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31일 화요일

[들은 척 매뉴얼 번외편] 싫으면 그만.



12.07.31 딴지일보 링크




하도 어이가 없어 스핀오프(편집자 주 : 기존의 작품에서 파생된 작품)를 써요. 스핀오프라 말투도 바꾼 거에요. 하긴 생각해보면 어제 오늘 일도 아니에요. 얼마 전 걸그룹의 어떤 친구는 이제 연애 금지 풀렸다고 막 좋아 하더라구요. 연애를 금지 시킨 데요. 그게 말이 돼요. 두발도 단속하고, 치마도 못 입게 하지 그래요. 속으로 '그래, 풀렸으니 앞으로 많이 해라. 남들 한번 할 거 두 번하고, 두 번할 거, 세 번 해라'. 그랬지요. 근데 어제 제대로 터졌어요. 주인공은 티아라 화영이란 친구죠. 며칠 전부터 얘기가 있었나 봐요. 전 그 친구 이름이 화영인지도 어제 알았어요.




기사를 보아하니 화영이란 친구가 팀에서 문제가 되고 있고, 이유는 왕따를 당하거나, 아님 어울리지 못할 만큼 철부지 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였지요. 그러다가 어제 그 긴장이 폭발한 거에요. 뭐 그동안 계속 쌓여온 문제였을 거에요. 관심이 집중되니 며칠간 얘기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지요.

  
결국 어제 소속사 사장님이 중대 발표하신다고 예고(뭘 별게 다 중대발표에요) 하시더니, 그 중대발표라는 건 결국 화영이란 친구의 방출이라고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지요. 뭐 분위기를 봐서는 화영이가 직접 사장에게 FA를 신청한 것 같지 않아요. 일방적 방출인 거죠. 왕따냐. 철부지냐의 확인을 떠나 파장이 순식간에 커졌어요. 발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장님이 인터뷰을 하셨거든요. 인터뷰 전문은 여기서 함 보시구요.(기사 링크)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석줄 요약
  • (화영이에 대해) 다 밝힐 수는 없다.
  • 팀을 운영하면서 스태프들이 너무나 힘들어했다. 울면서 그만두겠다는 매니저가 여럿 있었다.
  • 논란이 되지 않도록 (화영이가) 조용히 있어주길 바란다.

  
요약하면 '화영이만 나쁜 년'이 되는 거에요. 이거 졸라 흔치 않은 경우에요. 방출하는 경우 방출 당하는 당사자를 욕하는 경우 별로 없거든요. 이유가 어떤 것이든 방출은 당사자에게 치명적인 거에요. 헤어지는 게 아닌 쫓겨나는 거거든요. 그래서 대개 좋은 말을 해줘요.

  
제이슨 지암비 아시죠. 오클랜드에서 스타가 된 뒤에 뉴욕에서 단물 쪽 빠지고, 게다가 약물 스캔들까지 터진 뒤에 몇 개 팀을 거쳐 다시 친정팀 오클랜드에 돌아왔는데, 결국 방출 당했어요. 그때 슈퍼 단장인 빌리 빈의 코멘트는 뭐 이런 거였어요. '지암비가 그리워질 것이다'. 대게 이런 식이에요. 근데 말이죠. 사장님께서는 함께했던 이십 대 중반인 친구에게 '나쁜 년' 드립을 시전해 버린 거에요. 그것도 쫓아내믄서…

  
왜 그랬을까요. 화영이란 친구가 왕따였든, 철부지였든 사장님이 그렇게 할 게 아니거든요. 싫으면 그만이지 왜 그러냐구요. 직장인들 가끔 하는 말 있잖아요. '지가 사장이믄 다야' 뭐 이런 거. 이거 암튼 유독 우리만 그래요. 당사자들은 말이 없어요. 좋든 싫은 당사자가 결정할 문제이지요.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싫으면 그만인 거에요. 다들 그렇잖아요.

  
제가 연재하고 있는 들은 척 매뉴얼 '사랑과 전쟁(링크)'편은 말 그대로 여럿이 모인 밴드 혹은 팀의 사랑과 전쟁을 다룬 것이었어요. 사이 좋은 '사랑' 하는 밴드는 U2 한 팀만 들었구요. 치고 받고 헤어진 팀으로는 '이글스'와 사이먼 앤 가펑클'. '아바' 그리고 '오아시스' 이렇게 네 팀을 들었죠. 그래요. 1:4라는 비율이 말해주는 건, 사실 멤버들끼리 지지고 볶은 일화들이 존나게 많다는 거. 바로 그거에요. 헌데 그나마 그 중 제가 참 사이 좋은 팀으로 예를 들은 U2에 대해 '문밖의 늑대'님께서 이런 리플을 달아주셨어요.

  
유투에 대해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멤버 교체가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심각한 불화가 없었던 건 말도 안돼요.
90년대 초중반에 서로 주먹질하고 싸우고 거의 해체수순까지 갔었던 적도 있구요.
나름 그런 서로간의 갈등이 음악적으로 많은 성장을 해 주게 되었는데…
부부도 살아가면서 심심치 않게 싸우고 이혼 직전까지 가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사람 살아가는데 불화가 없다라고 말하는 건 좀 너무 미화시키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거기다 골수팬인 저로써는, 이제는 나오는 앨범들이 뭔가 음악적으로 아쉬운 면이 많아서 좀 안타깝네요. 

  
확인은 해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일리가 있었거든요.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 그러니깐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들은 극히 일부일 거에요. 제가 얼마 전에 어딜 좀 갔다 왔어요. 일행이 한분 계셨는데요. 잘 아는 친한 분이었어요. 딱 3일 같이 있었는데요. 제가 막 짜증을 내고, 그 분이 막 불편해하고 그랬더랬죠.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심각한 이유가 '코를 고는' 것이었어요. 저는 누가 코를 심하게 골면 못 자 거든요. 잠을 못 자니 아침에 예민해지고, 짜증이 나고 그런 거지요. 만약에 그분이랑 저랑 이제 막 시작한 듀엣이고, 인지도가 없어 한 숙소, 한 방에서 먹고 자는 처지였다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저는 '졸라 못해먹겠다'고 뛰쳐 나갔을지 몰라요. 아니 그분이 먼저 탈퇴했을지 모르죠. '이렇게 예민한 새끼랑 드러워서 같이 못 있겠다'고 말이에요.

  
다행히 갔다 와서 서로 막 '너 때문이라고' 하믄서 잘 풀리긴 했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와 같이 붙어 산다는 거, 이거 존나 힘든 거구나, 배려라는 단어가 그리 만만한 게 아니구나. 한마디로 득도(생각만)를 해버린 거죠.

  
근데 티아라 이 친구들은 말이죠. 09년에 6명으로 시작해서, 10년에 화영이가 합류해 지금까지 무려 7명의 어린 이십 대 초반의 친구들이 3-4년을 같이 지내왔어요. 잘 나가는 친구도 있고, 욕 들어 묵는 친구도 있고, 예쁘다 소릴 듣는 친구도 있고, 아닌 친구도 있었겠지요. 그 상황에서 아무일 없는 게, 그게 웃긴 거에요.

  
저는 만날 TV 어린 친구들 너 댓 명이 나와 서로 위로만 하는 모습을 보면 좀 무섭거든요.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저게 아닐 텐데' 하는 거죠. 근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말이죠. U2가 좀 멀게 느껴지나요. 그럼 아이돌 그룹 예를 함 보죠.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은 있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다' - 게리 발로우

  
  
  
'로비는 더 많은 걸 하고 싶어했고, 더 큰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 - 제이슨 오렌지

  
유명했던 영국의 보이 밴드 테이크댓이 5년 여간의 활동을 접고 해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막내 로비 윌리엄스 때문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화영이도 막내에요).

  
  
  
'난 이 팀에서 백댄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몇 년이 걸렸다. 난 게리의 백댄서로 사인했던 게 아니다'   - 로비 윌리암스

  
사실 테이크댓의 프론트맨은 게리 발로우 였어요. 노래도 막 지가 만들고, 대부분의 곡들에서 리드보컬도 지가 맡았지요. 누가 뭐래도 메인은 게리 발로우였어요. 대부분의 멤버들은 그 사실을 인정했지만 막내 로비 윌리암스는 점점 그게 싫었던 거에요.

  
불화가 시작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팀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팀 불화에 대해 기사를 부인하고 그랬지요. 하지만 로비 윌리암스의 욕망은 가라앉지 않았어요. 술을 존나게 마시고. 여자들을 막 만나고, 게다가 약까지 막 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은 빨리 끝내고 싶은데 팀은 어떻게는 유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결국 더티한 항명을 선택한 것이었지요.

  
투어 중간에 로비 윌리암스는 약물, 알콜 과다 복용으로 막 응급실에 실려가고 그랬어요. 이렇게 되니 결국 나머지 멤버들도 로비 윌리암스를 보내주기로 했어요. 투어 중간이었지만 4인조로 투어를 마무리하기로 결정, 로비 윌리암스의 탈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지요.

  
테이크댓은 로비 윌리암스가 없는 상태로 투어를 마무리했지요. 팀으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지요. 수많은 티켓이 취소될 수도, 그로 인해 투어가 휘청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헌데 로비 윌리암스는 팀에서 빠져 나와서도 팀을 막 욕하고 그랬죠. 결국 로비 윌리암스는 솔로를 시작했고, 테이크댓은 오래가지 못하고 해체되었죠. 멤버들이 선택한 일이었어요. 갑자기 소속사 사장님이 등장해서 성명서를 낭독하거나, 갑자기 부모님이 나와서 중재하고 뭐 그런 건 없었구요.

