 순간일지 모른다. 팀 웨이크필드는 1차전 6이닝 2실점 승리, 4차전 7이닝 1실점 승리로 시리즈 MVP로 거론되고 있었다. 게다가 팀이 8회까지 5-1로 앞서가고 있는 상황. 85년 만에 밤비노(미국 메이저리그의 보스턴 레드삭스가 1920년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트레이드시킨 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을 루스의 애칭인 밤비노에 빗댄 표현)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8회 동점허용. 결국 연장 10회 월드시리즈 진출을 대비해 휴식을 취하던 팀 웨이크필드도 출격한다. 10회를 잘 틀어막고 맞이한 11회 말. 팀 웨이크필드는 애런 분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는다. 밤비노의 저주를 깰 수 있는 기회를 날린 장본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뉴욕은 환호했고, 보스턴은 절망했다.


다행히 다음해인 2004년. 또다시 리그챔피언쉽에서 뉴욕 양키스와 맞붙은 보스턴은 역사적인 리버스스윕(3게임을 진 뒤 4게임을 이겨버리는)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내셔널리그 우승팀 세인트루이스와 만난다. 월드시리즈 1차전에 선발로 등판한 팀 웨이크필드는 4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5실점 한 채 강판되었으나 불펜의 선전으로 승리. 2차전 실링의 6이닝 1실점(무자책), 3차전 마르티네스의 7이닝 무실점, 4차전 데릭 로의 7이닝 무실점 호투로 시리즈를 스윕하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챙긴다. 아마 우승을 못했더라면 그에게도, 너클볼에게도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2003년 홈런의 순간(좌) – 좌절의 순간 (우)

 

2007년 보스턴은 또 한번의 우승을 경험 한다. 2009년 팀 웨이크필드는 메이저 데뷔 13년 차에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발된다. 하지만 경기에 출전하진 못했다. 2011년 마지막 시즌에 거둔 성적은 7승 8패 방어율 5.12. 3,006이닝(통산 3224.1이닝)으로 보스턴 프랜차이즈 사상 최다 이닝 기록을 세웠고, 팀 최고령 승리투수(44세)가 되었으며, 단일팀(보스턴) 17년 활약이라는 투수 최장기록도 세웠다. 통산 2,000 탈삼진, 200선발승 이라는 기록도 만들어냈다. 2012년까지 계약이 되어있었고, 18승이 모자란 보스턴 팀 사상 최고승인 192승(사이 영, 로저 클레멘스)에 도전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은퇴를 결심했다.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1995년 보스턴 이적 첫해 활약 (16승 8패 방어율 2.95)으로 아메리칸 리그 재기선수상을 받았고, 2010년 사회공헌이라는 가치를 실현한 선수에게 주는 로베르토클레멘테상을 수상했다. 조직에서 외면 받고,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너클볼러다운 수상경력이라 할 수 있겠다. 2012년. 팀 웨이크필드는 조용히 마운드를 떠났다.





조상구



'일어나요. 빨리. 처자식 굶기고 싶지 않거든 어서 일어나서 던져요'



마동탁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다 마동탁에 친 공에 맞고 쓰러진 유성구단의 후보 투수 조상구에게 마동탁이 던진 말이다. 하지만 조상구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 조상구의 볼을 마동탁은 쪼개면서 홈런으로 연결시켰다. 마동탁… 씹쉐이.



조상구를 눈 여겨 본 전 유성구단 감독이었던 손병호 감독은 그가 준비중인 외인구단에 그를 초청한다. 손감독이 설정한 외인구단의 입단 조건은 '박대받고, 설움받는 선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박대받고, 설움받은 오혜성, 백두산, 최경도, 하국상, 외팔이 최관, 그리고 조상구 이렇게 여섯이 무인도로 지옥훈련을 떠난다.


지옥에서 돌아온 외인구단. 마동탁의 유성구단과 결전의 날을 앞두고 손병호감독은 선발로 조상구를 선택한다. 조상구는 경기에 앞서 아들에게 표를 건내지만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한다. 몇 해 전 마동탁의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연습상대로라도 제발 할 수 있게 해달라'며 애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탓이었다. 마운드에 선 조상구. 하지만 그는 예전의 조상구가 아니었다. 9이닝 4안타 무실점 완봉승. 아들도 결국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조상구가 마동탁의 최강 유성구단에게 물 먹인 구질은 바로 손가락까지 잘라가면서 체득한 '너클볼'이었다.


 

손가락을 잘라 완성한 조상구의 너클볼

 


찰리 허프와 손병호

너클볼러들의 유대감은 다른 투수들과는 달라 보인다. 선배들은 후배들의 도움 요청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세를 봐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유대감을 통해 너클볼은 더치 레오나드에게서 시작되어 호이트 빌헬름(너클볼 마무리투수, 마무리 투수로 최초 명예의 전당 헌액), 필 니크로와 찰리 허프를 거쳐 팀 웨이크필드에게 전수되었다. 현재 팀 웨이크필드에 이어 R.A 디키가 너클볼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R.A 디키 역시 팀 웨이크필드에게서 이어진 자신의 너클볼에 대해 너클볼러간의 유대감에 의한 결과라 주저 없이 말한다.


'(감독은)당장에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잘 못하더라도 지켜봐 줄 수 있어야 한다.'




현재 활동중인 R.A 디키의 멘토인 찰리 허프가 한 말이다. 첫 선발 데뷔에서 완투승을 거두고도 마무리로 12년 동안 활동하고 나서야 다시 선발에 나서게 된, 그 역시도 너클볼러 였다.


배팅볼 투수인 조상구에게 모욕감을 주던 마동탁에게 손병호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2억짜리 선수답게 굴어. 프로 세계에선 선후배 관계도 없는 줄 알아'


마동탁은 팀 최고 스타였다. 아무리 감독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마동탁이 불만스런 목소리로 '왜 지랄이냐'고 말하자 손병호감독은 시원하게 한마디 해준다.



'닥쳐 씹새야'



어깨가 망가져, 혹은 타자로서의 가능성을 구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찾아온 선수에게 찰리 허프는, 배팅볼 조차 제대로 던지지 못해 한참 어린 후배에게 욕지거릴 듣던 조상구에게 손병호 감독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말이다.

  
 
 


손병호감독


 

너클볼을 받아랏

우리는 지금 성공시대를 살고 있다. 성공한 대통령이 '다 해봐서 안다'는 지 자랑을 쏟아내는, 성공보장 이벤트인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성공한 사람들이 나와서 성공했으니 이제 힐링이 필요하다 대놓고 판을 벌리는 그런 시대, 바야흐로 성공시대에 살고 있다.



성공한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나도 힘들었다고' '그럼에도 성공했다'고 말이다. 성공한 이들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나와 '힐링'이 필요하다 떠든다. 성공이 아닌 평범한 삶에도 쉽게 접근하지 못해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러고 있냐' '문제없다' '다 그런 거다' '나도 이렇게 성공했다'고 말한다.


