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8일 수요일

진짜는 남훈이 아니라 안감독이다.




어제 춘심애비의 글은 슬램덩크의 캐릭터를 통해 곽노현사건에 대해 진중권을 필두로한 진보진영 내부의 논쟁을 풀이함으로서 많이 이들의 보다 쉽게 이 문제에 본질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왔다고 본다. 왜?. 기존에 진중권 옹호, 혹은 반대의 글들은 대부분은 먹물 좀 먹었다고 쪼개는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논쟁이 진행되믄서 여론과의 간득은 벌어진다. 논쟁으로 인한 파열음만 소음처럼 출력될 뿐, 합의는 도출되지 않는다. 아니 근접해가지 못한다. 이게 다 니들 잘난 탓이다. 허니 좀 쉽게 가자. 많은 이들이 스무쓰하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때 비로소 근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거다… 흠…


춘심애비는 어제 풍남고 남훈을 끌어들여 논쟁을 풀어냈다. 하지만 집지 못한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늘 앉자만 있는 ‘켄터키후라이드 할배’ 바로 북산의 안감독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본인 참~ 즐겨보는 메이저리그 동영상 함 때려보자.




이거 뭐냐.

작년에 있었던 메이저리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홈경기. 투수 아만도 갈라라가는 퍼펙트게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단 한명의 타자도 진루시키지는 않아야 달성되는 퍼펙트게임은 당시 메이저리그 역사상 21명밖에 하지 못했던 졸라 씨바스런 기록, 이걸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것도 9회말 투아웃, 헌데… 심판 짐 조이스의 오심으로 퍼펙트게임이 한순간 날라갔다. 짐 릴랜드 감독이 바로 튀어나갔지만 번복되지 않았다. 역사적인 기록은 그렇게 한순간에 ‘심판’ 때문에 날라갔다. 그리고 경기 이후 그 판정은 오심임이 확인되었다.



눈물을 흘리는 짐 조이스.



 화해하는 훈훈한 짐 조이스, 갈라라가.



다음날…

짐 조이스는 갈라라가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왜?. 앞으로 삼대는 칭찬만 들어도 될만큼 졸라 욕먹었거든, 오죽하면 백악관에서도 '졸라 슬프다'는 성명을 다 냈을까. 어쨌든. 심판은 사과했고, 선수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퍼펙트게임은 날라갔다. 그러니까 모든 게임에서 ‘심판’은 승패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시말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심판이 '팽'하믄 조땔수도 있다는 말이 되겠다.


풍전의 남훈이라 했던가.

앞서 말한 메이저리그의 예도 디트로이트였지만, 90년대 NBA, 그러니 마이클조던, 스카티 피펜, 호레이스 그랜트라는 핏덩이 불스 삼각편대가 슬슬 주름 좀 잡던 시절, 그들조차 깨깽거리게 했던 팀, 바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였다. 뭐 한마디로 주전 다섯명이 모두 남훈인 팀(남훈은 당시 디트로이트의 데니스 로드맨을 롤모델로 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BAD BOYS라고 했을까. 천하의 조던도 오줌 저렸던 바로 그 팀. 그러니까 남훈이란 캐릭터, 스포츠 캐릭터로서 그리 새롭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거다. (그러고 보니 모두 디트로이트, 각하가 침 질질 흘리며 미쿡 빨아준 곳도 바로 디트로이트, 아! 멋쟁이 가카.)


 어훜, 숨막혀~!


여기서 우린 남훈이 코트를 누비고 있음에도 가만히 앉자만 있는 안감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감독이 가만히 자신의 궁디보다 작은 의자에 의지해 상당히 불편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의자가 똥꼬에 붙어있기라도 한 모양으로 꿈쩍도 안했던 이유는 바로 ‘경기는 공정’했기 때문이다.

헌데 만약 심판이나, 연맹이 편파적이거나, 혹은 매수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남훈에겐 미안하지만 이렇게 보면 된다. 공정택이 남훈이고, 곽노현이 강백호다. 심판은 검찰이고, 연맹은 검찰을 포괄한 공권력이다. 남훈의 푸싱은 ‘푸싱’이고, 강백호의 푸싱 ‘푸싱+테크니컬파울+경고’인 상황인 것이다. 강백호는 살짝 항의했다 바로 퇴장, 남훈은 4반칙으로 경기를 끝까지 뛴다.(물론 공정택은 구속되었지만)



아니. 심판이 대놓고 저쪽편이면 게임은 시작도 하기 전에 '쫑'이다. 