  
 
  
스파이스걸스라는 영국 걸그룹도 그랬지요. 여성 5인조였는데요. 이 팀은 늘 멤버들 간의 불화설이 있었지요. 여성간의 불화 하니까 생각나는 팀이 있지요. 맞아요. 아바에요. 오죽하면 남자멤버인 남편들이 나서서 중재를 했을까요.

  
물론 결국 깨졌지요. 스파이스걸스는 허구 한날 다퉜다고 해요. 개성이 강한 멤버들이 모였으니 당연한 것이라고들 했지요. 맞아요. 당연한 거죠. 특히 문제가 된 건 게리 할리웰과 멜라니 브라운간의 주도권 싸움이었죠. 원래 리더는 게리 할리웰이었는데, 멜라니 브라운에게로 넘어가게 되었거든요. 그러믄서 다투는 일이 많아졌고, 게리 할리웰은 '에이 조또'하고 팀을 떠났지요.

  
이 때도 전미투어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게리 할리웰 부분을 다 들어내고, 들어낸 부분을 나머지 멤버가 나누어 투어를 진행하고, 새 앨범도 발표했지만 결국 얼마 가지 않아 팀은 깨지고 말아요.

  
헌데 그렇게 각자 지내다가 재결합을 하더니 재결합 투어도 펼쳤어요. 더구나 지금 진행중인 2012 올림픽 폐막식에서도 공연을 한다고 해요. 불화가 있었고, 불화를 인정하고, 개판으로 헤어지고, 다시 만난 거죠. 이상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나요. 역시 사장님. 엄마, 아빠는 등장하지 않았어요. 빅토리아의 남편 데이빗 베컴 만 종종 언급되긴 했죠. 워낙 유명해서…

  
물론 스파이스걸스처럼 불화로 깨진 경우가 있는 반면, TLC처럼 레프트 아이(가장 개성있는 멤버)로 인해 불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해체되지 않은 경우도 있지요. (레프트 아이의 사망으로 팀이 깨지긴 했지만). 오아시스의 겔러거 형제처럼 총만 안 들었다 뿐이지 서로 죽이겠다 지랄인 형제가 있는 반면 ACDC의 영 브러더스(앵거스 영, 말콤 영)처럼 오랜 기간 변치 않고 찰싹 붙어 있는 경우도 있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앵거스 영의 트레이드마크인 교복 유니폼은 누나 마거릿 영이 만들어 준 것이지요. 레드제플린처럼 드러머(존 본햄)가 세상을 떠나자 팀을 해체해버린 경우도 있지만, 어벤지드 세븐폴드처럼 드러머(더 레브)가 사망하자 평소 드러머가 존경하던 드러머(전드림씨어터, 마이크 포트노이)를 영입해 앨범을 만들기도 했지요. 이건 다 그들, 멤버들의 선택이었어요. 제작사, 에이전시, 주변지인과의 상의나 조언 등은 있었겠지요. 하지만 결정은 그들의 몫이었죠.

  
티아라라는 어린 7명의 친구들은 어느덧 4년을 지냈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냐는 거죠. 당사자만 입 틀어 막고 감출 게 아니라는 거죠. 친구들끼리 사이가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죠. 안 맞아서 헤어질 수도 있는 거에요. 애초 시작도 마음에 들어서 팀을 만든 게 아니잖아요. 사장님이 꽂아서 된 거지. 어디 사장님이 그뿐이었나요. 팀이 좀 나태해 진 것 같다면서 새로운 멤버를 투입하겠다고 하고 그랬죠. 무한경쟁인 거에요. 문득 사장님은 어떻게 경쟁하고 계신지 궁금해 지네요.

  
어제 화영이는 마지막으로 '진실없는 사실'이란 트윗을 날렸어요.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사실인데 진실은 아니다. 이거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론을 통해 나오는 얘기들은 대부분 '구라다'는 일종의 호소겠지요. 사장님께서 인터뷰에서 조용히 있으라고 했으니 더 이상의 말을 하기 어려울 거에요. 결국 화영이도 남아있는 친구들도 뭐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고 있어요. 싫으면 마는 건데 그걸 말을 못하는 거에요.

  
마치 사태에 대한 발언권은 사장님에게만 있는 듯한 이런 구조는 옳지 못해요. 이러다 또 부모님들 등장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부모님 등장하면 또 당사자인 친구들은 오만상을 쓰고 앉자 눈물을 흘리겠지요. 정말 안타까워요. 내 눈에 보이는 아리따운 친구들이 그 친구들 자신인지, 아님 부모의 기대만 투영된 허상인지, 사장의 욕망에 저당 잡힌 껍데기인지 말이죠. 왜 그렇게 어린 친구들을 볼모로 잡는지 모르겠어요.

  
존 메이어가 음악 시작할 때 돈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돈을 좀 달라고 했대요. 아버지는 때마침 돈이 좀 있었는지 돈을 건네면서 그랬다고 해요. '니가 이담에 잘 되면 이 도움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돈 받은 존 메이어는 얼마 후 대박이 났죠. 존 메이어는 음악도 잘하고, 연애도 잘하는 뮤지션이 되었구요. 가족 얘긴 언론에 거의 노출되지 않는 걸 봐서는 나름 잘들 살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 정도의 관심과 지원이면 좋을 것 같은데 가족이던, 소속사 사장이던 딱 그 정도만 개입하면 뭐 똥꼬에서 털이라도 올라오는가 봐요.

  
  
  
그래요. 존 메이어랑 티아라랑 비교하는 것이 웃기고 자빠라진 짓이라는 거 저도 알아요. 답답해서 그런 거에요. 사장님이 픽업해서 팀 만들고, 사람 붙여서 연습시키고, 성형도 시켜주고, 앨범도 내주고 하는데 들어간 본전 생각나는 거 이해해요. 그러니 예능에도 막 나가야 하고, 재능 있다 싶으면 연기 연습시켜서 드라마에도 내보내야 하죠. 아침에 일어나 TV하고, TV 끝나면 행사 가고, 행사 끝나면 인터뷰하고, 인터뷰 끝나면 행사하나 더하고, 행사하나 끝나면 연습하고, 연습 끝나면 칼잠 자고, 그렇게 새 아침이 밝겠죠.
  
  
  
그렇게 뛰댕기는데 멤버들간에 아무 일이 없다구요. 요즘 같은 날씨엔 가만히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는 데 말이에요. 예능 같은데 나와서 농담 투로 말하잖아요. '사장님이 누구누구만 예뻐한다고' 아 씨발. 같이 고생하는데 누군 주목 받고, 누군 떨거지고. 저라면 그러고 못살아요. 아우 슬퍼. 그러니 그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가, 그 친구들을 위한 건지, 듣는 사람을 위한 건지, 사장님을 위한 건지 당췌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화영이에 대한 상반된 의견 중 누구 말이 맞던지 언론의 뭇매를, 대중의 돌팔매를 맞을 일이 아니라 그 친구들이 사이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테이크댓에서 로비 윌리엄스의 -약물과 같은 비행은 좀 그렇고-, 게리 발로우를 넘어서고 싶다는 생각, 그 생각으로 인한 불화, 그거 이해가 된다는 거지요. 프로트맨을 백푸로 인정하고 가끔씩 들러리인 듯한 심정을 눌러가면서 불화 없이 팀에 남는다는 게 더 어려울 듯 하거든요. 젊은 친구들 데리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친구들이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안타깝구요. 어쩌면 말도 못 꺼낼 만큼 사회의 시선과 반응이 두려운 거라면 그것 역시 안타깝구요.

  
세상엔 영원한 거 없잖아요.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욕도 하고, 욕도 먹고 뭐 그런 거 잖아요. 뭐 때문에 말도 못하고 그러고 살아요. 본전 때문에 그렇게는 못 하겠다구요. 함 잘 따져보세요. 그 친구들 이미 본전 뽑고도 남았을 테니까요. 사장님은 (화영이 본인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있으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 친구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당사자들 스스로의 말이 아닌가 싶어요. 그 말이 욕이 되었던 위로가 되었던 말이지요.

  
말 좀 하고 사는 거. 그게 참 어려운 시대이긴 한가 보네요.

  
세상만사 다 싫으면 그만인데 말이에요.
PLAY LIST
  1. Everythig Changes – Take that 
  2. Say You'll Be There – Spice Girls
  3. Damage – TLC
  4. Back In Black – AC/DC
  5. 5. Bo Peep Bo Peep – 티아라
추신1)

지금 제가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시간이 31일 오전 10시 30분인데요. 사장님께서 막 자신의 트위터에 '화영이 자신의 행위에 사과한다면 스태프, 티아라 멤버들과 함께 복귀를 논의할 수 있다'고 그것도 영문으로. 밝혔다고 하네요.(기사링크) 어벤져스가 해체해도 이 난리는 아닐 거에요.

  
추신2)

며칠 사장님들 욕만 한 것 같네요. 모든 사장님이 그런 건 아니지요. 좋은 사장님들 오해 마셔요.
  


  

2012년 7월 27일 금요일

철수 생각







1.

사실 생각은 아래의 사진 몇장으로부터 시작됐다.






 7월 20일. 콜로라도 오로라시의 한 극장에서 다크나이트 라이즈 상영 중에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12명이 목숨을 잃고, 59명이 다쳤다. 재앙이 벌어진 것이다. 수많은 팬들이 가장 기다렸던 작품이었고, 기대에 걸맞은 결과물로 관객을 맞을 준비를 하던 차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사건 직후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관은 집과 같은 소중한 곳이라는 내 생각이 이번 사건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 비극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며칠 뒤 피해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던 병원, 그리고 사망자 추모식 장소에서 팬들과 파파라치들에 찍힌 몇 장의 사진이 포함된 기사가 denverpost.com에 개제된다. 주인공은 바로 크리스천 베일과 그의 아내였다.