우리 함께 사는 곳엔 아픈 사람들에게 '성장통'이라 훈수 두는 사람과 '나도 아파 봐서 안다'는 무용담을 말하는 이들로 넘쳐난다. 아픈 이유에 대 진심으로 묻거나, 보건소를 많이 짓자고, 병원을 많이 짓자고, 보험의 혜택을 늘리자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사람은 있는데,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어른은 있는데, 천번도 흔들리지 않은 어른 탓이라고 고백하는 어른은 거의 없다. 자신이 힘들게 성공했다 말할 뿐이지, 누가, 왜 힘들어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 멘토에 열광하면서 멘티에겐 관심을 주지 않는 불공평함이다. 쳇



우연히 김난도 교수의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의 출간소식을 접해 듣고, 너클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너클볼러 팀 웨이크필드가 떠올랐다. 나는 그를 오랫동안 사랑해왔다. 너클볼이 꼭 자신과 같다는 말을 꼭 내가 한 말처럼 입에 달고 살았다. 손에서 공 떠나면 끝이라는 책임과, 인생 언제 어찌될지 모른다는 불확실에 동의했다. 그렇다고 내게 조상구처럼 손가락을 잘라 성공할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만큼의 성공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저 때론 '네 탓이 아냐'라고 말해줄 누군가와, 함께 아픔을 나눌 '유대'가 필요했었다. 그 생각에 너클볼러라는 나의 닉네임도, 팀 웨이크필드가 떡 하니 걸려있는 프로필 사진도 10년 넘게 그대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보지 않았지만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도 보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이 힘든 시대에 필요한 건, 어른들의 훈계와 독려가 아니라 진심 어린 '반성', 함께 나누고자 하는 '유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청춘이라는 너클볼러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픔을 극복하고 최고가 되라'는 성공의 독려인지, 아니면 조금 더 믿고 기회를 주고자 하는 신뢰와 유대일지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세상 모든 청춘들이 '퐈이어 볼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 릭키 스턴, 앤 선드버그감독의 다큐멘터리 '너클볼'과 김형준기자의 기사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2012년 8월 23일 목요일

트로트 유감에 유감이... 유감?







반론을 환영한다.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다. 옆엔 놈이 싼 똥을 보고 '그게 니 똥이다' 하면 끝날 것을 '니가 싸지른 똥 존나 굵다'고 하면 그때서부터 '분분한 시츄에이션'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한국 성인남성의 평균 똥 굵기 자료를 들이밀며 '정확히 평균에 0.5파이 부족한 평균 미달인, 죽어라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지친 가장을 대변하는 가늘디 가는 똥이다 씹세야'라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씨바야. 똥만 보지 말고 똥이 말린 모양을 좀 봐라. 그건 굵기로 치환될 수 없는 미적 가치를 지닌 토리야마 아키라의 이상에 완벽히 부합하는 예술작품이다'고도 할 것이고, '저는 그냥 똥이 굵어 굵다고 한 것인데, 굵을 똥을 보고 왜 똥이 굵냐고 물으시면… 이처럼 말할 수 있는 너야 말로 장금이 같은 필자로다'라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른다. 뭐 이렇게 한 사람이 싸질러 놓은 의견, 혹은 논리의 정리라는 것이 완벽할 수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없는 일. 게다가 일정주기로 공개적인 곳에 마치 숙변 싸질러 놓듯 글 질 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론, 반론 등은 필자의 글에 담긴 여백을 훼손, 아니 채워주는 두손들고 환영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뭐랄까 벌어진 내 모공이 꽈~왁 쪼여 드는 느낌. 예의상 시작한 서론치고는 말이 길었다. 간만에 똥 얘기나 함 하고 싶었던 거다.


트로트에 대한 유감의 심정을 써 갈긴 글이 마빡에 오르는 영광의 희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춘심애비에게 이런 멘션이 날라들었더랬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누가 말했던가. 누가 이 청년에게 건강하지 않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 청년이 술자리에서 쉼 없이 피워대는 담배는 너무나 건강한 육체 탓에 자칫 고리타분해질 수 있을지 모를 자신의 인생을 개선하기 위한 일종의 노력(육체의 다운그레이드)인 것이다. 멘션을 보라. 정중히 '반론제기'의 윤허를 문의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필자, 머릿속에 '돌직구'와 'ㅋㅋ'의 의미가 중첩되믄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필자 고민했다. '쓰지 말어. 두번 쓰지 말어'하고 말까. 아님 '제 뒤통수는 님을 위한 것. 날 가져요'라고 대인의 정취를 공유하여 볼까 싶기도 했다. 허나 본 필자. '너클볼러'라는 베이스볼틱한 닉을 괜히 들고 다니는 게 아닌 바, 아래와 같은 멘션을 날렸더랬다.




보론과 반론의 여지가 존나 많은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속으로 '그런데 왜 니가 쓸려고 그러니'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대인봬. 게다가 공개적인 트위터 멘션이니 당연 더욱 '대인봬'임을 뽐낼 수 밖에… 하지만 대인봬놀이가 채 무르익기도 전에 게임은 이렇게 끝났다.




돌직구는 언제나 환영이라고, 하지만 힛 바이 피치 볼은 '마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 강조했건만. 이거슨 그냥 힛 바이 피치 볼이 아니었다. 게다가 '너클볼러에게 날리는 힛 바이 피치 볼'이란 부제는 내가 날린 멘션에 기인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하라'는 포청천 문체까지 구사하다니… 그렇다 춘심애비는 과거 샌디쿠팩스와 함께 다저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미스터 헤드 헌터 돈 드라이스데일과 같은 캐릭이었던 거시다. 알다시피 돈 드라이스데일은 나름 한 제구력 하는 선수, 그런 그의 힛 바이 피치 볼의 특징은 바로 '고의'라는 데 있다. 오죽하면 유격수 딕 그로트가 '드라이스데일을 상대하는 건 치과의사와 데이트하는 것과 똑같다'는 농담을 했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멘션 보내고 두 시간 만에 힛 바이 피치 볼을 완성하다니.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춘심애비에게 하나만 묻자. '두 시간 만에 쓴 거시 사실인가?'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모든 걸 사전의 모의하고 마치 내 의사를 묻는 척 쇼를 한 것에 대해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춘심애비의 반론이 머리를 노린 돌직구라면 춘심애비의 반론에 대한 나의 반론은 2003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뉴욕 양키스의 코치 돈 짐머에게 시전했던 '패대기' 되겠다. (참고로 난 춘심애비보다 나이가 많으니 윤리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럼 춘심애비. 거기 고대로 있어봐봐…





트로트라는 장르.

일단 '트로트 유감'은 트로트라는 장르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자 끄적거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재료가 트로트라는 점,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예로 들었다는 점, 그리고 컨트리와 트로트를 전통적인 장르로 등치시켜 설명한 몇가지 점들에 대해서는 살짝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컨트리는 전통, 트로트는 일제 산물.

트로트는 일제시대 유입된 엔카의해 정립된 것이 맞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신민요와 엔카의 교배의 결과물이 트로트.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엔카의 우성을 결정해버렸다. 결국 엔카와 가장 흡사한 장르가 이미자, 남진, 나훈아등의 슈퍼스타의 등장으로 국민장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제의 잔재라 쉽게 치부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렇게 따지면 컨트리 역시 미국에 정착한 빈곤층들이 자신들의 고향인 유럽에서 불렀던 것들을 부르기 시작, 다양한 유럽의 하층민 정서가 짬봉되믄서 시작된 것. 락앤롤역시 백인들이 지들 장르라 그리 떠들지만 재즈, 컨트리, 무엇보다 흑인민요 블루스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이런 것을 볼 때 트로트 역시 (일제의 의해 강요 주입된 시기를 제외하더라도) 전통적인 한 장르로 보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겠다.


'낭만에 대하여'?

 '트로트의 가능성'

필자는 분명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 말은 트로트를 포함한 2가지 이상의 장르가 접붙이기(grafting) 되었다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대목(rootstock 영양분을 공급하는 바탕나무)이 트로트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트로트가 다른 장르와 붙으면서 어떠한 결과물이 나왔느냐를 보자는 것이다. American Idiot으로 슈퍼밴드가 된 그린 데이의 음악을 펑크로 보던, 혹은 보다 넓은 모던 롹으로 보던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뭐 애초의 주제가 낭만에 대하여가 트로트인가, 아닌가였다면 가장 중요한 주제일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트로트유감'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일단 장르에 대한 얘긴 이 정도로만 하자. 게다가 트로트에 대한 장르논쟁은 이미 한참 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마빈 게이.