강백호에게 애초부터 남훈처럼 ‘푸싱’하지 마라고 할 수 있다. 악의적인 파울이 악의적인 파울로 지적되고, 일반적으로 넘어갈 수 있을만한 푸싱은 푸싱 그자체로 판정되는 공정한 게임이면 당연 ‘악의적 푸싱’은 안된다. 헌데 안타깝게도 강백호(곽노현)은 악의적으로 보일만한 푸싱을 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푸싱+테크니컬파울+경고’먹고 보너스 원샷에 공격권까지 준다. 그리고 일반적 항의를 한 강백호를 퇴장시키고, 연맹은 강백호를 징계시킨다. 푸싱 이상의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자. 만약 이런 불공정하고 씨바스런 게임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안감독의 궁디는 여전히 무거웠을까. 연맹에서 강백호의 징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안감독은 그냥 멍때리고 있었을까. ‘음… 자네의 실수네.’이러면서…

심판(검찰)과 연맹(공권력, 언론)이 매수당한 이 상황에서, 푸싱을 저지른 강백호(곽노현)을 놓고 우린 어떤 스탠스를 취했어야 옳은가. ‘이 빙신 남훈이랑 똑같은 놈아’라며 코트밖으로 내몰았어야 하는가. 서태웅도, 정대만도, 송태섭도, 채치수로 졸라 다 나가떨어지고 있는데, 안경은 여전히 ‘하지말라’ 그 타령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안감독은 그 광경은 보고도 ‘궁디 무거운’ 탓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우선 항의했어야 한다. 흥분한 채치수나, 정대만 이런 놈들을 대신해 안경이 먼저 나서서 논리적으로 항의하고, 그래도 안되면 안감독이라도 뛰쳐나갔어야 한다. 그건 강백호(곽노현)의 푸싱이 푸싱이 아니라는 항의가 아닌, 푸싱을 정확히 푸싱이라 판정하라는 항의를 했어야 한다. 언제? 심판이 판정하는 바로 그 순간, 문제가 생긴 바로 그 순간 들고 나갔어야 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자, 곽노현을 지지하는, 지지하지 않더라고 매수당한 심판과 연맹에 항의했어야 하는 우리들이 취한 스탠스가 무엇이었는지. ‘강백호 빙신’바로 그것이었다. 아무것도 못한 사이, 남아있던 주전 네명은 반병신이 됐다. 게임엔 졌고, 강백호는 연맹의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자신이 퇴장당하거나, 아님 몰수패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고 안감독은 그 무거운 궁디를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항의했어야 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한 몫은 안감독과 팀이 지면되는 것이었다. 편파적인 심판과, 불공정한 게임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관객은 편파적인 심판에게 야유하고, 동시에 안감독을 지지했어야 옳다. 이미 벌어진 강백호의 푸싱에 대한 논의는 그 다음이란 것이다.

아마 강백호의 징계수위는 ‘영구제명’정도가 될 것이다. 이게 바로 곽노현교육감사건의 현재다. 매수당한, 편파적인 연맹은 강백호는 영구제명 시키거나, 2-3년정도의 출전정지 정도를 때릴 것이다. 영구제명이면 강백호 다시 예전 일상으로 돌아가 싸움박질이나 할테고, 그나마 2-3년 출전정지라 해도 선수생명은 끝났다고 보면 된다. 언론은 영구제명일 경우 올바른 징계였다 할테고, 2-3년 출전정지면 선수생명을 배려한 합리적 선택이었다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안감독은 무엇을 해야 하나. ‘자네 때문에 좆됐군’이라며 강백호 타령만 하고 있어야 하는 건가. 그건 아니다.

요즘 돌아가는 시츄에이션을 보아하니 누군가는 ‘곽노현타령’만 하고있고, 누군가는 ‘진중권타령’만 하고 있다. 검찰과 언론은 이 광경을 보고 졸라 흡족해 할거다. ‘지들끼리 저러고 있다’고 말이다. 항의와 논의(토론)은 명확히 하고 싸우자, 불공정한 이게임에 대해선 ‘항의’, 진중권의 문제제기에 대해선, 그리고 진중권에 문제제기에 대한 반론들에 대해선 논의(토론). 맨날 이걸 명확히 하지 못하고 가니 제대로 붙어보지도 못하고 진다. 아 열받아.

이게임의 심판은 퍼펙트게임을 날린 짐 조이스처럼 후회하거나 반성할 기미가 전혀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늦었지만 이제라도 안감독의 궁디는 좀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



그 이전에도 몇몇 독투에 글을 올리긴 했지만서도, 아마 이 글 덕에 슬슬 주목(?)을 받기 시작한 듯 하다. 그리고 이글은 내용에도 나와있듯이 춘심애비님의 '진중권의 주장에 대한 슬램덩크적 접근'에서 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몇개월이 지난 지금, 춘심애비와 그리고 딴지일보 편집부국장인 필독과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듣보 사모임을 결성, 간간히 체력테스트를 겸한 처형식을 거행하고 있다. 그 양반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어쩌면 이게 다 가카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몇개월 뒤가 궁금해지는 순간이로다.


춘심애비를 만나게 될줄 어찌 알았겠는가.



2012년 3월 26일 월요일

Prometheus

예고편을 이렇게 만들어 재낄수도 있구나.