제작사의 말처럼 크리스천 베일과 아내의 개인적인 방문이었다. 조용히 찾아가 피해자들을 만나고, 그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 일과 관련해 크리스천 베일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이 기사를 접한 이들의 생각은 대부분 이러했다.




누군가는 크리스천 베일을 진짜 배트맨이라고도 했다



나는 크리스천 베일의 행동에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했을 뿐'이라는 그저 평범한 당위만이 느껴졌다. 그 외에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위의 답글이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그 때쯤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이름 석자가 있었다. 나쁜 일은 하지 않을 것만 같은 친구이자, 영희의 영원한 남자 친구. 철수, 바로 안철수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철수 생각'을 좀 했다.




2.

사실 난 안철수를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고, 그가 나온 프로그램 중 '무릎 팍 도사'와 '힐링 캠프'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나마 힐링 캠프는 다 보지도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오늘날의 안철수를 있게 한 백신 프로그램 V3도 쓰지 않는다. 알에서 막 약이 나오는 그걸 쓴다. 1-2년 사이 가장 주목 받는 유력인사였으나 오히려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려 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사실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그가 한때 잘나가는 CEO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CEO, 그러니까 소위 '사장'이라는 직업 군에 속해있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속해있는 기업(회사)의 사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눈치, 강요, 권위 뭐 이런 것들을 존나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게 나만 그런 건지 우리 함께 생각을 좀 해보자. 주변에 자기 회사 사장 좋아 죽겠다는 사람 본 적 있는가? 난 없다. '별 관심 없다'는 50%, '좀 싫다'가 25%, '존나 싫다'가 20%, '좋다'는 5%정도 될 것 같다. 아마 '별 관심 없다' 군도 술 한잔 하면서 살짝 구슬려보면 '좀 싫다' 거나 '존나 싫다'가 태반일거다. 아무튼 난 싫다. 전전 회사의 사장(전전 사장 이야기 '사장학개론' 링크)도 그랬고 전 회사의 사장도 그랬다.


전 회사 사장이 내건 슬로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뻔하디 뻔한 '고객 만족'이 아니고 '직원 만족'이었다. 사실 '직원 만족'은 구글의 기업이념을 이루는 핵심이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모토를 전 회사 사장은 입에 달고 다녔다. 솔직히 난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7년간을 일한 나의 퇴사 이유는 '이렇게 일하다가는 죽겠다'였다. 함께 일하는 팀원 중 누군가는 떠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회사와 사장을 믿고 열심히 해보자던 니가 먼저 튀는 게 어딨냐?'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 씨발 미안하다.'


안철수의 좋디 좋은 얼굴에서 내가 아는 사장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아는)사장들은 모두 안철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 '힘들어도 잘해봅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대부분 임원을 타고, 팀장을 타고 내려와 '죽어도 끝내라'로 내 앞에 도착한다. 생각해 봐라. 안철수가 임원들에게 그 특유에 착한 표정을 하고 앉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끝내야죠'라고 말한다고… 이후의 벌어지는 일들은 독자덜의 생각에 맡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사장'이라는 사람이 기업이라는 조직에 관계되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전 사장도 사실 퇴사하고 나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회사 안에서 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실제로 회사 밖의 누군가는 사장을 '선비'로 비유하기도 했다. 난 문득 우리 눈에 비친 안출수의 이미지가 바로 이거 일수도 않나 싶었다. 철저하게 무엇과도 연관되어 있지 않은 '개인 안철수' 말이다.


어쨌든 (내가 아는)사장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리고 직접 모시지는 않았지만 잘 아는 사장님 한 분 계시다. 이상하게 그분은 좋디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바로 이.명.박. 그분이 그렇다. 청와대가 아니라 회사다. 장관이 아니고 부하직원 혹은 따까리다. 안 들어도, 안 봐도 잘 굴러간다는 걸, 나 먹고 사는 데 별 탈 없다는 걸, 탈이 나도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몸으로 체득하는 순간. 위대한 '사장'은 탄생한다. 결제 서류에도 언제든 지울 수 있도록 연필로 사인을 했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내려오는 위대한 사장님. 우린 뭐 그런 이명박 사장님을 모셔왔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언급하기도 싫다.


'철수 생각'을 시작하고 난 뒤 돌아가는 형국을 보아하니, 정치권에서 여야를 가릴 것 없이 힐난하거나 경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의 거취와 상관없이 환호와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가 '사장'으로서 어떤 사람일지 경험해보지 못해 모르겠다. 전해 들은 바로는 그가 만든 회사도 빡세기로는 유명하다고만 알고 있다. 회사가 빡세다고 해서 비난할 이유는 없는 것이니깐.


계속되는 '철수 생각' 중에 꼴렸던 건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의 태도였다. 내 눈에 보이는 그의 태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필요한 것을 자신이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차분히 고민하고 있다는 딱 그 정도였다. 안철수는 보수가 총 집결하여 지지를 선언한 박근혜를 앞설 수 있는 대중적 지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지지가 확인되고, 권력의 냄새가 풍기고, 사람들이 들러붙고, 그 권력과 지지가 피부로 와 닿아 아드레날린이 존나 분비되는 순간에도 그는 똑같은 표정, 똑같은 태도를 하고 있었다.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음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새누리당 의원 하나는 '어린 왕자의 얼굴을 한 기회주의자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뭐 기회주의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기분 나쁘게 보일 수도 있겠다. 확실한 건 안철수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구 꿈?



대선이 눈앞에 서서히 다가오면서 여야를 대표하는 대선 주자들은 경쟁하듯 출정을 선포하고 슬로건을 뽑아 돌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군사 쿠데타에 대해 당연한 선택이라 귀결해버린 장한 딸 박근혜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다. 내 꿈? 아니 너 꿈? 아니 박정희의 꿈? 내 꿈이 뭔지는 들어보지도 않으면서 꿈을 이뤄주겠단다. 고객 게시판이 Q&A가 아닌 A&Q인 꼴이다. 그래. 황당하긴 해도 신선하다.


하지만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다'는 슬로건도 멀게만 느껴지고,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이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는 것 같긴 한데, 그 역시 별 감흥이 없다. 그러니 오히려 대중들은 그 흔한 슬로건 하나 없는 안철수에 환호한다. 쇼 프로에 등장한 안철수는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어지럽게 펼쳐 있던 책상을 정리하는 느낌으로 책을 출간했다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할 수 있을지 없을 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 다음날 우연히 만난 선배의 한 손엔 안철수의 책이 들려 있었다. '출판사 직원들이 다 비상이래. 주문이 폭주 해서'라며 묻지도 않은 말에 셀프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안철수의 태도는 일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대중들의 환호는 점점 더 큰 파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치적이지 않은 이가 정치적이지 않은 태도로, 조직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보다 앞선 지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떡 줄 철수는 아직 생각 중인데 대중들이 집단적으로 그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꼴이 벌어진 것이니 말이다 .


나는 정치라는 것이, 권력이라는 것이 한번 맛을 보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동시에 그 맛은 대부분 '마약'처럼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다들 그 지랄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십 수년 전에 선배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결국 정치권력, 곧 '당'이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당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십 수년이 지났다. 이석기와 김재연이라는 슈퍼스타가 등장했고, 세상을 바꾸자는 진보적 포부는 정치와 권력을 맛본 다른 넘들과 다를 게 없다는 촌스럽고 진부한 패배로 귀결되었다. 정치와 권력이 마약임이 확실한 이유다. 동시에 안철수에게 관심이 이동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명박의 5년이 실패라 보지 않는다. 실수고 실패라면 사장이라는 자리에서 권력을 맛본 이명박에게 나라를 맡긴 것이다. 하고 싶은 건 하면 되고, 해서 문제가 된 건, 실무자 몇 명 보내버리고 격노하면 된다. 그냥 5년은 그래왔을 뿐이다. 오히려 실패는 뭔가를 반드시 바꾸고 개혁해주길 원했던, 그 기대를 담아 나라를 맡겼던 참여정부의 5년이라는 게 맞을 거다.


안철수도 사장이었다. 그리고 국가라는 조직의 어떤 수장이 될지 다른 대선주자들에 비해 가장 감이 안 오는 이력의 소유자기이기도 하다. 기회주의자라고도 하고, 정치와 권력 앞에 별반 다를 바 없는 강남출신의 성공한 CEO일 뿐이라고 하기도 한다. 의심이 가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안철수라는 카드는 매력적이다. 게다가 그 카드는 우리가 손에 쥐고 있다. 안철수라는 카드의 매력은 이미 지난 서울시장 선거를 통해 확인했다.



박원순시장이 뭔가 대단한 걸 하고 있나. 아니다. 박원순시장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합리적 권력'이다. 유권자로 하여금 자신이 맡겨놓은 권력을 합리적으로 행사되고 있다는 증명을 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 권력의 행사'가 감동적일 만큼 우리 사회는 여전히 후진거다. 박원순시장 덕분에 참여정부를 통해 호되게 통감했던 '누구 하나 바뀐다고 뭐가 되냐'는 패배감에서 이제 조금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노무현이 당선되던 그때 등장했던 정몽준과의 단일화라는 카드가 얼마나 재미없었나. 그건 그냥 권력을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써야 했던 카드였을 뿐이다. 결과는 당선이었지만 과정은 '쉣'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주어진 안철수라는 카드는 다르다.






고개 숙여 사과하면 될 일인가



3.

자 이제부터 슬슬 확인해 보자. 안철수가 기회주의자인지, 진짜 어린 왕자인지, 별다를 바 없는 CEO출신 대권주자일지, 뭔가 다른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안철수 그대로인지 말이다. 당장 출마를 선언하던 아님 막판에 선언하던 그건 그의 몫으로 놔두자. 영양가 없는 선택을 할 정도의 바보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니 말이다. 안철수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들어보자. 기존의 정치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그에게 기대했던 것들을 다른 대선주자들에게도 던져보자. 안철수를 통한 그 과정으로 인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명확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권력부터 잡고 보려는 결과의 맹신으로 인해 내용이 담보되는 과정의 중요성을 놓쳤던 경험을 이미 우린 뼈저리게 하지 않았던가.