1959년에 설립된 모타운 레코드는 흑인음악의 성지와도 같다. 소울은 모타운에 의해, 그러니까 모타운이 뮤지션을 발굴하여 발매한 수많은 앨범들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흑인 음악의 대부로 불리우는 마빈 게이 역시 모타운 출신이다. 마빈 게이의 모타운 생활은 드럼 세션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모타운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순식간에 모타운이 미는 신인이 되어버렸다. 베리 고디의 누이 안나는 마빈 게이보다 무려 18살이나 더 많았다. 이렇게 그는 모타운을 대표하는 아이돌이 되어버렸다. 데뷔곡 역시 아이돌에 어울리는 빠른 댄스곡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유행하던 댄스곡이 아닌 자신의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자신의 생각대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음반 제작에 대한 모든 권한은 마빈 게이 꺼'라는 모타운의 확답을 얻는데 정확히 2년 걸렸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해 온 결과물을 내놓게 되는데 그게 바로 마빈 게이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앨범 'What's Going On'이다.


 
게이가 아니라 마빈 게이


필자는 '낭만에 대하여'나 '갈대의 순정'이 존나 멋있는 트로트라는 것, 대성의 '대박이야'와 '날봐 귀순'이 가벼워 보인다는 의견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모든 트로트가 '낭만에 대하여'나 '갈대의 순정'과 같은 '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다. 굳이 마빈 게이의 예를 꺼내든 이유도 바로 그것 이다. 마빈 게이와 같은 아이돌도 필요하지만 모든 아이돌이 모두 마빈 게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장르던 같은 장르 안에서 패턴이던 한쪽으로 과하게 편중되면 재미없다. 필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대중은 다양한 요구와는 무관하게 가벼운 패턴들로 편중되는 일종의 경향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뿌리깊은 경향이 현재는 더 심해졌다는 것이고…


90년대, 침체기를 맞은 트로트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곡들 중엔 영턱스 클럽의 '정'과 김혜연의 '서울 대전 대구 부산'등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춘심애비의 말처럼 '대중들이 원하는=인기를 얻은' 곡들이다. 동시에 '낭만에 대하여' ''서울탱고' '내 마음 별과 같이' '애모' '립스틱 짙게 바르고'등의 다양한 패턴들의 트로트 곡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중의 요구로만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나마 지금보다는 다양한 곡들이 소개될 수 있었던 환경을 덧대야만 가능해진다.


1993년. 이때 가요계는 서태지, 김건모, 신승훈. 이렇게 세 명의 이름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 해 이 세 명의 스타와 '다이다이'를 했던 가수가 있었으니. 그 가수는 다름아닌 김수희였다. 김수희의 애모는 3년 전인 1990년에 발표되었던 앨범 '서울여자'의 수록곡 이었다. 하지만 애모는 대중들과 만나지 못했다. 언론과 방송은 음반사에서는 미는 일부 타이틀곡만 내보내는 관행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곡가 유영건이 우연히 기자에게 소개한 애모가 기사화된 후 노래가 소개되면서 3년 후 폭풍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1993년 대학가요제를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대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트로트 1위에 선정되었다. 소개도 되지 못해 3년이나 묵혔던 곡의 성공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의 대단한 성공이었다.


'애모'의 케이스는 대중의 취향과 구조(공급자에서 수요자인 대중에 이르기까지)의 통로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필자가 가볍다고 말한 트로트의 일련의 경향들을 대중들의 요구에 의한 결과라고만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0~20년 뒤 박상철의 '무조건'을 흥얼거리는 사람이 있겠지. 

내가 말한 가벼움에 누군가는 동의할 것이고, 누군가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가벼움이라는 표현은 좋음과 나쁨으로 치환될 수 없다. 누군가에게 가벼움은 현실의 버거움을 잊게 해주는 청량제일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현실의 진중함을 무시하는 개그일수도 있듯이 말이다. 더욱이 음악을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도 없다. 가벼움에 매몰되는 일종의 경향에 대한 비판이었지, 가벼움 자체에 대한 지적이 아니었단 것이다.


춘심애비는 내게 물었다. '낭만에 대하여'를 최백호가 아닌 장윤정이 불렀어도 그렇게 감동했겠느냐고. 같은 결과물을 다른 사람이 부르는데 어떻게 감동이 같을 수 있겠는가. 세르지오 멘데스의 Mas Que Nada를 윌 아이 엠이 존나 멋진 스타일로 불렀어도, 돈 헨리의 The Heart Of Matter를 인디아 아리가 존나 구슬프게 불렀어도,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After The Love Has Gone을 브라이언 맥나잇이 존나 멋지게 불렀어도 느낌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더 좋거나, 더 나쁘거나. 아마 장윤정이 부른 '낭만에 대하여'도 둘 중 하나이겠다. 수수한 차림의 장윤정의 의자에 걸터 앉자 기타반주에 맞춰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암튼.


헌데 지금의 구조라면 장윤정이 설사 '낭만에 대하여'라는 곡을 받았더라도 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설사 존나 밀었더라도 대중에게 소개되지 못할 확률이 높다. 게다가 십 수년 전 '애모'의 작곡가 유영건이 썼던 방법이 지금 통할 확률은 극히 낮아 보인다는 것이다. 이 구조를 뚫고 일개 가수가, 소형기획사가 시장을 개척해 대중을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빅뱅의 대성을 예를 든 건 바로 그 지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트로트라는 장르에 대한 논쟁을 할거라면 대성과 GD의 이벤트를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지상파 메인 프로에 등장하는 장윤정, 윙크, 박현빈과 같은 트로트 가수들이 '등장'을 위해 가능한 곡들을 만들어(이걸 창작의 노력과 결부할 수는 없다) 들고 나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대성(+GD)은 그 지점에서 보다 자유롭다 보았기 때문이었다. 싱글로 발표한 두 곡 중 한 곡 정도는 마이너풍의 정통 트로트 비스무리하게 갔었어도, GD+대성이라면 충분히 대중에게 소개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방송에서 볼 수 있는 윙크.


춘심애비가 말했듯이 10-20년 뒤에 박상철의 무조건을 흥얼거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흥얼거린다. 장윤정의 노래도, 박현빈의 노래도 가끔 흥얼거린다. 누군가는 윙크의 노래도, LPG의 노래도, 허경환의 노래도 흥얼거릴지 모른다. 하지만 10-20년 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장르로 전락 할 수도 있다. 동네 빵집이 이렇게 다들 쫓겨날지 누가 예상했겠는가. 장르가 가지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트로트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장르다. 필자가 가볍다고 칭한 곡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트로트가 무슨 월드 와이드 장르가 되어야 한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취향이라는 이름 아래 무시되는 또 다른 대중의 취향에 대해, 그로 인해 점점 외소 해져가는 장르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딱 그것이었다.




패대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이 글이 초장에 밝힌 원대한 '패대기'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애초에 이 글은 춘심애비의 반론에 대한 약간의 반론+'트로트유감'에 대한 보론의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실 현재 필자의 분노게이지는 평상시 평균치를 상회하고 있다. 춘심애비의 반론 때문이 아니라 반론을 쓰는 것보다, 반론의 반론을 쓰는게 더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한 춘심애비의 의도(?)가 괘씸해 보였기 때문이다. 눈에서는 불이 나오는데 글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두 시간 만에 써재낀 반론에 반론을 쓰는데 열 시간이 걸리는 꼴이다. 아오 빡쳐.


춘심애비가 그토록 강조하는 대중의 취향이라는 것이, 시대의 반영이라는 것이 지금의 구조상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트로트를 개그로 대하는 일부의 경향과 태도에 대한 의견이 어떻게 일방적 폄하로, 창작자들의 진지한 노력에 대한 무시로, 더욱이 메달을 따지 못하는 선수들에게 대한 편협한 시선으로까지 이어지다니… 슬프지 아니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게다가… 내 취향을 올드 하다고까지 하다니…


하지만 내 모든 분노가 누그러 들었으니, 그 이유는 바로 마지막 짤방 때문이었다. 그 짤방은 춘심애비가 넣은 것이 아니다. 동영상만 7개가 들어간 필자의 글에 대한 반론이라 올린 춘심애비의 최초 글엔 그 흔한 짤방 하나 삽입되어 있지 않은 무성의한 형태의 것이었다. 모든 짤방은 편집부가 넣은 것이다. 고자질이 아니고, 뭐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고 보니 최초의 글이 좀 모양새를 갖춘 꼴이 되었다. 내게 최초의 성의 있는(?) 반론을 제기한 춘심애비에게 쪼금… 아주 쪼금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렇다고 짤방으로 인해 누그러진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만간 오프에서 '올드한 취향의 중년'이 시전하는 패대기를 맛 뵈줄 테다.