과연 크리스토퍼 놀라의 배트맨과 같은 프리퀄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상황은 '아니다'에서 '가능성 있다'고 바뀌고 있는 듯... 그중 가장 시선이 냅다 꽂힌 이는 바로 주인공 누미 라파스 인데...




스웨덴 밀레니엄의 주인공이었던 누미 라파스. 리플리(시고니 위버)가 없는 에어리언 - 여전히 리들리 스콧은 에어리언의 프리퀄이 아니라 말하고 있다만 - 이 불안했던 것일까. 누미 라파스와 시고니위버의 싱크로율은 아무리 못해도 7-80%는 되어 보이는데... 변방의 여배우가 밀레니엄을 찍고 메이저에서 주목받고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데이빗 핀처의 '밀레니엄'의 리스베트역엔 오리지널 누미 라파스가 거절, 나탈리 포트만도 거절, 스칼렛 요한슨이 살짝 거론되었으나 너무 예뻐서 제외... 결국 소셜네트워크의 루니 마라에게 돌아갔다. 이발을 하고, 피어싱을 하고, 옷을 벗는 건 연기 변신이 아니라 그냥 '변신'이다. 그둘은 엄연히 다르다. 그런 점에서 볼때 본 리스베트 케이스는 '연기변신'이다. 누미 라파스의 리스베트에 간섭받지 않는 오롯한 루니 마라의 리스베트를 창조해 냈기 때문이다.


누미 라파스의 프로메테우스는 개봉을 앞두고 있고, 루니마라는 케더린 비글로우의 '킬 더 빈 라덴'에 출연이 예정되어 있다. 밀레니엄 덕에 두 여배우를 얻게 된 것이다. 문득 스크린에 함께 서있는 두 여인을 떠올려 본다. 왠지 그림만으로도 '델마와 루이즈'는 되어 보인다.



2012년 3월 21일 수요일

진보의 진보.




아내와 선배, 대학동기 한놈, 이렇게 넷이 치악산 밑으로 캠핑을 갔다. 가는 길에 비가 내리더니, 텐트를 치고나서 본격적으로 술판을 벌리기 시작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공기 좋은 곳에 텐트 치고 술먹기 시작하믄 이거 감당이 안된다. 평소 주량의 1.5배는 먹게된다는 게 진리. 게다가 겨울 캠핑장엔 사람들도 많지 않아 눈 내리는 소리가 우박 떨어지는 소리처럼 귀에 박힌다. 다행히 요즘 캠핑장비들은 상당히 괜춘한 터, 생겨울밤에 술 쳐묵하고 자빠져 자도 입 돌아가진 않는다. 진짜다.





다음날, 느즈막히 일어나 밥묵고, 또 잠깐 다자 일어나 근처 횡성한우마트에서 이것저것 사다 근사하 낮술판을 벌렸다. 몇잔 먹지도 못하고 안주나 축내다 잠에 들었다. 집에선 낮잠도 잘 자질 않는데, 밖에선 이렇게 잘 잔다. 신기하게... 그러다 다투는 소리에 깼다. 선배와 동기는 술에 질펀하게 취해 있었고, 아내는 옆에서 자고 있었다.

동기 : 형은 문제야. 왜 무조건 싫다고 그래.
선배 : 싫어, 싫은데 문제있어.
동기 : 도대체 왜 싫어, 그 선배 괜찮은 사람이라니깐.
선배 : 싫다니깐. 싫다고...
동기 : 경기동부출신이어서?
선배 : 그래. 왜. 그럼 안되냐. 경기동부여서 무조건 싫다고. 이제 됐냐.


둘의 논쟁. 아니 술꼬장을 한참을 듣고난 후 맥주를 한잔 따라 마셨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아 씨발 시끄러 죽겠네'

내가 그 둘을 좋아하는 이유는 술을 아무리 쳐묵해도 말을 잘듣는다는 것이다. 그 둘은 잠시 투덜거리다 이내 조용히 내가 끓여준 라면만 먹기 시작했다. 더이상 경기동부 얘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경기동부 얘길 할 일도, 들을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늘 트위터 타임라인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경기동부', 이 네글자를 보믄서 느꼈다. '올 것이 왔구나. 근데 참 늦게도 왔다.' 이렇게...


 
난리법석


크게 보믄 NL과 PD의 노선과 이념 차이가 문제라 했겠지만, 진짜는 NL 내부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경기동부'라는 앙꼬가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건 인천이건, 울산이건 마찬가지일 게다. 서로의 조직에 활동가를 보내는 일종의 '도장깨기'를 시도하기도 했으니 누가 잘했고, 누군 못했다 할일이 아닌거지. 더욱이 어제 오늘일도 아니고... 각자가, 혹은 서로를 같은 진보라 칭했고, 같은 세상을 꿈꾸었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뀐 세상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 였다.  정말 헌신하는 훌륭한 활동가들은 버티거나 소진되었다. 여전히 내가 아는 선배가, 동기가, 후배가 자신아닌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믄서 살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삶을 권력을 위해 동원하고 있다. 진보의 깃발아래 촌스런 정치판이 벌어진 것이다. 전국연합 시절부터, 민주노동당 창당 전후, 이후 내가 정리하고 나오기까기 1-2년동안 경기동부 얘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안타깝게도 그건 경기동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NL 전체의 문제였지.



