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6일 목요일

[좌충우돌세계사] 세르베투스 타죽다.




원스 어 폰어 타임 인 에수파냐…


페르난도와 이사벨라. 그리고 콜럼버스


아라곤의 왕자였던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의 왕녀인 이사벨라와 결혼, 아라곤의 왕위에 오른다. 뭐 이 결혼을 ‘에스파냐’의 통일의 시작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페르난도 2세는 지 자식을 가지고 정략적 결혼을 진행시킴으로서 유럽에서 아라곤-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다. 독자인 후안 왕자를 신성로마제국 황제 딸래미인 마르가레테와 혼인시켰고, 둘째 딸래미 후아나는 역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아들래미 펠리페 대공과 혼인시켰다. 이에 앞서 장녀 이사벨은 이미 포르투갈의 왕자 아폰수에게 시집을 보냈다.

바야흐로 때는 1497년, 아라곤-카스타야 연합왕국은 이로서 가카와 효성, 가카와 한국타이어 같은 포르투갈, 신성로마제국과의 긴밀한 동맹을 이뤘다. 예나지금이나 졸라 아름다운 사돈의 관계들은 이런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사위가 죽고, 외손주가 죽고, 큰딸도 죽고, 프랑스 루이 12세의 질녀와 재혼해 낳은 아들도 죽었다. 결국 1506년 4월, 스페인 통치권은 딸 후아나와 사위 펠리페에게 넘어갔다. 허나 같은 해 9월 펠리페가 세상을 뜬다. 그러자 펠리페가 죽자 남편을 사랑했던 후아나의 멘탈이 붕괴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로 인해 후아나는 남편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은 채 마차에 싣고 여러 수도원을 전전했다. 재밌는 건, 펠리페의 아랫도리 제법 자유분방했던 탓에 수녀원으론 절대 몰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은 영혼이 수녀를 유혹할지도 모른다는 ‘소울의부증’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후아나는 미친 채로 40여 년간 스페인 여왕으로 남아있었지만 1510년 스페인 의회는 페르난도 2세를 왕국의 관리자로 임명하였다.




 
후아나 라 로차(미친 후아나)를 그린 영화 ‘광녀조앤’



이렇게 유럽 최고의 명문 왕가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슬슬 태동할 무렵, 그 이듬해인 1511년,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라는 똑똑한 양반이 에스파냐 나바라주에서 태어난다. 스페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의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 양반이 제네바의 광장에서 자신이 쓴 책 ‘그리스도교 회복’의 원고와 함께 산 채로 홀랑 타죽을 줄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종교개혁가인 칼뱅의 눈앞에서 말이다.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세르베투스의 출생년도는 1509년이라는 설도 있다. 허나 그게 그리 중요한가. 초단위로 수천 수만 개의 정보가 이동하는 네트워크 시대에도 4-5살은 속이고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천지인데 뭐. 세르베투스가 1509년에 태어났든, 1511년에 태어났든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야 엄친아였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말했듯 그는 스페인 의학사에 꼽히고도 남는 의학자이며, 동시에 종교인이며, 동시에 법률가였다. 어린 나이에 그는 모국어는 물론 라틴어, 희랍어, 히부리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하였으며, 15세에 성경을 원문으로 독파하고 수도사가 됨으로서 종교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이단으로 낙인찍히긴 했어도…

그럼 수도사가 된 엄친아 세르베투스는 어쩌다 이단으로 낙인찍혀 홀랑 타 죽게 되었을까. 그가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종교인으로 기득권을 누리며 살지 않고 종교를 비판하게 된 계기는 바로 1530년 2월, 볼로냐에서 거행된 샤를 5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관식에 참여하는 세르베투스는 교황의 거만과 허세, 세속에 찌들고 타락한 교황을 맹종하는 황제를 본 뒤, ‘신성한 종교가 이러다가는 조때겠군.’이라 생각하고는 후원자를 떠나 리옹, 제네바 등을 돌며 종교개혁 지도자들을 잇달아 만나고 댕긴다.