그러니 춘심애비는 들어라.


나는 외롭지 않다.





존나…



2012년 8월 14일 화요일

트로트 유감.




컨트리.


Edens Edge


요즘 난 이노래만 듣는다. 아이폰으로 듣고, 집에서 노트북으로 듣고, CD 돌리기도 하고, 어디갈 땐 차에서도 듣는다. 진짜 이 노래만 듣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못해도 백번은 들은 것 같다. 뻥 아니다. 진짜다.




Edens Edge의 Amen.



한장의 EP에 이어 데뷔앨범을 발표한 Edens Edge의 Amen은 전통적인 컨트리의 센스있는 팝튠화의 모범답안을 보여준다. 게다가 메인 보컬 Hannah Blaylock의 목소리는 컨트리와 팝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균형과 매력을 마구 뽐내고 있다. 아으 멋쪄... 국내 라이센스 발매는 안될 것으로 예상되며 (컨트리 앨범은 왠만큼 대박을 터뜨리지 않고서는 발매되지 않는다) 아직 음원사이트에도 등록되지 않았음으로 유튜브나, 아이튠즈를 통해 보고 듣는 수밖에는 없다. 시간되시는 분들은 우리집와서 들으셔도 되고...


컨트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Rock, Pop과의 유기적인 이종교배를 통한 대중화를 시도해왔다. 사실 컨트리는 이미 아뭬리칸들에겐 전통적인 인기 장르다. 갈스 브룩스같은 경우 앨범을 냈다하면 차트를 휩쓸기도 했고, 마일리 사일러스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빌리 레이 사이러스도 Achy Breaky Heart란 곡으로 가볍게 챠트 2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암튼 뭐 늘 인기있어왔던 장르다.


그러나. 그들만의 전통적인 '장르'는 그들의 영역밖에서는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자국의 챠트에선 늘 화려한 주목을 받아왔지만, 타국에서 철저히 외면받는 로컬 장르였다. 하지만 지금의 컨트리는 '전통'이 지닌 영역의 한계를 확실히 무너뜨린 것으로 보인다.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젊은 처자가 그래미를 휩쓰는 장면이 다소 어색하고 오바스럽게 보였을지 몰라도 컨트리는 다른 장르와의 세련된 조우를 통해 그들만의 리그 밖에서도 환호받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 선두에는 딕시 칙스, 테일러 스위프트, 레이디 앤터벨룸, 잭브라운 밴드 등이 있고, 에덴스 에지같은 후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제 비로소 컨트리는 월드 메인스트림 장르가 된 것이다. 더이상 컨트리는 네쉬빌같은 이름도 생소한 동네에서 수염기른 터프한 오리지널 양키 꼰대가 기타치고 노래부르며 지들끼리만 신난, 그들만의 장르가 아닌 것이다.


딕시 칙스 'Wide Open Spaces'


테일러 스위프트 'Love Story'



레이디 앤터벨룸 'Need You Now'


잭 브라운 밴드 'Chicken Fried'




다들 전통적인 컨트리 장르를 기반으로 해 약간씩 다른 음악들을 선보이고 있지만 모두 로컬을 넘어서는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다. 결국 가뜩이나 오만방자한 문화적 지배력 쩌는 아뭬리칸인데 신날 일이 하나 더 생긴거다. 아.. 부러버라.


트로트.

쿵짝, 쿵짝, 쿵짜짝 쿵짝.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추억도 있고, 눈물도 있는... 바로 트로트다. 이런 애절하고, 대중친화적인 우리의 장르 트로트는 로컬 중의 로컬, 로컬의 갑의 위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들어보자. 우린 이 곡을 통해 장르가 가지고 있는 서정성과 대중적인 멜로디, 고급스런 편곡등 트로트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헌데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 아닌 TV가요프로나, 밤업소 용으로 편곡된 곡들만이 쏟아져나와버렸다. 가사도, 멜로디도 편곡도 모두 그랬다.그로인해 몇년동안 트로트는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장르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트로트는 관광 버스에서 틀어놓고 몸을 흔들어대기 위한 장르로 전락해버렸다.





빅뱅의 지드래곤이 만들고 대성이 부른 몇곡을 봐도 그렇다. '대박이야'. '날 봐 귀순'에서 어떤 진지함 같은 게 느껴지나. 감정의 구구절절함. 구성진 멜로디 뭐 이런 거 있나. 없다. 물론 트로트라는 장르 전체가 모두 그럴필요는 없다. 문제는 모두 가볍고 우스꽝스러워져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귀여운 대성이가



이렇게 웃긴 대성이가 된다.



술에 잔뜩취해 들어오신 아버지는 '갈대의 순정'을 곧잘 부르시곤 했다.  들을 때 마다 잘은 몰라도 일종의 '남자의 숙명' 같은데 느껴지곤 했고, 술 취한 목소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트로트는 그렇게 멋드러진 장르였다. 생각해보면 우연히 남행열차를 타고다가 '남행열차'를 나지막이 따라부르며 빗물도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를 것 같기도 한 뭐 그런게 트로트 아니겠나 싶다. 암튼 마냥 몸만 흔들어대는 그런 장르가 아닌데, 죄다 그러고만 있다. 장르에 대한 진정한 고민보다는 장사꾼들의 상술만이 장르에 덧씌여있다. 이러다 돈이 안된다 싶으면, 장사가 안된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죄다 사라질 것이다.

트로트는 존나 멋진 장르다. 앞서 언급한 곡들 외에 내가 모르는 존나 멋진 곡들이 분명히 더 많이 있을게다. 하지만 멋진 트로트 곡들이 있다해도, 혹은 만들어진다해도 대중들이 쉽게 접하지 못한다는 시장의 한계도 있다. TV와 라디오는 늘 보여주고 들려준 것만 수없이 반복할 것이다. 대중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책무, 다양한 장르의 공존을 위한 미디어의 역할 이런 건 개나 줘 버린지 오래다. 생산자와 미디어의 요구가 명확해지면 비로소 동업자가 되믄서 일종의 파트너쉽이 체결된다. 이 파트너쉽이 아이돌위주의 공산품음악들이 쏟아지게 한, 철저하게 상품화된 곡들이 쏟아짐으로 인해 유통자, 대량생산이 가능한 대형기획사만 돈을 벌게하는 기형적인 시장을 형성케한 원인이다. 안타깝게도 이 바닥엔 그 파트너쉽만이 만개한 듯 하다. 좋은 곡들이 만들어지고, 대중들에게 쉽게 제공, 공급되며, 그것이 대중들의 만족, 수요로 이뤄지는 이런 판으로 전환 되어야 하는 것인데… 참으로 멀고 험난해 보인다. 40곡에 5천원이 뭐냐. 노래 한 곡당 150원도 안되는게 말이 되냐. 누가 음반을 사냐. 음반은 또 누가 만들고. 합리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내가 나이를 먹으믄 먹을수록 트로트를 찾는 이들은 줄어들거다. 그러니 제발 트로트를 이제 좀 진지하게 대해줬음 좋겠다. 멋지고, 슬프고, 신나고, 때론 섹쉬하기까지한 트로트에게 유감스러워야 되겠나. 트로트가 무슨 개그냔 말이다.
이런 날씨에, 게다가 비라도 내리는 날에 '낭만에 대하여' 가 어딘가에서 내 귀구녕을 파고든다고 생각해 봐라. 끊은 술도 다시보게 되고, 끊은 담배도 다시 물고 뿌연 하늘 바라보며 진하게 한모금 빨고 싶어진다. 이제라도 트로트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이고, 즐거운 장르로 다가갔음 싶다. 오늘 집에 아내도 없는데 부침개나 부쳐 술 한잔 먹으면서, 아버지 생각하며 '갈대의 순정'이나 함 흥얼거려 볼까 싶다. 가사가 다 생각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박일남 '갈대의 순정'

간만에 찾게된 '갈대의 순정'을 앞으로 자주 듣게 될 듯 하다. 아니 백번은 듣게 될 것 같다.