나의 관등성명은 '조직일꾼'이었다. 허나 6-7년 후 탈영했다. 이념의 체득에 실패했고, 개인보다 조직의 운명을 우선시하는 프로세스를 감당하지 못했다. 전반적인 자질 부족이었다. 제대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 선택은 '튀는' 것이었다. 그렇게 '듣보스런' 내가, NL이니 지랄이니 떠드는 것도 우습긴 하다. 헌데 슬프고, 화가나고, 미안하다. 진심이다. 지금의 조직과 무관한 내가 이럴진데, 진심으로 헌신하는 활동가들에겐 어떤 의미겠는가. 정말이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일 게다.


 


정진후, 이정희, 윤원석들로 설명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충분히 권력화되어있는 조직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의 일부일 것이다. 권력은 이념을 뒤튼다. 뒤틀린 이념으로 발기한 권력을 많이 보아오지 않았는가. 밴드를 붙여서 나을 상처는 딱 그만큼의 상처이어야 가능하다. 꿰매야 할 상처에 밴드를 붙이는 건 이념이고, 노선이고, 조직이고 나발이고 그런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상처는 곪고, 주위는 썪는다. 그렇게 상처를 가리고 있다간 온몸이 썪는다. 적어도 상처를 드러내고 잘라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다행인 것이다. 여전히 지지하는 많은 이들의 외면을 원치 않는다면, 땀흘리며 현장을 누비는 활동가들을 잃고 싶지 않다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털고 갔으면 싶다. '지금은 총선 직전이니깐 일단 덮고 갈께요' 이러믄 너무 쪽팔리지 않은가. 결국 많은 이들이 진보의 진보를 바라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저 '진보의 진보', 이 요구가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2012년 3월 18일 일요일

연대의 원조.

족발은 물론이거니와 닭갈비, 순대국, 심지어 옥수수빵 진영에서도 끊임없이 '원조'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단도직입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지금 원조전쟁 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원조전쟁의 행동대장은 할머니, 이모, 누님등 다름아닌 여성. 그러나 누님이 털보와의 원조전쟁에서 승리한다해도 여성인권의 향상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냥 뭐 그렇다는 거다.




얼마전 백분토론에 나온 희룡형님께서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사이에서 맺어진 총선연대를 두고 참으로 '듣보'스런 연대라 한탄하셨다. 도대체 정당의 강령을 보기나하고 맺은 연대냐,  어디 선량한 국민들을 앞에두고 그런식의 권력 나눠묵기를 대놓고 할수 있느냐. 뭐 이런 의미의 투정이었던 같다. 하긴 새누리당, 그들이 어떤 분들인가. 시대의 연대, 연대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친박연대'라는 원천기술의 보유당이 아니던가. 어디 그뿐인가. 일찍이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연대라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하믄서 정의한 그들이 아니던가.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자. '새누리당과 한나라당은 달라요.'라 노래 부르지 마라. 최소한 민주당은 당명바꼈으니 당이 바뀌었다 대놓고 떠벌리진 않는다. 에라이



1990년 1월 22일 오전 10시 청와대, 민정당의 노태우대통령, 민주당의 김영삼총재,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모였다. 독재자이자 군인이었던 노태우, 독재를 반대한 김영삼과의 연대이자 연합이 이뤄진 것이다. 김종필은 독재의 주변을 어슬렁거렸던 분이 아니던가. 누군가는 어이없는 야합이라 했고, 누군가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계엄이나 강제의하지 않은 민주적인 여야통합이라고도 했다. 각자의 오리지널뤼티가 깨지고, 독재와 민주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선과악, 범죄와 정의의 구도가 무너지는 참으로 거침없는 연대, 연합이었던 것이다.

김영삼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영삼이 구하고자 했던 나라가 어느 나라였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그렇게 민자당이 탄생했다. 민자당은 신한국당이 되었고, 신한국당은 한나라당이 되었고,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이 되었다.





그러니 왠만한 연대는 성에 차지 않을 터. 이해한다. 그래 니덜이 원조다. 미안하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이나 쳐잡고 있어서... 그러니 앞으로 대놓고 큰절같은 거 하지 마라. 나이묵고 그렇게 힘껏 조아리다 잘못하믄 허리나간다.