 
저 뒤로 화형 당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저 친목삼아 만나고만 댕겼으면 좋으련만, 세르베투스는 종교가 곧 권력이었던 시대에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를 상대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뉴끌리어 밤’를 날렸던 것이다. 1531년에 ‘삼위일체론의 오류에 대하여, 제7권’ (De Trinitatis erroribus libri vii)을, 1532년에 개정판인 ‘삼위일체에 관한 대화, 제2권’(Dialogorum de Trinitate libri ii)을 잇달아 발간한다. 그러나 당시로선 그 누구에게도 인정 받을 수 없었던 이 혐오스럽고(?) 시뻘건(?) 책은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 발간은 되었으나, 살 수는 없는, ‘파리의 나비부인’과 같은 뭐 그런 것. 하지만 그가 요주의 인물, 제거 대상으로 찍히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눈치도 빠른 엄친아 였다. 그는 재빠르게 빌라노바루스(Villanovarus)로 이름을 바꾸고 프랑스 리옹으로 튄다. 수 년간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던 그는 1538년 파리대학 의학과에 입학한다. 이렇게 미인은 박명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그가 의학과에 입학한 건 단순한 호기심이나, 애정 이상의 선택이었다. 그는 대주교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의학자로서 폐를 통한 혈액순환을 최초로 기술한다. (심장과, 동맥, 정맥, 순환과 생성등의 전반적인 이론은 1628년 영국의 윌리엄 하비에 의해 발견/정리된다.) 더불어 지리, 천문학, 예언에 관한 책들을 출판한다. 어쩌면 리옹에서 빌라노바루스로 살았던 이 몇 해야 말로 세르베투스에게 있어 가장 평온했던 시기였을지 모른다.

진짜 비극은 1546년 자신의 사상을 보충하여 개정한 ‘그리스도교 회복’(Christianismi Restitutio)의 원고를 칼뱅에게 우편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뜻을 담아 전하면서 시작된다. 세르베투스는 당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일인자인 칼뱅과의 맞팔을 통해 폭풍 멘션을 주고받고 싶었던 것이다.

1509년 프랑스 북부에서 태어난 칼뱅 (장 꼬뱅Jean Cauvin, 칼뱅의 본명)은 훗날 16세기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중심에 서있던 개신교(그중 장로교)의 지도자가 된다. 그 역시 세르베투스와 마찬가지로 엄친아. 어린 나이에 출세와 성공이 보장된 오를레앙 대학의 법학과에 턱하니 붙는다. 어디 그뿐인가. 인문학과 역사학, 성경의 해석 등을 두루두루 섭렵하며, 1535년 26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출간해 개신교 교리의 기반을 다졌다.


제네바의 신정정치를 이끈 E4(ELDER). 파렐.칼뱅.베자.녹스(좌측부터) 
제네바의 신정정치를 이끈 E4(ELDER). 파렐.칼뱅.베자.녹스(좌측부터)


이듬해인 1536년. 제네바에서 설교자 초빙된 칼뱅은 3개월 만에 개신교 개혁에 필요한 규정들을 시의회에 제출하였고,(물론 통과되었다), 곧이어 기본원칙이 담긴 교육서인 ‘교리문답서’를 제출한다. ‘오직 신앙뿐’ ‘오직 성서뿐’이라는 2대 원칙을 내세운 살벌한 제네바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종교개혁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갔고, 그 중심에서 칼뱅은 강력한 기득권과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영적 과잉의 시대에, 1541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중심에 있던 칼뱅에게 1546년 드디어 세르베투스가 들이댄 것이다. 그거도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믄서 말이다.