2012년 7월 31일 화요일

[들은 척 매뉴얼 번외편] 싫으면 그만.



12.07.31 딴지일보 링크




하도 어이가 없어 스핀오프(편집자 주 : 기존의 작품에서 파생된 작품)를 써요. 스핀오프라 말투도 바꾼 거에요. 하긴 생각해보면 어제 오늘 일도 아니에요. 얼마 전 걸그룹의 어떤 친구는 이제 연애 금지 풀렸다고 막 좋아 하더라구요. 연애를 금지 시킨 데요. 그게 말이 돼요. 두발도 단속하고, 치마도 못 입게 하지 그래요. 속으로 '그래, 풀렸으니 앞으로 많이 해라. 남들 한번 할 거 두 번하고, 두 번할 거, 세 번 해라'. 그랬지요. 근데 어제 제대로 터졌어요. 주인공은 티아라 화영이란 친구죠. 며칠 전부터 얘기가 있었나 봐요. 전 그 친구 이름이 화영인지도 어제 알았어요.




기사를 보아하니 화영이란 친구가 팀에서 문제가 되고 있고, 이유는 왕따를 당하거나, 아님 어울리지 못할 만큼 철부지 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였지요. 그러다가 어제 그 긴장이 폭발한 거에요. 뭐 그동안 계속 쌓여온 문제였을 거에요. 관심이 집중되니 며칠간 얘기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지요.

  
결국 어제 소속사 사장님이 중대 발표하신다고 예고(뭘 별게 다 중대발표에요) 하시더니, 그 중대발표라는 건 결국 화영이란 친구의 방출이라고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지요. 뭐 분위기를 봐서는 화영이가 직접 사장에게 FA를 신청한 것 같지 않아요. 일방적 방출인 거죠. 왕따냐. 철부지냐의 확인을 떠나 파장이 순식간에 커졌어요. 발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장님이 인터뷰을 하셨거든요. 인터뷰 전문은 여기서 함 보시구요.(기사 링크)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석줄 요약
  • (화영이에 대해) 다 밝힐 수는 없다.
  • 팀을 운영하면서 스태프들이 너무나 힘들어했다. 울면서 그만두겠다는 매니저가 여럿 있었다.
  • 논란이 되지 않도록 (화영이가) 조용히 있어주길 바란다.

  
요약하면 '화영이만 나쁜 년'이 되는 거에요. 이거 졸라 흔치 않은 경우에요. 방출하는 경우 방출 당하는 당사자를 욕하는 경우 별로 없거든요. 이유가 어떤 것이든 방출은 당사자에게 치명적인 거에요. 헤어지는 게 아닌 쫓겨나는 거거든요. 그래서 대개 좋은 말을 해줘요.

  
제이슨 지암비 아시죠. 오클랜드에서 스타가 된 뒤에 뉴욕에서 단물 쪽 빠지고, 게다가 약물 스캔들까지 터진 뒤에 몇 개 팀을 거쳐 다시 친정팀 오클랜드에 돌아왔는데, 결국 방출 당했어요. 그때 슈퍼 단장인 빌리 빈의 코멘트는 뭐 이런 거였어요. '지암비가 그리워질 것이다'. 대게 이런 식이에요. 근데 말이죠. 사장님께서는 함께했던 이십 대 중반인 친구에게 '나쁜 년' 드립을 시전해 버린 거에요. 그것도 쫓아내믄서…

  
왜 그랬을까요. 화영이란 친구가 왕따였든, 철부지였든 사장님이 그렇게 할 게 아니거든요. 싫으면 그만이지 왜 그러냐구요. 직장인들 가끔 하는 말 있잖아요. '지가 사장이믄 다야' 뭐 이런 거. 이거 암튼 유독 우리만 그래요. 당사자들은 말이 없어요. 좋든 싫은 당사자가 결정할 문제이지요.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싫으면 그만인 거에요. 다들 그렇잖아요.

  
제가 연재하고 있는 들은 척 매뉴얼 '사랑과 전쟁(링크)'편은 말 그대로 여럿이 모인 밴드 혹은 팀의 사랑과 전쟁을 다룬 것이었어요. 사이 좋은 '사랑' 하는 밴드는 U2 한 팀만 들었구요. 치고 받고 헤어진 팀으로는 '이글스'와 사이먼 앤 가펑클'. '아바' 그리고 '오아시스' 이렇게 네 팀을 들었죠. 그래요. 1:4라는 비율이 말해주는 건, 사실 멤버들끼리 지지고 볶은 일화들이 존나게 많다는 거. 바로 그거에요. 헌데 그나마 그 중 제가 참 사이 좋은 팀으로 예를 들은 U2에 대해 '문밖의 늑대'님께서 이런 리플을 달아주셨어요.

  
유투에 대해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멤버 교체가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심각한 불화가 없었던 건 말도 안돼요.
90년대 초중반에 서로 주먹질하고 싸우고 거의 해체수순까지 갔었던 적도 있구요.
나름 그런 서로간의 갈등이 음악적으로 많은 성장을 해 주게 되었는데…
부부도 살아가면서 심심치 않게 싸우고 이혼 직전까지 가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사람 살아가는데 불화가 없다라고 말하는 건 좀 너무 미화시키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거기다 골수팬인 저로써는, 이제는 나오는 앨범들이 뭔가 음악적으로 아쉬운 면이 많아서 좀 안타깝네요. 

  
확인은 해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일리가 있었거든요.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 그러니깐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들은 극히 일부일 거에요. 제가 얼마 전에 어딜 좀 갔다 왔어요. 일행이 한분 계셨는데요. 잘 아는 친한 분이었어요. 딱 3일 같이 있었는데요. 제가 막 짜증을 내고, 그 분이 막 불편해하고 그랬더랬죠.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심각한 이유가 '코를 고는' 것이었어요. 저는 누가 코를 심하게 골면 못 자 거든요. 잠을 못 자니 아침에 예민해지고, 짜증이 나고 그런 거지요. 만약에 그분이랑 저랑 이제 막 시작한 듀엣이고, 인지도가 없어 한 숙소, 한 방에서 먹고 자는 처지였다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저는 '졸라 못해먹겠다'고 뛰쳐 나갔을지 몰라요. 아니 그분이 먼저 탈퇴했을지 모르죠. '이렇게 예민한 새끼랑 드러워서 같이 못 있겠다'고 말이에요.

  
다행히 갔다 와서 서로 막 '너 때문이라고' 하믄서 잘 풀리긴 했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와 같이 붙어 산다는 거, 이거 존나 힘든 거구나, 배려라는 단어가 그리 만만한 게 아니구나. 한마디로 득도(생각만)를 해버린 거죠.

  
근데 티아라 이 친구들은 말이죠. 09년에 6명으로 시작해서, 10년에 화영이가 합류해 지금까지 무려 7명의 어린 이십 대 초반의 친구들이 3-4년을 같이 지내왔어요. 잘 나가는 친구도 있고, 욕 들어 묵는 친구도 있고, 예쁘다 소릴 듣는 친구도 있고, 아닌 친구도 있었겠지요. 그 상황에서 아무일 없는 게, 그게 웃긴 거에요.

  
저는 만날 TV 어린 친구들 너 댓 명이 나와 서로 위로만 하는 모습을 보면 좀 무섭거든요.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저게 아닐 텐데' 하는 거죠. 근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말이죠. U2가 좀 멀게 느껴지나요. 그럼 아이돌 그룹 예를 함 보죠.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은 있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다' - 게리 발로우

  
  
  
'로비는 더 많은 걸 하고 싶어했고, 더 큰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 - 제이슨 오렌지

  
유명했던 영국의 보이 밴드 테이크댓이 5년 여간의 활동을 접고 해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막내 로비 윌리엄스 때문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화영이도 막내에요).