난 이번 대선이 지난 대선과는 다르게 흥미진진해 질 거라는 데 오백원을 건다. 보수는 이미 고전적인 원톱 시스템으로 채비한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생각과 요구를 담아 월패스, 스루패스, 센터링 등을 해줄 안철수라는 플레이메이커가 있다. 골은 그가 직접 넣을 수도, 다른 이가 받아 넣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안철수란 존재는 곧 잘만하면 '뻥축구'를 탈피할 기회라는 것이다. 이 게임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관전포인트는 지치지 않고 끝까지 눈 부릅뜨고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반영되는지' 지켜보는 '지구력'이 되겠다.


안철수가 보여줄 태도가 그가 말했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의 결과라면 나는 그의 당선이고 뭐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진심으로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안철수라는 카드를 들고 판돈을 전부 털어 넣더라도 레이스를 함 해보고 싶다. 미국인들이 크리스천 베일에 환호했던 바로 그러한 태도. 그 태도에 변함이 없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언젠가 벌어질 안철수와 누군가의 의미 있고 흥미진진한 경쟁을 졸라, 기꺼이 기대해볼 생각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뜨거운 여름임은 확실하다.






추신.1)

마지막으로 여든, 야든 안철수에게 쏟아지는 관심에 대해 질투하는 넘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당연 그 관심의 상당수는 '니덜이 싫은 탓'이라는 것이다. 니덜이 하는 꼬라지가 싫으면 싫을 수록 안철수에 대한 관심은 비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지랄 하는 모습이 안스러울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안철수는 바로 니덜이 만든 '어린 왕자'임을 잊지 덜 마시라.


추신.2)

진짜 힐링이 필요한 건 우리다. 우리.





2012년 7월 20일 금요일

[좌충우돌세계사] 참수 혹은 린치 - 린치 '정몽주'




 
**지난 ‘신돈’편을 읽고 넘어오믄 더 재미질지도 모름. 아님 말고…




포은 정몽주 1337~1392


The Politician.

1392년 어느 날.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포은 정몽주에게서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이성계가 개성에 컴백했다는 것은 루머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전치 30주의 중상을 입었다는 첩보를 접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혁명파’의 수장 이성계는 개성에 입성해 있었다. 정몽주는 보좌진에게 ‘이성계가 어떻게 개성에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 있느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성계의 개성 컴백과 함께 ‘정몽주 제거설’이 프락치를 통해 입수되었지만 당사자인 정몽주는 그리 불안해 하지 않았다. 그래도 뜻을 같이했던, 무인이지만 문인을 아끼고 따랐던 이성계가 뒤에서 칼을 꽂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등에 칼을 쑤셔 넣었다간, 그들이 꿈꾸는 혁명의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믿음도 살짝 있었다. 불안해 한 건 정몽주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보좌진들이었다.



정몽주에게 일정을 전해 받은 보좌진들은 정몽주를 만류했다. 정몽주가 제시한 일정은 두 가지였다. 오전엔 이성계 문병 및 독대 일정, 오후엔 절친이었던 전 판개병부사(현재의 서울시장) 유원의 문상일정이었다. 당연 보좌진들은 오전 일정을 취소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취소하지 않았다. 공양왕을 우습게 보는 이는 있어도, 자신을 우습게 보는 이는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이성계의 옆에는 그의 ‘원 투 펀치’ 삼봉 정도전과 조준도 없는 터였다. 차림을 마친 정몽주는 차분하게 사택을 나서 이성계에게로 향했다. 허나 정몽주가 잊고 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돌아가는 판세를 읽고는 중상을 입고 벽란도의 응급실에서 링겔을 꽂고 있던 이성계를 개성으로 긴급 호송한 이, 26세의 이방원이었다.


가장 최근의 이방원.







이성계의 사저에 도착한 정몽주는 이성계와 독대했다. 그러나 그 둘은 별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 둘은 각각 열쇠를 쥐고 있었다. 고려라는 현재의 왕국의 열쇠를 지닌 정몽주, 그리고 새나라라는 혁명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이성계. 그들은 말없이 자신들이 쥐고 있는 열쇠만을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었다. 자리를 뜬 정몽주를 잡아 세운 건 다름아닌 이방원이었다. 이성계의 사택에서 불꽃이 튀었던 곳은 이성계와 정몽주가 독대했던 안채가 아니라, 이방원가 정몽주가 마주하고 있던 사랑채였다. 이방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여차역하여 여피역하여)
城隍堂後壇 頹落亦何如(성황당후단 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이런들 긔 엇더리, 뎌런들 긔 엇더하리
성황당 뒤담이 해인들 긔 엇더하리
우리도 이러히여 살어이신들 긔 엇더하리


26세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도발적이면서 정중한 노래 ‘하여가(何如歌)’를 이방원이 먼저 읊었다. 고려를 대표하는 학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다름아닌 ‘뭐 볼 거 있다고 거기서 그러고 있냐’는 것이었다. 애둘러 가지 않는, 다분히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정몽주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장본인이 이성계가 아닌 이방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속으로 ‘이런 어린 좆밥 쉐이가 어른들의 싸움에 건방지게 숟가락 올리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방원의 하여가를 듣고는 만만한 놈이 아님을, 잘못 건드렸단 조땔 수 있음을 느꼈다.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방원을 지긋히 바라보며 입을 열였다. ‘어이 친구 이게 바로 진정한 프리스타일이야’라는 표정이었다.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지여)

이 몸이 주거 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 되여 넉시라도 잇고 없고
님 향 일편단심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정몽주의 답변은 ‘단심가(丹心歌)’였다. 정몽주가 풋내기인줄만 알았던 이방원에게 답한 메시지는 ‘여기 볼 거 없어도 너한테는 안가 이 쉐이야’였다. 쿨 하게 한 곡 프리스타일로 읊어 준 정몽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대문인 다운 답가로다. 그것도 프리스타일로 거침없이 쏟아내다니’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그의 제거를 주저하는 이유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문밖에는 그의 수하 조영규가 투엑스라지급 오함마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쉽게 오다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몽주는 애초 일정대로 절친 유원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한 시대가 저물지도 모를 역사적인 순간, 긴히 상의할 친구 하나 없다는 것이 아쉽고, 고독한 그런 순간이었다. 술 몇 잔으로 아쉬움과 고독을 달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정몽주의 눈에 선지교가 들어왔다. 문득 스승이었던 이색과, 후배인 정도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눈 앞에는 스승님도, 후배도 아닌 시커먼 장수 한 놈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오함마가 들려 있었고, 그 오함마는 주저 없이 정몽주에게 향했다.


그가 죽던 날,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 낫다고 하여 선지교는 선죽교로 불리기 시작했다. 자식을 잊지 못한 노모의 비석은 다리 옆에 세워졌는데 죽어서도 멈추지 않는 눈물로 늘 젖어있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유원의 문상을 마치고 돌아가던 정몽주가 죽음을 예상하고 말을 거꾸로 타고 갔다는 설도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한 장면으로 인해 정몽주는 ‘지조의 아이콘’이 되었다. 목숨과 신념을 맞바꾼 위대한 사상가가 되었다. 정몽주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정몽주에 의해 유배에 처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조선건국의 프로듀서 정도전은 새나라를 반대한 간신 정몽주가 ‘지조의 아이콘’이 될 거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단심가의 원작자가 정몽주라는 확증도 없었다.(1)


정몽주가 살해되고 3개월이 지난 고려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500년의 왕조, 조선이 건국되었다. 정몽주가 죽은 지 6년 뒤, 정도전은 정몽주를 보낸 이방원에 의해 참수 당한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정몽주를 지조를 지킨 학자로 복권했다. 정몽주의 지조를 기리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신하들을 향해 자신에게 ‘지조’를 조공하라 던지는 일종의 메시지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렇듯 정몽주가 ‘지조의 아이콘’이 되는 데에는 그를 죽이고, 동시에 그를 복권한 이방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정몽주는 성리학자의 창시자라 불리우는 학자 중의 학자였다. 동시에 이성계, 정도전의 태그팀과 스틸케이지 매치가 가능한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정. 치. 인.



스틸케이지매치




WELLCOME.

1337년. 성균관 재생인 아버지 정운관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몽주는 유복한 환경에서 아무런 모자람, 걱정 없이 자랐다.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고 나았다고 해서 ‘몽란’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나, 이름은 몽란에서 몽룡으로, 최종적으로 아버지가 중국의 주공(주나라 문왕의 아들)을 만나는 태몽을 꾸었다는 이유로 ‘몽주’로 바뀌었다. 동생이 셋이 더 있었지만 사는 데는 문제 없었다. 아버지가 성균관 재생으로 박봉이었으나 집안은 제법 명문 있는 양반가였다. 동생이 열명 더 있다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어머니 이씨는 형제들 중 정몽주를 유독 아꼈다. 장남인데다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총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씨에 눈에는 미친 듯이 총명한 정몽주의 미래가 불안해 보였다. ‘백로가’(白鷺歌)(2)를 지어 정몽주에게 선물하며, 명심 또 명심케 하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희 빛을 새울세라.
청강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어머니가 그토록 까마귀덜, 그러니까 간신(奸臣), 역신(逆臣) 무리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너는 내 인생의 백로'(You Are The 백로 Of My Life)라고 그리 노래를 부르며 당부했건만, 정몽주는 이를 어기고 혁명의 수괴 이성계, 수괴의 브레인 정도전 등과 무려 일촌 같은 것을 맺으며 어울렸다. 예나 지금이나 하지 말라는 게 더 꼴리는 법이다.