2015년. 어느 날. 새로운 당명개정을 준비하는 새누리당에선 현역의원과 선배들이 함께하는 '새누리당의 밤'을 개최 했다. 그날 참가한 선배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이 직접 참가했으며, 박정희와 이승만은 실제 사이즈의 전신 사진으로 대신했다. 일부 현역의원들이 군바리 코스프레로 선배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종필, 이회창, 이인제등은 인근 포차에서 열린 '이방인의 밤'에 참석했으며, 그 포차의 이모는 다름아닌 '전여옥'이었다 전해진다. 강용석은 새로운 써바이벌 프로인 '나는 듣보다' 출연으로 인해 그 어느곳에도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고 한다. 

이명박은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 웃자고 쓴 글이지만,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선거연대는 뭔가 부족해도 한참은 부족해보인다. 불안해서 웃을 수가 없다.


2012년 3월 14일 수요일

The Black Keys & William Fitzsimmons

잘 만들어지고 자시고를 떠나,
가장 많이 듣는 앨범을 꼽으라 하믄,
The Black Keys의 El Carmino를 일단 뽑고,






한장 더 꼽으라 하믄,
William Fitzsimmons의 The Sparrow And The Crow를 뽑겠다.






들어보믄 아실테니, 왜냐고는 묻지 마시라...

블로그 이사.

그러고보니 웹진에 가까운 개인홈페이지에서부터 시작해 꽤 오랜기간 블로그를 해왔다.
간만에 이사 함 하자. 횡포틱한 네이버를 이젠 떠날때도 됐다구...

근데 언제 다 옮기지? 뭣 부터 옮겨야 하지? 근데 다 옮길 수는 있을까?

에거. 쉬운게 없다.

2012년 3월 9일 금요일

[좌충우돌세계사] 윌리엄 켐러, 로젠버그 부부 전기의자에 앉다(2)






트루먼 대통령이 원자폭탄을 능가하는 수소폭탄의 제조를 지시한 것이 1월, 조지프 매카시 의원이 주도한 빨갱이 사냥이 시작된 것이 2월. 한국전쟁 발발이 6월, 미국의 원자폭탄 기밀을 러시아에 넘겨주는 일에 협력한 죄로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그의 아내 에셀 로젠버그가 각각 체포된 것이 7월과 8월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1950년의 일이다.

검찰은 에설 로젠버그의 남동생인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이하 그린글래스)의 증언에 따라 로젠버그 부부를 기소했다. 그린글래스가 검찰조사에서 자신이 핵관련 기밀을 비밀리에 입수했고, 누이 부부, 즉 로젠버그 부부의 간곡한 요청으로 인해 자료를 넘겨줬으며, 넘겨받은 자료를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측에 전달했다 증언한 것이다.

당시 사건을 주도한 기관은 ‘지구대륙의 4분의 1과 전 인류의 3분의 1을 지배하는 무신론적인 공산당독재 정권’의 타도가 목표였던 J 에드가 후버(이하 후버)의 FBI였고, 재판을 담당했던 어빙 코프먼 판사는 후버와 절친(절친이라 쓰고 꼬붕이라 읽는다)이었으며, 당시 대통령 트루먼은 ‘트루먼 독트린’이라 하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원조하는 ‘공산당도 싫고’ ‘소련도 싫은’ 정책을 펴던, ‘이쯤 되면 막 나가는’ 바로 그런 시대였다.



 
로젠버그 부부


광기로 가득 찬 1950년, 맨하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클라우스 푹스라는 독일출신 물리학자가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그 후 연락책인 해리 골드가 엮였고, 자료를 유출한 넘으로 그린글래스가 엮였다. 그리고 그린글래스는 자신의 누나와 매형, 로젠버그 부부를 자신에게 모든 것을 사주한 제일 나쁜 놈이라 지목한다. 게임은 그렇게 신속하게 끝났다.

클라우스 푹스, 데이비드 그린글래스 징역 13년형.
줄리어스 로젠버그, 에셀 로젠버그 사형.





복습. 1890년 8월 6일 윌리엄 켐러가 사형수 최초로 전기의자에 앉잤다. 집행관의 착오로 1000볼트의 전기가 켐러의 몸 곳곳을 쑤시고 들어갔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당황한 집행관이 2000볼트로 몇차례 더 켐러에게 때려 부었다. 그렇게 켐러는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반면교사라 했던가. 이런 잔인한 방식을 교훈 삼아 인간이 체득한 거라곤 덜 고통스럽게 보낸다는 명분으로 2000~500볼트로 2-3차례 가해 편안하게 쇼크사 시킨다는 참으로 휴머니즘한 전기의자 처형 프로세스의 정립 바로 그것이었다.