  
  
  
'난 이 팀에서 백댄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몇 년이 걸렸다. 난 게리의 백댄서로 사인했던 게 아니다'   - 로비 윌리암스

  
사실 테이크댓의 프론트맨은 게리 발로우 였어요. 노래도 막 지가 만들고, 대부분의 곡들에서 리드보컬도 지가 맡았지요. 누가 뭐래도 메인은 게리 발로우였어요. 대부분의 멤버들은 그 사실을 인정했지만 막내 로비 윌리암스는 점점 그게 싫었던 거에요.

  
불화가 시작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팀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팀 불화에 대해 기사를 부인하고 그랬지요. 하지만 로비 윌리암스의 욕망은 가라앉지 않았어요. 술을 존나게 마시고. 여자들을 막 만나고, 게다가 약까지 막 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은 빨리 끝내고 싶은데 팀은 어떻게는 유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결국 더티한 항명을 선택한 것이었지요.

  
투어 중간에 로비 윌리암스는 약물, 알콜 과다 복용으로 막 응급실에 실려가고 그랬어요. 이렇게 되니 결국 나머지 멤버들도 로비 윌리암스를 보내주기로 했어요. 투어 중간이었지만 4인조로 투어를 마무리하기로 결정, 로비 윌리암스의 탈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지요.

  
테이크댓은 로비 윌리암스가 없는 상태로 투어를 마무리했지요. 팀으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지요. 수많은 티켓이 취소될 수도, 그로 인해 투어가 휘청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헌데 로비 윌리암스는 팀에서 빠져 나와서도 팀을 막 욕하고 그랬죠. 결국 로비 윌리암스는 솔로를 시작했고, 테이크댓은 오래가지 못하고 해체되었죠. 멤버들이 선택한 일이었어요. 갑자기 소속사 사장님이 등장해서 성명서를 낭독하거나, 갑자기 부모님이 나와서 중재하고 뭐 그런 건 없었구요.

  
 
  
스파이스걸스라는 영국 걸그룹도 그랬지요. 여성 5인조였는데요. 이 팀은 늘 멤버들 간의 불화설이 있었지요. 여성간의 불화 하니까 생각나는 팀이 있지요. 맞아요. 아바에요. 오죽하면 남자멤버인 남편들이 나서서 중재를 했을까요.

  
물론 결국 깨졌지요. 스파이스걸스는 허구 한날 다퉜다고 해요. 개성이 강한 멤버들이 모였으니 당연한 것이라고들 했지요. 맞아요. 당연한 거죠. 특히 문제가 된 건 게리 할리웰과 멜라니 브라운간의 주도권 싸움이었죠. 원래 리더는 게리 할리웰이었는데, 멜라니 브라운에게로 넘어가게 되었거든요. 그러믄서 다투는 일이 많아졌고, 게리 할리웰은 '에이 조또'하고 팀을 떠났지요.

  
이 때도 전미투어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게리 할리웰 부분을 다 들어내고, 들어낸 부분을 나머지 멤버가 나누어 투어를 진행하고, 새 앨범도 발표했지만 결국 얼마 가지 않아 팀은 깨지고 말아요.

  
헌데 그렇게 각자 지내다가 재결합을 하더니 재결합 투어도 펼쳤어요. 더구나 지금 진행중인 2012 올림픽 폐막식에서도 공연을 한다고 해요. 불화가 있었고, 불화를 인정하고, 개판으로 헤어지고, 다시 만난 거죠. 이상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나요. 역시 사장님. 엄마, 아빠는 등장하지 않았어요. 빅토리아의 남편 데이빗 베컴 만 종종 언급되긴 했죠. 워낙 유명해서…

  
물론 스파이스걸스처럼 불화로 깨진 경우가 있는 반면, TLC처럼 레프트 아이(가장 개성있는 멤버)로 인해 불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해체되지 않은 경우도 있지요. (레프트 아이의 사망으로 팀이 깨지긴 했지만). 오아시스의 겔러거 형제처럼 총만 안 들었다 뿐이지 서로 죽이겠다 지랄인 형제가 있는 반면 ACDC의 영 브러더스(앵거스 영, 말콤 영)처럼 오랜 기간 변치 않고 찰싹 붙어 있는 경우도 있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앵거스 영의 트레이드마크인 교복 유니폼은 누나 마거릿 영이 만들어 준 것이지요. 레드제플린처럼 드러머(존 본햄)가 세상을 떠나자 팀을 해체해버린 경우도 있지만, 어벤지드 세븐폴드처럼 드러머(더 레브)가 사망하자 평소 드러머가 존경하던 드러머(전드림씨어터, 마이크 포트노이)를 영입해 앨범을 만들기도 했지요. 이건 다 그들, 멤버들의 선택이었어요. 제작사, 에이전시, 주변지인과의 상의나 조언 등은 있었겠지요. 하지만 결정은 그들의 몫이었죠.

  
티아라라는 어린 7명의 친구들은 어느덧 4년을 지냈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냐는 거죠. 당사자만 입 틀어 막고 감출 게 아니라는 거죠. 친구들끼리 사이가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죠. 안 맞아서 헤어질 수도 있는 거에요. 애초 시작도 마음에 들어서 팀을 만든 게 아니잖아요. 사장님이 꽂아서 된 거지. 어디 사장님이 그뿐이었나요. 팀이 좀 나태해 진 것 같다면서 새로운 멤버를 투입하겠다고 하고 그랬죠. 무한경쟁인 거에요. 문득 사장님은 어떻게 경쟁하고 계신지 궁금해 지네요.

  
어제 화영이는 마지막으로 '진실없는 사실'이란 트윗을 날렸어요.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사실인데 진실은 아니다. 이거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론을 통해 나오는 얘기들은 대부분 '구라다'는 일종의 호소겠지요. 사장님께서 인터뷰에서 조용히 있으라고 했으니 더 이상의 말을 하기 어려울 거에요. 결국 화영이도 남아있는 친구들도 뭐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고 있어요. 싫으면 마는 건데 그걸 말을 못하는 거에요.

  
마치 사태에 대한 발언권은 사장님에게만 있는 듯한 이런 구조는 옳지 못해요. 이러다 또 부모님들 등장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부모님 등장하면 또 당사자인 친구들은 오만상을 쓰고 앉자 눈물을 흘리겠지요. 정말 안타까워요. 내 눈에 보이는 아리따운 친구들이 그 친구들 자신인지, 아님 부모의 기대만 투영된 허상인지, 사장의 욕망에 저당 잡힌 껍데기인지 말이죠. 왜 그렇게 어린 친구들을 볼모로 잡는지 모르겠어요.

  
존 메이어가 음악 시작할 때 돈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돈을 좀 달라고 했대요. 아버지는 때마침 돈이 좀 있었는지 돈을 건네면서 그랬다고 해요. '니가 이담에 잘 되면 이 도움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돈 받은 존 메이어는 얼마 후 대박이 났죠. 존 메이어는 음악도 잘하고, 연애도 잘하는 뮤지션이 되었구요. 가족 얘긴 언론에 거의 노출되지 않는 걸 봐서는 나름 잘들 살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 정도의 관심과 지원이면 좋을 것 같은데 가족이던, 소속사 사장이던 딱 그 정도만 개입하면 뭐 똥꼬에서 털이라도 올라오는가 봐요.

  
  
  
그래요. 존 메이어랑 티아라랑 비교하는 것이 웃기고 자빠라진 짓이라는 거 저도 알아요. 답답해서 그런 거에요. 사장님이 픽업해서 팀 만들고, 사람 붙여서 연습시키고, 성형도 시켜주고, 앨범도 내주고 하는데 들어간 본전 생각나는 거 이해해요. 그러니 예능에도 막 나가야 하고, 재능 있다 싶으면 연기 연습시켜서 드라마에도 내보내야 하죠. 아침에 일어나 TV하고, TV 끝나면 행사 가고, 행사 끝나면 인터뷰하고, 인터뷰 끝나면 행사하나 더하고, 행사하나 끝나면 연습하고, 연습 끝나면 칼잠 자고, 그렇게 새 아침이 밝겠죠.
  