아버지 정운관과 당시 잘나가던 유학자인 이색(3)은 맞팔을 하는 사이였다. 자연스럽게 이색의 문하생이 되어 엘리트코스를 밟아 장원급제를 하게 된 정몽주는 어느 날 자신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건장한 사내를 마주하게 된다. 조선건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스승 이색의 문하생 중 단연 돋보였던 정몽주를 오래 전부터 흠모하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정도전의 나이가 17세, 정몽주의 나이 23살 때의 일이다.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대학, 중용, 맹자 등을 추천했고, 정도전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때는 바야흐로 신돈이 성균관을 재건하고,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신진사대부들을 기용해 성균관 곳곳에 배치하던 때였다. 이색은 성균관 대사서가 되었고, 정몽주등이 학관이 되었다. 뒤를 이어 추천에 의해 정도전도 학관이 되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들의 부패가 임계점을 넘어서고, 공민왕이 프론트맨으로 세운 신돈이 토지제도와 노비제도의 개혁을 진행하던 바로 그 시점. 성균관 학관이었던 정몽주는 정치인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끼던 후배 정도전도 마찬가지였다.



정몽주보다 조금 더 잘생긴 삼봉 정도전


Once Upon A Time.

1371년, 신돈을 날려버린 공민왕은 이름도 요상한 자제위(子弟衛)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 말은 왕의 경호를 위한 귀족 자제들의 계모임 같은 것이라 하였지만, 사실은 동성애과 관음에 빠진 공민왕의 여흥을 위한 클럽이었다. 미쳐가는 공민왕은 다양한 동성파트너와 ‘음음’은 물론 동성파트너로 하여금 자신의 부인들을 간음하게 하여 왕자를 얻으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파트너 중 한 명인 홍윤이 부인 중 한명인 ‘익비’를 임신시키자, 공민왕은 홍윤과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내시 최만생을 날려버리려 했다. 그러나 선수는 이를 안 홍윤과 최만생이 쳤다. 술에 취해 떡이 된 공민왕에게 연장세례를 퍼부은 것이다. 공민왕은 연신 ‘고마 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를 외쳤지만 홍륜과 최만재는 이제 막 건전지를 갈아 끼운 자동 처키 인형과 같았다. 찌른대 또 찌르고, 안 찌른대 찾아 찔러댔다. 이렇게 그 어떤 왕보다 가장 잔인하게 죽은 공민왕의 빈자리는 우왕(반야의 아들)의 몫이 되었다.

신돈과 공민왕이 '빠이빠이' 하고 우왕이 들어선 뒤 권문세족(4)이 중심이 된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세력과 권력의 모순을 혁파하려는 개혁파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웃나라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가 일어나 노쇠한 원을 압박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공민왕의 대중외교 기본방침은 ‘반원’이었다. 잘나가던 기황후(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를 등에 업는 기황후의 형제들은 원나라는 물론이요, 고려도 지 꼴리는 대로 쪼물딱거리려 했다. 공민왕은 그 꼬라지가 보기 싫어 죽을 지경이었다. 원이 슬슬 쇠퇴하자 공민왕은 친원 세력들을 치기 시작했고, 그에 위기를 느낀 친원 세력들은 공민왕을 제거하려 했다. 결국 사태는 친원 세력 싹쓸이에 성공한 공민왕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해 기존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권문세족을 아쌀하게 거시기해버리려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공민왕이 빠이빠이하자 권문세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왕을 앞세워 다시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시 꺼내든 외교카드는 바로 뻔하디 뻔한 ‘친원’카드였다. 어쨋거나 신돈과 공민왕 콤비에 의해 살짜꿍 전진한 역사가 순식간에 뒷걸음질 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반대하고 나선 이들은 바로 정몽주, 정도전, 박상춘등 YG패밀리, 아니 이색 패밀리들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였다. 그들의 요구는 ‘끝물인 원과 뭘 하자는 것이냐 씹세들아’라는 현실적인 제안이며, 기득권세력을 향한 정당한 일침이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내주는’ 논스탑 유배살이었다. 총알 유배 시스템을 통해 친원주의를 반대한 대부분이 즉각 유배 길에 올랐다. 그래도 정몽주는 운이 좋았다. 박상충과 전녹생등은 형벌의 후유증으로 유배 도중 숨을 거뒀다. 사실 정몽주는 운이 나쁜 적이 없었다.




Nothing Bad

정몽주에겐 나쁜 일이 거의 없었다. 스스로 나서 어쩌다 역적으로 몰린 김득배(과거에서 자신을 선발한 은인) 시신을 수습해 제를 지내도 별 탈이 없었고, 자신을 성균관 학관에 오르게 했던 신돈이 처형 되었을 때도 별 탈이 없었다. 친원 정책의 부활을 반대했을 때도 유배 갔다 와 별 어려움이 없이 복귀했다.

집에는 한섬의 곡식도 없고,
애덜은 춥고 배고프다 울고,
내가 어떻게든 끼니를 꾸리고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책만 보고
그래도 성공할거라 기대했는데,
집안에 광명이 깃들거라 생각했는데
훗날의 영광과 성공은 개뿔.
우리에게 남은 사람들의 웃음뿐.

이 가사는 계속된 유배와 유랑으로 가난에 지친 자신의 처지를 아내의 입을 빌어 풀어낸, 라임이 일품인 랩 ‘가난’(5)의 일부다. 정도전은 유배 3년, 완전 복권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의 4년간의 칩거를 통해 리얼 궁핍과 슈퍼 고독을 체험했다. 그러한 가난과 고독의 실존적 체험은 정도전으로 하여금 고려가 아닌 이성계를 선택하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전과 달리 정몽주는 2년뒤 언제 그랬냐는 듯 사신으로 복귀했다. 그의 학문적,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시대와 권력에 크게 거슬리지 않으려했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고려 말 공민왕 때도, 우왕 때도, 창왕 때도, 공양왕 때도 그는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다.



Show Must Go On.

너에게 모든 걸 뺏겨버렸던 마음이 다시 돌아오는 걸 느꼈지.
너는 언제까지나 나만의 나의 몽주라 믿어왔던 내 생각이 틀리고 말았소.

어쩌면 1392년 재활치료중인 이성계의 사저 사랑채에서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하여가에 대한 답가로 단심가를 받고서는 뒤돌아서는 정몽주에게 불러주었던 노래는 서태지의 하여가였을지도 모른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불 같은 승부사. 1392년 정몽주를 오함마로 보내면서 고려의 ‘쫑’을 고하게 한 그 남자. 태조 이성계와 실세 정도전의 푸쉬로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도전과 방숙을 깔끔하게 저승길로 보내버린 '1차 왕자의 난'의 주인공이었던 그 남자. 방숙의 빈자리를 차지한 방과를 재끼려던 방간(회안대군)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가볍게 제압한 뒤 왕위에 오른 그 남자. 여색이 짙어 간통질을 하고 지랄을 했던 장남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충녕대군(세종)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해 한글창제가 가능하게 했던 그 남자. 암튼 그 남자. 바로 이방원이다.


1400년 하윤등이 이방원을 세자로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더랬다.

‘정몽주의 난에 만일 정안공(이방원)이 없었다면 큰일이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정도전의 난에 정안공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정몽주는 조선의 건국을 방해한 구시대를 대표하는 간신이요, 정도전은 태조의 계비, 강비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던 겁대가리를 상실한 간신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 둘은 모두 이방원에 의해 이승과 굿바이. 이렇게 간신이었던 정몽주가 지조를 지킨 불멸의 충신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그 시작은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보내버린 태종(이방원)때였다. 복권도 태종 때 이루어졌다.


그러나 반대의 의견도 있었다. 공민왕 때 픽업되어 우왕과 창왕을 모두 모시고, 게다가 창왕을 폐위시킨 뒤 공양왕까지 모신 철새즘(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가 서식하는 주의)의 종결자. 그것이 바로 정몽주의 본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했던 것이 바로 ‘우왕신씨설’이다. 우왕(모니노)이 공민왕과 반야사이가 아니라, 신돈과 반야 사이의 씨라는, 곧 신씨라는 설이다. 이렇게 되면 정몽주는 공민왕(왕씨), 우왕(신씨), 창왕(우왕의 자식이니 곧 신씨), 공양왕(왕씨)을 모두 탈없이 모신, 철새 이인새, 김민새우원등은 명함도 못내밀 철새즘의 본원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의 우상화 과정에서 이 이유는 ‘우왕과 창왕이 씬시임을 몰랐을 것이다’는 것으로 가볍게 거세된다. 만약 ‘우왕신씨설’이 사실이라면 한때 신돈에게 견제를 받았던 이성계가 우왕이 신돈의 씨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이를 가장 중요한 학자이자, 정치인인 정몽주가 의심하지 않거나, 몰랐을 리... 없다.  고려 족보를 개족보로 만들기 위해 등장한 ‘우왕신씨설’은 정확히 입증된 바 없다. 허나 권문세족(5)을 무장해제 시키려 했던 공민왕, 권문세족을 등에 업은 우왕, 이성계에 의해 왕좌에 오른 공양왕 때도 모두 정몽주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Trouble.