윌리엄 켐러가 죽어간 그곳에서 멀지 않은 싱싱교도소, 때는 1953년 6월 19일. 먼저 남편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앉았다. 새롭게 개선된 처형 프로세스 대로 진행되었다. 다음으로 부인인 에셀 로젠버그. 그러나 그녀에겐 2-3차례 추가로 2000볼트가 가해졌다.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눈 뜨고 보지 못할 고통스런 처형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법정에서 후버의 절친 어빙 코프먼 판사는 ‘로젠버그 부부가 핵정보를 소련에 전달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렇기 때문에 살인보다 죄질이 더욱 흉포하다’는 덜 떨어진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FBI와 법원, 권력이 함께 만들어낸 판결로 인해 로젠버그 부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당시 재판 중 어빙 코프먼 판사에게 한 장의 서신이 전달된다. ‘로젠버그 부부의 유죄는 확실한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니며’ ‘설사 로젠버그 부부가 기밀을 전달했음을 시인했다 하더라도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보다 가혹한 형량을 받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고’ ‘과거 중요한 원폭 자료를 빼돌린 이들 중에도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므로 사형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서한이었다. 그러나 어빙 코프먼 판사는 검토는커녕 FBI의 후버에게  곧바로 ‘조공’해 버린다. 그 서한을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었다.



 
WIN-WIN의 좋은 예.




 

1918년 세계 1차대전에서 백기를 흔든 독일에선 빌헬름2세가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주변국들이 그러했듯,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자유민주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패전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등의 총체적 불황을 쉽게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혼란 속에 등장한 이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 여차저차 1919년 나치스에 입당한 히틀러는 1923년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 육군형무소에 투옥된다.

수감 중 출간한 ‘나의 투쟁’(나치사상 해설서)과 재판 과정을 통해 얻은 대중적 인기, 그리고 선동가적 기질을 바탕으로, 히틀러는 출옥 후 나치스를 재건했다. 나치스는 1930년 9월 시행된 총선거에서 사민당에 이은 제2당이 되더니, 1932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히틀러가 37% 득표율로 미스’선’ 아니 대통령’선’에 올랐다. 같은 해 11월 진행된 총선거에서는 나치스가 608석 중 230석(33%) 의석을 차지, 독일의회의 최대 세력이 된 후, 본격적으로 유대인과 마르크스 주의를 패키지로 엮어 탄압하믄서 본격적인 게르만제국주의의 시동을 걸어제낀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로 인정받던 아인슈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 탄압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 아니 유대인인 이상 그 또한 주요 제거 대상이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일단 그는 엄친아가 아니었다. 1879년 3월 14일 독일에서 매우 조용히 태어났으며, 엄친아의 기본조건인 수 개 국어 구사라는 기본 퍼포먼스도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니콜라 테슬라처럼 졸라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유럽 깊숙히 배인 반유대인 정서에 늘 괴롭힘을 당했다. 학교성적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으며, 주변에 화려한 절친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찌감치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뻥튀겨주는 스캇 보라스 같은 슈퍼에이전트도 없었다. 그는 그냥 수학을 좀 잘했을 뿐이다. 한 가지 그가 유독 싫어했던 것이 있다. 바로 통제와 관리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 징집을 거부하고 스위스로 뜬 것, 모두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



 
엄친아는 아니었다능.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물리학, 그러나 물리학을 시작한지 스무 해를 조금 넘긴 1921년. 그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된다. 광전효과, 브라운운동, 상대성 이론 등 가히 혁명에 가까운 이론을 발표한다. 동시에 양심적 병역거부, 무기개발 반대, 반나치 운동 등의 사회적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1932년 나치스의 유대인 탄압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자 아인슈타인 또한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었다. 독일군 총사령관은 ‘이제 더 이상 당신의 목숨은 안전하지 않다’는 내용의 서한을 통해 친절히 그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유대인과 히틀러 반대자들 색출, 폭행 등의 활동을
서슴지 않은 히틀러의 보이스카웃 ‘유겐트’


수많은 유대인 지식인들이 독일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독일 내 유대인들이 약탈과 폭행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며 아인슈타인 역시 불안해했으나 즉각 탈출 대열에 합류하진 않았다. 그 해 예정된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을 준비하며, 고향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예견하고 차분히 보낼 뿐이었다. 그러나 반대쪽 미국에서도 모두 그를 반긴 것만은 아니었다. 1918년 재력 있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름조차 애국스러운 ‘여성애국단’은 아인슈타인의 초청이 확인되자 곧바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 달갑지 않은 외국인인 아인슈타인, 조지 버나드 쇼의 입국을 반대한다.
  • 아인슈타인은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된 불순한 사상의 소유자다.
  • 국가와 교회, 과학적 원리를 부정해 혼란에 빠뜨린다. 특히 교회.
  • 끝으로… 영어를 못한다.
여성애국단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더구나 아인슈타인은 영어를 왠만큼 했다. 오렌지를 ‘어륀지’로 자연스럽게 발음하지 못하는 독일식 액센트의 소유자였을 뿐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비방에 의존한 미국무부가 아인슈타인 초청을 엎을 뻔도 했지만, 1933년 1월 12일, 아인슈타인 가족 일행이 탄 배는 캘리포니아에 무사히 도착한다. 미국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떠나온 독일에선 같은 달 30일 히틀러가 드디어 수상의 자리에 오른다.