삼위일체란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으로 존재하며, 그것이 곧 하나라는, 예수가 곧 하느님이라는 것. 이 교리는 카톨릭이던 개신교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교리다. 근데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대해 성경에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그러므로 무조건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 개신교의 교리에 어긋나며,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는 별개라고 주장했다. 그러니 종교개혁의 집행자이자, 개신교의 수장이었던 칼뱅이 최측근인 파렐(Farel)에게 이런 내용의 멘션을 날리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 세르베투스는 칼뱅과 맞팔 뒤 폭풍멘션을 주고받고 싶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가지고 붙어볼 거면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유행과도 같았던, 부패한 절대권력인 카톨릭에 대항한 종교개혁의 수장인 칼뱅이 적임자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칼뱅은


 


이런 멘션을 보내오는 세르베투스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직접 만나서 오프에서 함 토론하자 제안했지만 칼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2년여 동안 진행되었던 서신교환은 이렇게 끝난다. 세르베투스를 블락한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칼뱅을 비난한 한 출판업자를 불로 달군 쇠꼬챙이로 혀에 구멍을 내어 추방시키는등 종교개혁은 상당히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형태를 띄었다. 칼뱅 이전의 종교개혁가인 루터의 경우 ‘이단’과 ‘실제 사회에 피해를 가하는 집단’을 분리해 이단의 경우 사법권을 행사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했던 반면, 칼뱅의 경우 칼뱅반대가 곧 이단이자 사탄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반면에 세르베투스는 앞서 언급했듯이 이 시기 프랑스 리옹에서 주교의 주치의(비엔나에서 였다는 설도 있음)로 조용히 활동했다. 그러나 1553년 세르베투스는 칼뱅에게 보냈던 원고의 완성본인 기독교 강요에 대한 반론이자, 카톨릭, 개신교 모두를 비판하는 ‘그리스도교 회복’를 들고 나타났고 곧바로 출판업자와 함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에 회부된다.



종교재판에 회부된 출판업자와 세르베투스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묵비권을 행사한다. 발간된 일부는 세르베투스의 가명인 빌라노바누스로 되어있었고, 세르베투스와 출판업자는 한 목소리로 ‘우린 그런책 낸 적 없다’고 우겼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재판에서 세르베투스는 사형을 선고 받는다. 일전에 칼뱅과 주고 받았던 원고가 칼뱅에 의해 종교재판소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똑하고 민첩하기까지 했던 엄친아 세르베투스 아니던가. 역시 감시의 소흘함을 틈타 탈출에 성공한다. 이단을 놓친 로마교회 재판소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의 초상을 앞에두고 ‘천천히 산 채로 태워 재로 만든다’는 사형을 선고하며 끝이 난다.



 
이런 분위기는… 아니란 거쥐.


그런데 탈출에 성공한 세르베투스는 그해 8월, 제네바의 거리에서 연행된다. 제네바. 바로 칼뱅이 있는 바로 그곳. 조갑제횽아가 주석궁에서 냉면 잡숫다 연행된 시츄에이션과 흡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세르바투스가 제네바에 등장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그에게 칼뱅은 운명적 연적이라는 것이다. 직접 만나 해결하지 않으면 도저히 끝나지 않을 논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스페인 출신인 세르베투스를 돈키호테에 비유하곤 한다. 세르베투스가 칼뱅의 목회에 목숨을 걸고 버젓히 참석했다는 썰은 이런 이유로 등장한다.

두 번째는 제네바 의회가 칼뱅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네바 시의회가 칼뱅에게 적대적이어, 가끔 세르베투스의 비판을 빌어 칼뱅을 공격하기고 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가정을 긍정적으로 보진 않는다. 세르베투스가 바보냐. 이미 세르베투스는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의 이단이자, 악마였다. 그런 이를 제네바시의회가 보호해준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이미 때는 제네바에서 종교개혁가로서의 칼뱅의 지휘가 막강하던 시기이자, 앞서 말했듯 칼뱅에 대한 가벼운 비판조차 용납되지 않던 사회였다.

세르베투스는 잡혔다. 그를 가장 필요로 했던 제네바에서 말이다. 곧이어 시의회 주관으로 재판이 열린다. 재판이 진행되며 칼뱅과 세르베투스의 법정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시의회는 재판에 대해 제네바와 자매관계에 있던 네 도시(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에 문의하기도 했다. 네 도시는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 베른의 경우 ‘우리 같으믄 화형이삼’이라며 구체적인 답변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렇게 두 달이 걸린 재판은 결국 제네바 시의회의 삼일간의 최종논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가장 고통스런 사형’인 화형을 선고하며 끝이 난다. 이로서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서 칼뱅에 의해 종교적 사형을 당한 최초의 케이스가 되었다.