정몽주와 이성계는 함께 개혁을 논한 절친(6)이었다. 권문세족들의 권력과 토지 독점. 반명친원의 외교정책. 불교의 폐단등이 주요 개혁사안들이었다. 무인인 이성계와 문인인 정몽주는 함께 전장을 누비며, 동시에 막사에서 토론하고 논쟁했다. 뒤이어 정도전이 합세했고, 정도전은 이성계의 브레인이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개혁을 함께 꿈 꿨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함께 그렸던 그들이 틀어지게 된 결정적 사건은 바로 위화도 회군이었다. 명나라가 고려의 북쪽 영토가 자신들이 나와바리라며 반환을 요구하자 최영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이를 반대했다. 오히려 반환은 커녕,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지역이 우리 나와바리라며 요동정벌을 주장했다. 이에 이성계가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격한다. 하지만 이성계와 5만군사는 압록강의 위하도까지 간 뒤에 다시 내려왔다. 이유는 심플하게 4가지만 들었다.


작은 나라가 큰나라(명)의 뜻을 거스를 수 없음.
농번기에 군사모집은 개뿔.
명과 싸우다보믄 오랑캐가 빈집 털이를 들어올 수 있음.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유행할 것임.


사실 이성계는 애초부터 요동정벌엔 관심이 없었다. 요동정벌을 강력히 요구했던 이는 최영이었다. 그러나 우왕은 최영을 아끼고 또 아꼈던 터, 자신의 옆에 두고 싶어했다. 해서 5만의 군사를 이성계에게 내어주고 대신 가게 했다. 한때 최영과 이성계는 최고의 무신 콤비였다. 이 콤비는 북으로는 홍건적, 남으로는 오랑캐를 거침없이 몰아냈다. 하지만 최고의 자리는 늘 최영의 것, 이성계는 만년 2인자였다. 어쨋든 이성계는 북진하라는 왕의 명의 거역하고 개성으로 회군했다. 군 통수권자의 명을 거역했음으로 군법에 의해 이성계가 최고형에 처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처벌은 커녕, 수도를 포위하고 재빠르게 선수 친 이성계는 일단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최영부터 작살내고, 곧이어 우왕을 폐위시켜 버렸다. 권력이 이동하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이성계가 기득권세력 붕괴를 위해 선택한 것은 바로 공민왕의 신돈이 추진했던 바로 그것. 토지개혁이었다.


정도전과 함께 이성계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조준은 토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전제개혁안, 즉 과전법을 내놓았다. 권문세족이 독점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여 신진사대부들에게 토지가 아닌 세금 징수의 권한인 수조권을 나누어 줌으로서 관료가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것을 막고, 동시에 권문세족의 권력을 무력화 시키는 수단이었다. 당연 보수세력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 중심엔 이색이 있었고. 제자 정도전은 반대편인 개혁진영에 서 있었다, 하지만 정몽주의 스탠스는 어정쩡 했다.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했지만 토지 제도의 개혁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렇게 정몽주와 개혁파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보수파에 있던 이들은 이성계에 의해 탄핵 후 유배되었다. 이색 역시 떨어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재분배, 혹은 국가로 귀속시키는 전제개혁은 계속 진행되었다. 1391년 새로운 토지대장이 반포되었고, 권문세족들이 지 꼴리는 데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몰수 뒤 재분배 되거나 국가에 귀속되었다. 땅을 빼앗겨 일개 노비로 전락했던 양인들이 신분을 되찾았다. 그러나 정도전의 회고처럼 토지개혁은 개혁의 중심에 ‘민’이 있는 완벽한 형태로 진행되지 못했다. 일분 권문세족에게 편중되어 있던 권력이 신진사대부에 넘어가는 형태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권력은 이성계 쪽으로 완벽하게 이동되었다. 이성계로의 권력이동이 서서히 확실해져 가면서 정치인 정몽주의 스탠스도 확실해졌다. 정몽주의 결론은 고려왕조를 지킨 뒤에 개혁을 하자는 것이었다. 정몽주가 변한 것이 아니었다. 공민왕, 우왕, 창왕을 거쳐 공양왕까지… 늘 그는 고려의 학자이자, 고려의 정치인이었다. 늘…


Again 1392.
이제 정몽주는 무너져가는 고려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 지키고자 하는 정몽주의 눈에 이성계는 고려왕조를 쪼물딱거렸던 기황후의 형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의 스승 이색을 유배 보낸 정적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는 이성계의 소식은 정몽주에게 이성계 패밀리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처럼 다가왔다. 정치인 정몽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빠르게 이성계의 핵심 브레인 조준과 정도전을 비롯해 남은, 윤소종, 조박등의 측근들을 탄핵, 유배길로 모셨다.



긴. 급. 호. 송


무릇 조직을 '박살'내기 위한 프로세스는 핵심의 제거에서 우두머리의 제거로 다단계스럽게 올라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핵심의 제거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정몽주의 작업은 올스톱된다. 이성계가 개성에 컴백했기 때문이었다. 정치인 정몽주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국가의 존망을 놓고 권력과 권력이 벌인 사투에서의 패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몽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몽주는 스페이드 에이스를 들고 있었다.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쥐고 있던 카드는 이방원이라는 조커였다.


정치인 정몽주는 에이스를 던진 판에서 실패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아무리 이성계의 신망이 두텁다 하더라도, 때는 혁명전야였다. 만약 정몽주가 카드를 보여주지 않고 판을 덮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성계의 옆에 정몽주가 있고, 정도전의 옆에 정몽주가 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조선왕조는 오백년이 아니라 천년을 갔을려나. 에이스를 던진 정몽주의 한수는 성공이었을까. 실패였을까. 만약 던지지 않았더라면 ‘지조의 아이콘’ 될 수 있었을까. 정도전의 곁에서 민심에 기반한 진짜 혁명을 이룰 수 있었을까.


고려에서 조선까지를 놓고 보면 포은 정몽주는 무너지는 왕조를 지키고자 한 ‘지조의 아이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만을 놓고 보면 그 공민왕 이후의 모든 왕들과 함께한 오랜 정치권력자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뭐 이 정도다. 정몽주가 꺼내든 칼은 제대로 휘두르기도 전에 부러졌고, 이방원이 꺼내든 오함마 한 방에 정몽주는 이승과 작별했으며, 그가 이방원 앞에서 불렀다는 하여가와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불러주었다는 백로가의 원작자는 명확하지 않으며, 그가 복권되고 ‘지조의 아이콘’ 되기 시작한 건 그를 저승으로 보낸, 자신의 권력에 그와 같은 상징적 이미지가 필요했던 태종(이방원)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믄 지금의 ‘지조의 아이콘’이란 이미지는 좀 오바일 수 있겠다.


필자의 생각은 뭐 그렇다는 것이다.



(1)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단심가는 정몽주가 아니라 백제여인 한주가 부른 것이라 주장
(2)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작자미상, 이희령의 약파만록(藥坡漫錄)에서는 연산군때의 김정구 작품이라 되어 있다.
(3)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충신을 일컫는 삼은 중 한 명.
(4) 원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한 백성의 등골을 뽑아먹는데 정통한 고려시대 문벌귀곡 가문.
(5) 삼봉집 4권. 가난을 변형한 것임.
(6) 이성계가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 삼개를 칠 때 정몽주도 함께 했다. 당시 서로에게 감화되어 절친이 됨.



붙임.
이 글의 일부 내용들은 김용헌의 ‘조선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을 참고, 인용하였다.


추신.
홍솨덕이가 정도전이 프로듀싱하고 이성계가 부른 역성혁명(조선건국)을 5.16 군사 쿠데타와 ‘고거이 고거’라고 했다지. 쌍팔년도 역사의식이라고 치부하고 말기에도 참으로 덜 떨어진 비유다. 지금이 조선시대냐. 무식하면 여럿 고생한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2012년 7월 9일 월요일

[들은 척 매뉴얼] 문어발 '릭 루빈'



들어가는 척하며… 아니 들어가며…

저는 일단 제 손을 떠난 후엔 글도, 리플도 보지 않습니다. 제 생각도 그저 여러 가지 중 하나일 뿐이고, 그러니 제가 써제낀 결과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죠. 선플이 있고, 악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절대 일희일비하지 않아요. 릴리즈 타이밍부터 홈플레이트를 보지 않고 바닥을 꼬라보는 전 메이저리그 일본인 투수 ‘오카지마’의 투구폼과 비슷한 거죠. 손 떠나면 끝이에요. 조때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게 인생이죠. 전 소중하니까요.
손 떠나면 끝이다.



어느덧 미적미적 세 번째를 맞이한 이 시리즈를 본 독자들이라면 저게 다 구라임을 단박에 알아채셨을 것이다. ‘손 떠나면 끝이라고’ 네버. 워낙 덤벙거리는 성격 탓에 보고 또 봐도 오타와 비문이 수두룩(그나마 편집부에서 손봐주니 그 정도다)하니 마빡에 업데이트 된 뒤로도 가끔씩 다시 읽어보곤 한다. 물론 리플도 확인한다. 꼼꼼히…


그 중 필자의 마음을 촉촉히 적신 리플이 있었으니, ‘들은 척 매뉴얼을 써먹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 ‘록 가수 몇몇 안다고 졸지에 사무실에서 영문과 졸업생으로 낙인 찍혔다’는 내용의 리플이 바로 그것이다. 본 필자, 뭐 대단한 게 아니고, 그저 음악 들으면서 주고 받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나누고 싶어 이 연재를 시작했다. 아 근데 나눌 사람이 없다니, 살짝 ‘척’ 한 번 했다 ‘왕듣보’로 낙인이 찍히다니… 이 가슴 아픈 두 개의 사연이 가뭄의 단비로도 적시지 못한 필자의 슴가를 촉촉히 적셨다.