  
  
그렇게 뛰댕기는데 멤버들간에 아무 일이 없다구요. 요즘 같은 날씨엔 가만히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는 데 말이에요. 예능 같은데 나와서 농담 투로 말하잖아요. '사장님이 누구누구만 예뻐한다고' 아 씨발. 같이 고생하는데 누군 주목 받고, 누군 떨거지고. 저라면 그러고 못살아요. 아우 슬퍼. 그러니 그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가, 그 친구들을 위한 건지, 듣는 사람을 위한 건지, 사장님을 위한 건지 당췌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화영이에 대한 상반된 의견 중 누구 말이 맞던지 언론의 뭇매를, 대중의 돌팔매를 맞을 일이 아니라 그 친구들이 사이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테이크댓에서 로비 윌리엄스의 -약물과 같은 비행은 좀 그렇고-, 게리 발로우를 넘어서고 싶다는 생각, 그 생각으로 인한 불화, 그거 이해가 된다는 거지요. 프로트맨을 백푸로 인정하고 가끔씩 들러리인 듯한 심정을 눌러가면서 불화 없이 팀에 남는다는 게 더 어려울 듯 하거든요. 젊은 친구들 데리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친구들이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안타깝구요. 어쩌면 말도 못 꺼낼 만큼 사회의 시선과 반응이 두려운 거라면 그것 역시 안타깝구요.

  
세상엔 영원한 거 없잖아요.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욕도 하고, 욕도 먹고 뭐 그런 거 잖아요. 뭐 때문에 말도 못하고 그러고 살아요. 본전 때문에 그렇게는 못 하겠다구요. 함 잘 따져보세요. 그 친구들 이미 본전 뽑고도 남았을 테니까요. 사장님은 (화영이 본인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있으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 친구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당사자들 스스로의 말이 아닌가 싶어요. 그 말이 욕이 되었던 위로가 되었던 말이지요.

  
말 좀 하고 사는 거. 그게 참 어려운 시대이긴 한가 보네요.

  
세상만사 다 싫으면 그만인데 말이에요.
PLAY LIST
  1. Everythig Changes – Take that 
  2. Say You'll Be There – Spice Girls
  3. Damage – TLC
  4. Back In Black – AC/DC
  5. 5. Bo Peep Bo Peep – 티아라
추신1)

지금 제가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시간이 31일 오전 10시 30분인데요. 사장님께서 막 자신의 트위터에 '화영이 자신의 행위에 사과한다면 스태프, 티아라 멤버들과 함께 복귀를 논의할 수 있다'고 그것도 영문으로. 밝혔다고 하네요.(기사링크) 어벤져스가 해체해도 이 난리는 아닐 거에요.

  
추신2)

며칠 사장님들 욕만 한 것 같네요. 모든 사장님이 그런 건 아니지요. 좋은 사장님들 오해 마셔요.
  


  

2012년 7월 27일 금요일

철수 생각







1.

사실 생각은 아래의 사진 몇장으로부터 시작됐다.






 7월 20일. 콜로라도 오로라시의 한 극장에서 다크나이트 라이즈 상영 중에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12명이 목숨을 잃고, 59명이 다쳤다. 재앙이 벌어진 것이다. 수많은 팬들이 가장 기다렸던 작품이었고, 기대에 걸맞은 결과물로 관객을 맞을 준비를 하던 차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사건 직후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관은 집과 같은 소중한 곳이라는 내 생각이 이번 사건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 비극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며칠 뒤 피해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던 병원, 그리고 사망자 추모식 장소에서 팬들과 파파라치들에 찍힌 몇 장의 사진이 포함된 기사가 denverpost.com에 개제된다. 주인공은 바로 크리스천 베일과 그의 아내였다.


제작사의 말처럼 크리스천 베일과 아내의 개인적인 방문이었다. 조용히 찾아가 피해자들을 만나고, 그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 일과 관련해 크리스천 베일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이 기사를 접한 이들의 생각은 대부분 이러했다.




누군가는 크리스천 베일을 진짜 배트맨이라고도 했다



나는 크리스천 베일의 행동에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했을 뿐'이라는 그저 평범한 당위만이 느껴졌다. 그 외에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위의 답글이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그 때쯤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이름 석자가 있었다. 나쁜 일은 하지 않을 것만 같은 친구이자, 영희의 영원한 남자 친구. 철수, 바로 안철수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철수 생각'을 좀 했다.




2.

사실 난 안철수를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고, 그가 나온 프로그램 중 '무릎 팍 도사'와 '힐링 캠프'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나마 힐링 캠프는 다 보지도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오늘날의 안철수를 있게 한 백신 프로그램 V3도 쓰지 않는다. 알에서 막 약이 나오는 그걸 쓴다. 1-2년 사이 가장 주목 받는 유력인사였으나 오히려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려 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사실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그가 한때 잘나가는 CEO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CEO, 그러니까 소위 '사장'이라는 직업 군에 속해있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속해있는 기업(회사)의 사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눈치, 강요, 권위 뭐 이런 것들을 존나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게 나만 그런 건지 우리 함께 생각을 좀 해보자. 주변에 자기 회사 사장 좋아 죽겠다는 사람 본 적 있는가? 난 없다. '별 관심 없다'는 50%, '좀 싫다'가 25%, '존나 싫다'가 20%, '좋다'는 5%정도 될 것 같다. 아마 '별 관심 없다' 군도 술 한잔 하면서 살짝 구슬려보면 '좀 싫다' 거나 '존나 싫다'가 태반일거다. 아무튼 난 싫다. 전전 회사의 사장(전전 사장 이야기 '사장학개론' 링크)도 그랬고 전 회사의 사장도 그랬다.


전 회사 사장이 내건 슬로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뻔하디 뻔한 '고객 만족'이 아니고 '직원 만족'이었다. 사실 '직원 만족'은 구글의 기업이념을 이루는 핵심이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모토를 전 회사 사장은 입에 달고 다녔다. 솔직히 난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7년간을 일한 나의 퇴사 이유는 '이렇게 일하다가는 죽겠다'였다. 함께 일하는 팀원 중 누군가는 떠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회사와 사장을 믿고 열심히 해보자던 니가 먼저 튀는 게 어딨냐?'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 씨발 미안하다.'


안철수의 좋디 좋은 얼굴에서 내가 아는 사장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아는)사장들은 모두 안철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 '힘들어도 잘해봅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대부분 임원을 타고, 팀장을 타고 내려와 '죽어도 끝내라'로 내 앞에 도착한다. 생각해 봐라. 안철수가 임원들에게 그 특유에 착한 표정을 하고 앉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끝내야죠'라고 말한다고… 이후의 벌어지는 일들은 독자덜의 생각에 맡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사장'이라는 사람이 기업이라는 조직에 관계되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전 사장도 사실 퇴사하고 나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회사 안에서 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실제로 회사 밖의 누군가는 사장을 '선비'로 비유하기도 했다. 난 문득 우리 눈에 비친 안출수의 이미지가 바로 이거 일수도 않나 싶었다. 철저하게 무엇과도 연관되어 있지 않은 '개인 안철수' 말이다.


어쨌든 (내가 아는)사장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리고 직접 모시지는 않았지만 잘 아는 사장님 한 분 계시다. 이상하게 그분은 좋디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바로 이.명.박. 그분이 그렇다. 청와대가 아니라 회사다. 장관이 아니고 부하직원 혹은 따까리다. 안 들어도, 안 봐도 잘 굴러간다는 걸, 나 먹고 사는 데 별 탈 없다는 걸, 탈이 나도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몸으로 체득하는 순간. 위대한 '사장'은 탄생한다. 결제 서류에도 언제든 지울 수 있도록 연필로 사인을 했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내려오는 위대한 사장님. 우린 뭐 그런 이명박 사장님을 모셔왔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언급하기도 싫다.