수상에 오른 히틀러는 그 해 7월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한다. 세계2차대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1935년 군대의 현대화, 모든 남자사람의 군복무를 골자로 한 거대한 군국주의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당시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은 상대를 디스하기 바빴다.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증오했고, 스탈린을 독일을 자본주의 파시즘으로 규정했다. 헌데 뜬금없이 이 앙숙들이 1939년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그저 서로의 이해와 요구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쪽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쪽 모두 조졌다간 조땔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1차대전을 통해 학습한 터였다. 그리고 소련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연합과 손잡기보다는 차라리 독일과 일촌을 맺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해서 독일과 소련은 지들 사이에 낑겨있는 폴란드를 중심으로 유럽을 나누고 서로 사이좋게 나눠 갖자는, 대신 서로 싸우진 말자는 ‘쇼부’. 아니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이다.


 
쇼부치는 소련 외무부장관 몰트로브. 그리고 스탈린


모든 준비가 끝났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할 명분이 필요했다. 없는 명분을 만드는 방법은 하나다. 바로 ‘조작’하는 것. 히틀러의 지시에 의해 독일과 폴란드 국경에 위치한 글라이비츠 방송국이 털린다. 그리고 폴란드의 공격이라 공포. 침략자 폴란드의 동부를 친다.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는 서부를 친 뒤, 나란히 폴란드를 나눠갖는다. (정확하게는 서쪽의 1/3을 독일이, 동쪽의 2/3을 소련이)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듣보잡 히틀러’를 외치며 개입을 선언한다. 1939년 세계2차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독일과 소련이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은 그해 8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편지가 한통 전달된다.

루즈벨트 님하.

원고 형태로 나에게 전달된 페르미(E.Fermi)와 질라드(L. Szilard)의 최근 연구를 보고, 나는 우라늄 원소가 가까운 장래에 새롭고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발생한 상황의 특정 국면들은 예의주시되어야 할 것 같으며, 필요하다면 정부 쪽에서 신속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과 건의안에 대해 당신의 주의를 촉구하는 것은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이 새로운 현상은 또한 폭탄 제조로 이어질 것이며, 따라서 보다 덜 확실하긴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극도로 강력한 폭탄이 제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출처] 1939년 8월 2일,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에게 처음으로 보낸 편지 (『C.F.H』역사의 진실을 찾는 카페(세계사 & 국사 전문 카페)) |작성자 세계사광

b) 현재 대학 실험실의 예산 범위 내에서 실시되고 있는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그러한 연구기금이 필요하다면, 그 담당자가 이 사업을 위해 기부할 의향이 있는 민간인들과 접촉하여, 기금을 제공하고, 아울러 필요한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산업체 실험실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독일은 실지로 자신이 인수한 체코슬로바키아 광산들로부터 나온 우라늄 판매를 중지한 것으로 나는 알고 있습니다.(중략)
[출처] 1939년 8월 2일,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에게 처음으로 보낸 편지 (『C.F.H』역사의 진실을 찾는 카페(세계사 & 국사 전문 카페)) |작성자 세계사광

요약하자면 ‘독일이 우라늄 확보에 나서고 있다. 심상치 않다. 국가, 민간, 전문가가 나서서 핵무기를 개발하자’는 편지의 마지막엔 익숙한 이름의 서명이 들어가있었다. 아인슈타인이었다.



 
과연 원자폭탄은 이 편지 한 장으로 인해 만들어졌을까?




 

이렇게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론 그랬다. 1939년 시작된 원자폭탄 개발은 1942년 암호명 ‘맨해튼 프로젝트’라 이름 붙으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시기적으론 서유럽이 히틀러의 손에 들어갔고, 이탈리아와 독일이 대미선전포고를 했으며,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뒤였다.

1941년 컬럼비아대학 연구팀이 우라늄 조립을 완료했으나 이를 무기화하기 위해서는 톤 단위의 우라늄이 필요했다. 이에 별도의 우라늄 공급팀이 꾸려졌다. 미국의 주요 3개 업체가 참여했고, 그중 하나는 바로 에디슨과 전류전쟁을 펼쳤던 웨스팅하우스였다. 웨스팅하우스는 즉각 우라늄을 조공하란 정부의 요청이 있자마자 순식간에 공급망을 만들어 3개월만에 3톤의 순수우라늄을 공급했다.(웨스팅하우스는 얼마를 벌어제꼈을까. 도대체 무슨 수로 3개월만에 3톤을 퍼다 날랐을까? 상상 한 번 해보자) 우라늄이 준비되자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진 연구소에서 그 해 12월 원자폭탄의 기반이 되는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에 성공한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중심, 오크리지 공장에도 등장한 히어로 엉클 샘.