필자, 가카의 내곡동 사저 매입만큼이나 중요한 이사를 앞두고 있다. 가카가 만들어주신 평온함과 은혜덕으로 전세 값은 4~5천만 원 정도가 올랐다. 이사는 가야 하겠고, 돈은 없다. 떠날 집도 내 것이 아니고 갈 집도 내 것이 아니다. 알몸으로 태어나서 아직도 알몸인 듯한 느낌이다. 멘붕이 수시로 면회를 온다. 허나 이 와중에도 써내고야 말았다. 독자들을 위해 ‘들은 척’을 시전할 단 한 사람이라도 만들어보자는 사명과, ‘들은 척’이 온전하게 ‘들은 척’으로 대접받게 되길 바라는 작은 바램을 담았다. 다만 지난주 필독 부편집장이 향후 1년치 고료쯤 되어보이는 아구찜을 쏜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먹을 때까지는 참 좋았던 아구찜.



현재 리플과 트윗을 통해 제보해주신 내용들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음을 알려드린다. 기회가 되면 제보해주신 내용들로 함 엮어볼 생각이다. 아무쪼록 많은 제보 부탁 드린다. 언젠가 독자들의 제보가 코너에 몰린 필자에게 한줄기 구원의 빛이 될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들은 척’을 위해 슬슬 몸들 풀어보자.




시작하기 전에.

2008년에 열린 50회 그래미 시상식과, 2012년에 열린 54회 그래미 시상식은 많이 닮았다. 각각의 시상식을 초토화시켰던 아티스트는 모두 여성 뮤지션이었고, 젊었으며, 주요 4개 부문 중 3개 부문을 싹쓸이 했고, 나머지 하나는 모두 남자 뮤지션(허비 핸콕, 본 아이버)들이 가져갔으며, 둘 여인 모두 영국 출신이었다.


2008년 50회 그래미 시상식. 최다 부분 후보에 오른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는 시상식이 열린 미국 LA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약물중독 때문이었다. 시상식에도 참가하지 못한, 알코올, 약물 중독의 24살의 퇴폐적 이미지의 이 아가씨에게 그래미는 주요부분 4개 중 3개를 포함에 총 5개의 트로피를 몰아주었다.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한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런던 스튜디오에서 공연을 펼쳤고, 그래미는 위성으로 이 실황을 중계했다. 부른 곡은 재치 있게도 ‘You Know I’m No Good’이었다. 물론 다음 곡은 ‘Rehab’.
영국에서 수상한 에이미 와인하우스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보여준 빈티지 사운드에 대한 대중의 환호와 평단의 극찬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예쁘고 몸매도 좋은 데다, 매력적이고, 성량도 풍부한 기존의 디바와는 다른 영역에 있는 새로운 유형의 디바가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연이은 스캔들과 알코올, 약물 중독, 재활이라는 가쉽의 주인공이 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빈 공백은 장르는 조금씩 달라도 다양한 유형의 여성솔로가 등장하면서 매꿔지기 시작했다. 코린 배일리 래(Corinne Bailey Rae), 사라 바렐리스(Sara Bareilles), 어 파인 프렌지(A Fine Frenzy), 그리고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가장 비슷하게 만들어진 더피(Duffy)까지… 모두 등장과 더불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초토화시킨 뒤 이듬해인 2009년에 열린 그래미 시상식 ‘올해의 신인’상 수상자에 호명된 이는 19살이 되던 해에 데뷔앨범 ‘19’를 발표한 아델(Adele)이었다. 2008년 전세계 음반 판매량 1위 더피를 제치고 아델이 수상한 것이다. 최고의 데뷔를 만들어낸 아델의 행보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다른 여성 뮤지션들과는 살짝 다른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곧바로 새 앨범 작업, 활동을 시작한 반면 아델은 서서히 다음 작품 준비에 들어갔다. 일부에서 소포모어 징크스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예상들이 튀어나왔다. 우려가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것이 확인 되는 데는 딱 2년 걸렸다.


올해 그래미는 2008년 그래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인공이 에이미 와인하우스에서 아델로 바뀌었을 뿐이다. 신인상을 제외한 주요부분 3개를 싹쓸이(신인상을 포함한 3개 부문이었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넘어서는 부문), 총 6개 부분의 트로피를 손에 쥐었다. 아델의 그래미였다 해도 손색이 없는 결과였다.
미쿡에서 직접 받은 아델



아델은 그래미를 휩쓸고 난 뒤 4-5년간 휴식을 선언했다. 애인과의 연애, 결혼, 출산 등의 이유를 들었다. 많은 이들이 아쉬움과 지지를 보냈다. 그렇게 아델이 무대를 서서히 떠나고 있을 때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비스티 보이즈의 아담 요크(Adam Yauch)가 침샘암 투병 끝에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한 달 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기념행사가 초청되었으나 아담 요크가 참석하지 못해 많은 팬들이 걱정하고 있던 차에 전해진 소식이었다.


이쯤 되면 독자들께서 눈치 깠을 것이다.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은 영국의 여자 솔로 뮤지션과 뉴욕의 백인 삼인조 힙합밴드를 엮은 이유를, 그리고 그 사이에 중첩되는 이름이 하나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아델의 슈퍼히트 앨범 ‘21’과 비스티 보이즈 최고의 앨범 ‘Licensed To Ill’의 프로듀서였던 바로 그 양반. 바로 미다스의 문어발 ‘릭 루빈’ 되시겠다. 자. 눈치덜 깠으면…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Adam Yauch (1964~2012)




들은 척 매뉴얼

PLAY LIST
1. Walk This Way – Run-D.M.C (Raging Hell)
2. Fight for your justify – Beastie Boys (Licensed To Ill)
3. Under The Bridge ? Red Hot Chili Peppers (Blood Sex Sugar Magik)
4. Aerials ? System Of A Down (Toxicity)
5. 99Problems ? Jay-Z (The Black Album)
6. The Long Way Around ? Dixie Chicks (Taking The Long Way)
7. Don’t You Remember ? Adele (21)
릭 루빈



릭 루빈 (Rick Rubin. 본명 프레데릭 제이 루빈 Frederick Jay Rubin)은 1963년 3월 10일. 뉴욕 롱비치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유대인이었으며, 아버지는 신발 도매업자,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이 평범한 유대인 친구가 슈퍼프로듀서가 되기까지 두 번의 훌륭한 만남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스티브 프리먼과, 대학 시절 만난 러셀 시몬스와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밴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릭 루빈은 스티브 프리먼을 만나 기타와 작곡연습을 배운다. 그 과정을 계기로 ‘더 프릭스’(The Pricks)라는 밴드를 만들어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고, 학교 기물인 4트랙 녹음기를 가져다가 ‘데프 잼'(Def Jam)이라는 레코드사를 지멋대로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은 참으로 단촐해 보였다.


뉴욕대에 진학한 릭 루빈은 호스(Hose)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며, 뉴욕 펑크씬에서 활동하는 몇몇 밴드들과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힙합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디제이였던 제지 제이(Jazzy Jay)를 만나 힙합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제지 제이로부터 소개받은 러셀 시몬스(Russell Simmons)와 의기투합, 정식으로 데프 잼 레코드를 설립하게 된다. 그게 1984년의 일. 1985년 드디어 데프 잼 레코드의 첫 앨범 엘엘 쿨 제이(LL Cool J)‘I Need A Beat’ 탄생하게 된다.


자. 뭐 이 정도면 누군가는 제와피의 프로듀서 박 사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프로듀싱한 앨범의 리스트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편집하느라 똥 빠진 Discography (출처 : 위키피디아)



나름 눈에 띄는 앨범만 체크해봐도 서른 개가 넘는다. 이 리스트는 릭 루빈이 앨범 전체, 혹은 일부를 프로듀싱한 리스트, 예를 들어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만천하에 알린 Blood Sugar Sex Magik의 경우 릭 루빈이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 했고, 믹재거의 솔로 앨범 Wandering Spirit의 경우 믹 재거와 릭 루빈 공동 프로듀싱. 저스틴 팀버레이트와 쉐릴 크로우의 앨범에는 각각 ‘(Another Song) All Over Again’, ‘Sweet Child O´Mine’, 이렇게 한 곡씩을 프로듀싱한, 그 모든 작업이 포함된 리스트 되시겠다.


살짝 살펴보자면, 일단 흑인만의 장르였던 힙합을 메인스트림에 우뚝 꽂아 넣은 기념비적인 앨범 두 장. 런 디엠씨의 Raising Hell과 비스티 보이즈의 Licensed To Ill이 눈에 팍 들어온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그에게 장르는 그저 거실과 방을 오가는 미닫이문 같은 것으로 보인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믹 재거, 자니 캐쉬, 탐 패티, AC/DC, 슬레이어, 쉐릴 크로우, 멜라니 C (스파이스걸즈 멤버),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시스템 오브 어 다운, 메이시 그레이, 제이 지, 림프 비즈킷, 위저, 샤키라, 닐 다이아몬드, 메탈리카, 조쉬 그로번, 고골보르델로(우크라이나 집시펑크 밴드), 그리고 아델까지.


그의 이 장황하고도 아름다운 리스트에 흠뻑 빠져 들은 척이고 나발이고 허우적거리게 될 수도 있다. 이럴 때일 수록 정신을 차리고 자신 있게 ‘척’ 할 수 있는 부분을 확실히 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릭 루빈, 음… 그 털쟁이’ 이 정도에서 끝나거나, ‘뭐 박 사장도 그 정도 하지 않나’ 정도로 귀결되는 허무한 ‘들은 척’이 될 공산이 크다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릭 루빈이라는 이름 석 자 투척한 후에 마하리쉬를 존경하는 나머지 신선과 같은 외모를 유지보수하고 있으며, 요가를 좋아하나 전혀 요가스럽지 않은 몸매의 소유자(근래 살이 빠진 듯해 보이기도 함)란 사실로 흥미유발. 힙합, 하드 락, 댄스, 컨츄리, 팝페라 등의 장르 불문, 일단 그의 이름이 걸렸다 하면 웬만큼은 먹어주고 들어가는 실력에, 앞서 거론한 몇몇 슈퍼스타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집중을 시킨다. 가볍게 런 디엠씨와 비스티 보이즈의 앨범은 ‘흑인의 전유물’로만 인식되던 힙합을 백인들에게까지 각인시킨 계기였다는 정도의 멘트도 살짝 함 던져주자.(물론 초기엔 흑인문화를 갈취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여기까지 해냈다면 8부 능선은 넘어온 것. 릭 루빈의 만들어 낸 앨범 중 가장 드라마틱했던 앨범, 딕시 칙스의 Taking the Long Way로 본격적인 ‘들은 척’을 시전하면 된다.