'철수 생각'을 시작하고 난 뒤 돌아가는 형국을 보아하니, 정치권에서 여야를 가릴 것 없이 힐난하거나 경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의 거취와 상관없이 환호와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가 '사장'으로서 어떤 사람일지 경험해보지 못해 모르겠다. 전해 들은 바로는 그가 만든 회사도 빡세기로는 유명하다고만 알고 있다. 회사가 빡세다고 해서 비난할 이유는 없는 것이니깐.


계속되는 '철수 생각' 중에 꼴렸던 건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의 태도였다. 내 눈에 보이는 그의 태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필요한 것을 자신이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차분히 고민하고 있다는 딱 그 정도였다. 안철수는 보수가 총 집결하여 지지를 선언한 박근혜를 앞설 수 있는 대중적 지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지지가 확인되고, 권력의 냄새가 풍기고, 사람들이 들러붙고, 그 권력과 지지가 피부로 와 닿아 아드레날린이 존나 분비되는 순간에도 그는 똑같은 표정, 똑같은 태도를 하고 있었다.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음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새누리당 의원 하나는 '어린 왕자의 얼굴을 한 기회주의자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뭐 기회주의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기분 나쁘게 보일 수도 있겠다. 확실한 건 안철수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구 꿈?



대선이 눈앞에 서서히 다가오면서 여야를 대표하는 대선 주자들은 경쟁하듯 출정을 선포하고 슬로건을 뽑아 돌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군사 쿠데타에 대해 당연한 선택이라 귀결해버린 장한 딸 박근혜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다. 내 꿈? 아니 너 꿈? 아니 박정희의 꿈? 내 꿈이 뭔지는 들어보지도 않으면서 꿈을 이뤄주겠단다. 고객 게시판이 Q&A가 아닌 A&Q인 꼴이다. 그래. 황당하긴 해도 신선하다.


하지만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다'는 슬로건도 멀게만 느껴지고,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이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는 것 같긴 한데, 그 역시 별 감흥이 없다. 그러니 오히려 대중들은 그 흔한 슬로건 하나 없는 안철수에 환호한다. 쇼 프로에 등장한 안철수는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어지럽게 펼쳐 있던 책상을 정리하는 느낌으로 책을 출간했다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할 수 있을지 없을 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 다음날 우연히 만난 선배의 한 손엔 안철수의 책이 들려 있었다. '출판사 직원들이 다 비상이래. 주문이 폭주 해서'라며 묻지도 않은 말에 셀프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안철수의 태도는 일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대중들의 환호는 점점 더 큰 파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치적이지 않은 이가 정치적이지 않은 태도로, 조직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보다 앞선 지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떡 줄 철수는 아직 생각 중인데 대중들이 집단적으로 그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꼴이 벌어진 것이니 말이다 .


나는 정치라는 것이, 권력이라는 것이 한번 맛을 보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동시에 그 맛은 대부분 '마약'처럼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다들 그 지랄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십 수년 전에 선배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결국 정치권력, 곧 '당'이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당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십 수년이 지났다. 이석기와 김재연이라는 슈퍼스타가 등장했고, 세상을 바꾸자는 진보적 포부는 정치와 권력을 맛본 다른 넘들과 다를 게 없다는 촌스럽고 진부한 패배로 귀결되었다. 정치와 권력이 마약임이 확실한 이유다. 동시에 안철수에게 관심이 이동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명박의 5년이 실패라 보지 않는다. 실수고 실패라면 사장이라는 자리에서 권력을 맛본 이명박에게 나라를 맡긴 것이다. 하고 싶은 건 하면 되고, 해서 문제가 된 건, 실무자 몇 명 보내버리고 격노하면 된다. 그냥 5년은 그래왔을 뿐이다. 오히려 실패는 뭔가를 반드시 바꾸고 개혁해주길 원했던, 그 기대를 담아 나라를 맡겼던 참여정부의 5년이라는 게 맞을 거다.


안철수도 사장이었다. 그리고 국가라는 조직의 어떤 수장이 될지 다른 대선주자들에 비해 가장 감이 안 오는 이력의 소유자기이기도 하다. 기회주의자라고도 하고, 정치와 권력 앞에 별반 다를 바 없는 강남출신의 성공한 CEO일 뿐이라고 하기도 한다. 의심이 가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안철수라는 카드는 매력적이다. 게다가 그 카드는 우리가 손에 쥐고 있다. 안철수라는 카드의 매력은 이미 지난 서울시장 선거를 통해 확인했다.



박원순시장이 뭔가 대단한 걸 하고 있나. 아니다. 박원순시장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합리적 권력'이다. 유권자로 하여금 자신이 맡겨놓은 권력을 합리적으로 행사되고 있다는 증명을 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 권력의 행사'가 감동적일 만큼 우리 사회는 여전히 후진거다. 박원순시장 덕분에 참여정부를 통해 호되게 통감했던 '누구 하나 바뀐다고 뭐가 되냐'는 패배감에서 이제 조금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노무현이 당선되던 그때 등장했던 정몽준과의 단일화라는 카드가 얼마나 재미없었나. 그건 그냥 권력을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써야 했던 카드였을 뿐이다. 결과는 당선이었지만 과정은 '쉣'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주어진 안철수라는 카드는 다르다.






고개 숙여 사과하면 될 일인가



3.

자 이제부터 슬슬 확인해 보자. 안철수가 기회주의자인지, 진짜 어린 왕자인지, 별다를 바 없는 CEO출신 대권주자일지, 뭔가 다른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안철수 그대로인지 말이다. 당장 출마를 선언하던 아님 막판에 선언하던 그건 그의 몫으로 놔두자. 영양가 없는 선택을 할 정도의 바보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니 말이다. 안철수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들어보자. 기존의 정치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그에게 기대했던 것들을 다른 대선주자들에게도 던져보자. 안철수를 통한 그 과정으로 인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명확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권력부터 잡고 보려는 결과의 맹신으로 인해 내용이 담보되는 과정의 중요성을 놓쳤던 경험을 이미 우린 뼈저리게 하지 않았던가.


난 이번 대선이 지난 대선과는 다르게 흥미진진해 질 거라는 데 오백원을 건다. 보수는 이미 고전적인 원톱 시스템으로 채비한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생각과 요구를 담아 월패스, 스루패스, 센터링 등을 해줄 안철수라는 플레이메이커가 있다. 골은 그가 직접 넣을 수도, 다른 이가 받아 넣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안철수란 존재는 곧 잘만하면 '뻥축구'를 탈피할 기회라는 것이다. 이 게임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관전포인트는 지치지 않고 끝까지 눈 부릅뜨고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반영되는지' 지켜보는 '지구력'이 되겠다.


안철수가 보여줄 태도가 그가 말했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의 결과라면 나는 그의 당선이고 뭐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진심으로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안철수라는 카드를 들고 판돈을 전부 털어 넣더라도 레이스를 함 해보고 싶다. 미국인들이 크리스천 베일에 환호했던 바로 그러한 태도. 그 태도에 변함이 없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언젠가 벌어질 안철수와 누군가의 의미 있고 흥미진진한 경쟁을 졸라, 기꺼이 기대해볼 생각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뜨거운 여름임은 확실하다.






추신.1)

마지막으로 여든, 야든 안철수에게 쏟아지는 관심에 대해 질투하는 넘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당연 그 관심의 상당수는 '니덜이 싫은 탓'이라는 것이다. 니덜이 하는 꼬라지가 싫으면 싫을 수록 안철수에 대한 관심은 비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지랄 하는 모습이 안스러울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안철수는 바로 니덜이 만든 '어린 왕자'임을 잊지 덜 마시라.


추신.2)

진짜 힐링이 필요한 건 우리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