 
이렇게 타죽는다.


1553년 10월 27일 샹펠(Champel)의 화형장. 화형에 필요한 집과 나무, 그리고 그의 원고가 차곡히 쌓여 있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집과 나무, 그의 원고는 물론이요, 그의 살덩어리도 서서히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어떤 문헌에서도 확인 할 수는 없다만, 아마도 화형이 거행된 당일의 날씨는 화형에 적당한 화창한 날씨였을 것이다. 화창한 늦가을, 세르베투스는 고통 속에 타 죽었다.

칼뱅은 화형장에 오지 않았다고도 하고, 사형 직전 세르베투스를 찾아가 ‘저주나 받아라’고 호통을 쳤다고도 한다. 칼뱅의 추종자들은 칼뱅이 ‘화형’만은 면하게 하기 위해 일종의 구명을 펼치기도 했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화형은 칼뱅이 로마교회에 세르베투스의 원고를 넘겼을 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몰래 탈출이라도 시켰다면 모를까, 설사 했더라도 의미없는 규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당시 가장 고통스런 처형을 당했다. 그 이유는 바로 ‘다름’과 ‘다름’을 행사한 ‘자유’ 때문이었다. 종교를 강요하던 시기에 강요를 거부했고, 오직 종교였던 시기에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350년이 지나 칼뱅의 후학들이 세르베투스를 태워 죽인 바로 그 자리에 속죄비를 세웠다.



 
속.. 죄.. 비

우리의 큰 종교 개혁가인 깔뱅을 존경하고 감사하는 그의 후손들은 개혁과 복음의 참된 원칙에 따라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거슬려 행한 그 시대의 실수이기도 한 그의 실수를 정죄하면서 이 속죄비를 세운다. – 1903년 10월 27일

표현의 ‘자유’를, 정치적 ‘다름’을 인정받지 못해 한 인간이 처형당했다. 350년이 지나서야 본인이 아닌 그의 후학들이 실수를 인정했다. 하지만 칼뱅은 여전히 역사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고 있고, 세르베투스는 초라한 ‘속죄비’ 만큼이나 역사의 기억 저편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그건 카스텔리오도 마찬가지였다.




1515년생 카스텔리오, 그는 24세 약관의 나이에 제네바 개신교학교 교장에 임명된다. 그의 교장 임명을 승인한 이는 바로 칼뱅. 그러나 카스텔리오는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접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한 인간을 죽인 것일 뿐이다.”

카스텔리오는 ‘이단자에 관하여’, ‘칼뱅의 글에 반박함’ 등의 저서를 써내지만, 칼뱅의 지시에 의한 검열로 인해 인쇄되지 못한다. 게다가 세르베투스에 이어 화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카스텔리오는 48세의 나이에 위경련으로 급사한다. 누군가를 이를 두고 ‘다행’이라고도 한다.



 
카스텔리오


속죄비가 세워지고 난 후 정확히 100년이 흘렀다. 칼뱅의 자료들은 수도 없이 넘쳐나지만 세르베투스의 자료는 졸라 찾기 어렵다. 역사란 공평해야 한다. 아마 그 정도를 우린 상식이라 말하는 것일 게다. 세르베투스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이제 ‘이단’과 ‘악마’는 없는가? ‘자유’와 ‘다름’은 온전하게 인정받고, 보호 받고 있는가? 만일 ‘NO’라 답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여전히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의 반증일지 모른다. 난 그저 이 질문을 던지고 싶어 달려왔을 뿐이다. 그리고…

2012년을 살고 있는 나의 대답은 안타깝게도 ‘NO’다.



끝으로, 1832년에 태어난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 대공은 1867년 6월 19일 멕시코 자유파에 의해 처형되었다.



* ‘처형모임’라는 듣보 사조직이 있다. 내기로 한 술값을 안 낸다거나, 조금 먼저 취한다거나 하면 돌아가면서 서로를 처형하겠다며 다소 하드코어한 농을 던지는 재미진 모임이다. 한참 남았지만 10월 27일엔 모임을 가져야겠다. 다행히 아직 처형된 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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