들은 척 세부 스킬.

Dixie Chicks



1989년 달라스에서 결성된 여성 컨트리 밴드인 딕치 칙스(Dixie Chicks). 소규모 공연을 전전하던 무명시기를 거친 뒤 멤버교체와 리드보컬 나탈리 메인즈의 영입을 통해 현재의 3인조의 틀을 갖춘 뒤, 1998년 Wide Open Space로 뜨거운 데뷔를 하게 된다. 물론 미국 내의 얘기다. (당시 국내엔 앨범조차 발매되지 않았다). 가볍게 천만 장을 팔아제낀 후 이듬해 발표한 FLY로 또다시 천만 장을 팔아 치운다. 컨트리에 팝을 가미해 보다 많은 대중에게 어필한 결과였다. 물론 마냥 순탄하진 않았다. 엄청난 성공은 레코드사와의 로열티 배분 분쟁으로 이어졌다. 지루한 분쟁이 마무리 될즈음 새로운 앨범 Home을 선보인다. 플릿 우드 맥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Landslide’가 곧바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트리플 히트가 기정사실화되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2003년 런던 공연 전까지는 말이다.


2003년 3월 10일. 영국 런던에서 공연 중 나탈리 메인즈가 이런 멘트를 날린다.

‘우리는 미국의 대통령이 텍사스 출신이라는 부끄럽다’



이때는 2001년 북한과 이라크, 이란의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정부가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를 통한 세계평화이바지라는 참으로 미스유니버시티한 이유로 논란 속에 이라크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 말을 영국에서 했으니, 니덜도 똑같다는 은유가 담긴 발언이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던 사안이었고, 나탈리 역시 가볍게 던진 멘트였음으로 크게 문제될 것 없어 보였던 이 발언의 파장은 예상과 다르게 겁나 커지게 된다.


의미있지만 그렇게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이 멘트는 자국의 평화가 곧 세계의 평화라는 미국 내 패권주의 정서와, 딕시 칙스가 가장 미국적인 장르인 컨트리를 하고 있었다는 점. 게다가 텍사스는 컨트리의 성지와 같은 곳이라 것. 디트로이트에서 미국인의 고용을 약속한 가카처럼, 딴나라에서 자국의 대통령을 씹었다는 이유 등이 맞물리면서 큰 파장을 일으킨다. ‘딕시 칙스 = 후세인’이라는 플랜카드까지 등장하기 시작한다.


물론 해명과, 부시에게 부끄럽다고 한 멘트에 대한 사과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딕시 칙스의 음반은 판매금지는 물론이요, 그들의 노래가 방송에 나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쓰레기통에 앨범을 버리는 모습이 공중파에서 보도되었고, 극우파들에 의한 온갖 협박이 등장했다. 딕시 칙스의 세 멤버는 투사가 아니었다. 컨트리 음악을 하는 다분히 미국적인 뮤지션이자, 동시에 자녀를 둔 엄마이기도 했다. 무시 못할 만큼의 우익성향의 대중들에게 외면 받기 시작했고, 앨범 판매량과 콘서트 관람객의 숫자가 급감했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탈리가 ‘부시가 부끄럽다’는 멘트를 한 10일 뒤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작전명은 ‘이라크의 자유’였다. 전쟁은 26일만에 끝이 났다. 명분이었던 대량학살무기는 확인되지 않았고, ‘이라크전쟁=세계평화’라는 공식은 증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결국 후세인은 잡혔다. 전행이 끝난 뒤 딕시 칙스는 전쟁을 비난하는 누드사진을 찍었고, 엔터테이먼트 위클리는 그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전쟁을 끝났지만 쉽지 않은 상황은 3년간 계속되었다.
비난 여론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았고, 협박도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예정되어 있던 (취소되지 않은) 공연들을 계속 해 나갔고, 조금씩 다음 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주변의 상황의 호의적이지 않아 다음 앨범의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딕시 칙스에게는 ‘컨트리+팝’의 크로스 오버라는 그들의 장기를 맘껏 살려줄 확실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딕시 칙스의 선택은 ‘릭 루빈’이었다. 여성 삼인조 컨트리 밴드의 제안에 릭 루빈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이력엔 이미 컨트리계의 레전드, 자니 캐시(Johnny Cash) 앨범의 프로듀싱이 들어가 있었다.


릭 루빈은 채드 스미스(Chad Smith.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드러머)등의 절친들을 끌어들였고, 동시에 존 메이어(John Mayer), 보니 레잇(Bonnie Raitt)등 정상급 뮤지션들의 조인도 준비했다. 그렇게 딕시 칙스의 다음 앨범 Taking The long way는 릭 루빈에 의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6년,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등장한 딕시 칙스의 새 앨범은 발매 즉시 빌보드 1위에 오른다. 첫 번째 싱글 커트 된 곡은 'Not ready to make nice’였다. 릭 루빈과의 협업이 더할 나위 없었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임과 동시에 그간 그들을 괴롭혀 온 세상에 대한 항변이기도 했다.


‘털스멜’까지 사랑하는 이 양반은 누구게?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싹쓸이했던 2008년으로부터 1년 전, 2007년 그래미 시상식의 주요 4개 부분 중 올해의 신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 부분의 주인공은 바로 딕시 칙스였다. 전쟁의 끝이 결국 잔혹한 허상에 불과했다는 여론도 그들의 수상에 한 몫 했다. 주요 부분 중 올해의 레코드와 올해의 앨범은 뮤지션과 프로듀서, 엔지니어에게 주는 상이다. ‘릭 루빈’이라는 딕시 칙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 확인된 것이다.


전설적인 포크 뮤지션 조안 바에즈의 ‘세 명의 용감 무쌍한 언니들’이란 소개를 받고 등장한 딕시 칙스. 자신들의 노래 제목에 빗댄 나탈리의 수상소감은 이러했다.

‘나는 더 좋아질 준비가 되어있다. (I'm ready to make nice!)… 우린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자유를 더 누려야 한다.’

딕시 칙스는 얼마 전 공연실황을 발매하는 등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릭 루빈은 ‘마이더스의 문어발’답게 여전히 장르를 불문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수많은 슈퍼 뮤지션들이 릭 루빈은 찾고 있고, 릭 루빈은 능력을 갖춘 수많은 신인들을 픽업하느라 여전히 정신이 없다. 그리고 그의 외모는 여전히 정신 없어 보이지 않는다. 나탈리는 릭 루빈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 했다.

‘그는 음악을 물건 찍어내듯 생산하지 않아요. 그는 음악이 발견되게 하는 능력과 인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생각해보니깐 그는 아마도 Guru인 것 같아요’.

일단 음악이 나오는 곳이면 릭 루빈이라는 문어발에 뭐든 하나 걸리게 되어 있다. 일단 하나 물리면 준비된 ‘들은 척’을 시전하도록 하자. 늘 말하지만 성공은 보장 못한다. 아무쪼록 이번 주에도 독자들의 ‘들은 척’의 무사 성공을 빈다.



The Long Way Around ? Dixie Chicks




** 딕스 칙스의 이야기는 영화 ‘Dixie Chicks : Shut Up And Sing’으로 영화화 되었다



 

2012년 7월 2일 월요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리부트의 시작에 대해 감흥이 오지 않았던 이유는 이제와서 상당히 원시적으로 보이는 슈퍼히어로의 능력보다는 사실, 토비 맥과이어와 커스틴 던스트 커플에 물릴대로 물렸기 때문이었어. 다분히 개인적인 의견일지몰라도, 역대 히어로 프랜차이즈 중 가장 비호감 배우를 내세운, 그러믄서도 뽑아묵을 거 다 뽑아묵은 시리즈가 바로 스파이더맨 아니었나, 마 이래 생각하고 있는 거지.

감독은 샘 레이미에서 마크 웹으로 바뀌었고, 주인공은 토비 맥과이어에서 앤드루 가필드로, 커스틴 던스트에서 엠마 스톤으로 바뀌었어. 결론은...

음... '살아있네'

나 다른  걸 다 떠나서, 가타부타 다 필요없이, 앤드루 가필드+엠마 스톤 나오는 시리즈로 계속간다믄... 나도 계속 볼래. 마크웹이 다시 메가폰 든다믄 더할나위 없고...

극장을 나올때 느낌은 슈퍼히어로 활극 롤러코스터를 보고 나온 느낌이 아니라,  옛날에... 그러니까 한 이십년 전쯤에 TV로 베버리힐즈의 아이들 첫회를 본 느낌이랄까.

나 사실 이 영화, 아내가 출장간 탓에 삼십대 중반 사내 셋이서 봤는데... 나머지 둘은 별로레. 3D는 어지럽고, 활극은 만족스럽지 못하데. 그러고 끝이야. 이거 아내랑 보러 왔어야 하는데 말야.

주인공들의 연애질에 대한 궁금함으로 다음편이 기다려지는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는 처음이야. 이거 어떻게 기다리지. 베버리힐즈의 아이들이라도 다시보기 해야하나. 참놔. 영화한편 보고나서 별게 다 걱정이야. 때 되믄 나올텐데 말야.

딱 한마디만 더...

'엠마 스톤. 쵝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