이후 우라늄을 가공해 핵분열을 쉽게 졸라 해대는 원소를 만들어냈고, 이 원소에게 지옥의 마왕을 뜻하는 플루톤을 빗댄 플루토늄이라 이름을 붙여준다. 풀루토늄이 준비되자 1945년 7월 16일, 미국은 뉴멕시코주 앨러배머 고도에서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은 성공적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이미 독일은 패전의 기색이 역력한 터였다. 미국의 입장에선 독일은 물론, 전세계가 두려워 할 원자폭탄을 손에 쥐었는데, 꽂을 상대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흥분하지 않았다.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 실험 성공 직후, 독일의 패전 도시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질, 중국의 장제스는 ‘일본이 즉각 항복과 항복 하지 않을 시 조땐다’는 내용이 포함된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다. 사실 이때까지 소련은 일본을 때려눕히기 위해 참전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뒤늦게 포츠담 선언에 가담한 소련은 훗카이도 분할 통치를 요구했으나, 막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의 대답은 확실했다. ‘조까’.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각각 리틀보이와 팻맨으로 이름 붙여진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포츠담 선언의 의거, 일본이 즉각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첫 번째 원폭이 있은 후 많은 이들이 트루먼의 결정에 항의했다. 이미 일본은 항복 일보 직전이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항의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원폭까지는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두 번의 원폭으로 12만 명이 죽었다. 미국이 이런 무자비한 결정을 내린 이유로 많은 전문가들은 소련의 2차대전 참전을 꼽는다.

미국은 가열찬 ‘스파이질’로 소련의 참전 결정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소련이 새로운 국제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를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미국은 사회주의 소련에게 원자폭탄이 있음을, 그리고 그 폭탄을 어디든 떨어뜨릴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철의 장막, 핵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소련의 스탈린 역시 전방위 ‘스파이질’을 통해 일본에 원폭이 떨어지기 전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상당 부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핵개발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가열한 ‘스파이질’은 늘 그렇듯 쌍방향이었다. 트루먼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는 원자폭탄의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의 몫이었다. 아인슈타인도 그중 하나였다.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에선 난리가 난다. 그렇게 빨리 ‘소련이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유는 온리 ‘정보유출’뿐이라 정부와 언론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빨갱이 색출이야말로 부국강병의 기본옵션이라 온몸으로 부르짖는 후버에게 절체절명의 미션이 주어졌다. 후버는 곧바로 다음과 같이 ‘간첩소탕’이란 오다를 내린다.


 
닉이 많으면 내용을 적을 수가 없다는 게 진리


1950년 2월 초 클라우스 푹스가 간첩 혐의로 영국에서 구속된다. 증거는 영국 정보부 요원의 증언과 클라우스 푹스의 자백뿐이었다. 푹스는 미국에서 소련첩자와 접촉하였으나 이름도, 인적 사항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근데 접촉한 넘도 모르는 넘을 FBI가 잡아낸다. 그리고 줄줄이 엮기 시작한다.

FBI는 우선 뻘건 색, 혹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관련된 이를 추려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곧이어 수사, 감시하기 시작하는데, 그 중 한 명, 바로 그린글래스가 걸려들었다. 이유는 그린글래스의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던 공장에 군인신분으로 참여한 기록과, 누이 부부가 ‘청년공산주의자동맹’ 회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1950년 2월 FBI는 약식 조사 후 감시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몇 달 뒤인 5월, 드디어 FBI는 만난 넘도 잘 모르는 넘을 잡아낸다. 바로 푹스가 접촉한 적이 있다는 첩자. 바로 해리 골드였다. 해리 골드는 영장도 없이 들이닥친 FBI에게 친절하게 모든 것을 맡긴다. 결국 변호인도 없이 ‘내가 바로 첩자라능…’ 이러믄서 자백문서에 서명한다. (이 과정에 대한 내용은 여전히 비밀이다) FBI가 손쉽게 얻어낸 간첩 해리 골드의 진술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내가 옛날에 푹스랑 접촉할 때 결혼한 밀뤼터리맨도 한 명 있었다능’

‘생각해보니 그넘이 바로 그린글래스였다능’

수사는 클라우스 푹스에서, 해리 골드로, 해리 골드에서 그린글래스로 신속하게 넘어갔다. 그린글래스의 간첩 혐의 증거랍시고 제시한 건, 해리 골드의 진술과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당시 공장에서 빼내온 우라늄 견본이 전부였다. 그러나 우라늄 견본의 경우 당시 참여한 이들 상당수가 기념으로 한두 개 정도는 빼내 오는 게 일상적 관행이었다. 허나 그린글래스 역시 친절하게 자신도 간첩이며, 이 모든 건 누이 부부의 사주 때문이었다고 진술한다. 곧바로 매형인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구속된다. 이 과정에도 역시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처남 그린글래스의 진술만이 유일한 증거였다.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완강히 혐의를 부인하자 FBI는 부인 에셀 로젠버그를 구속하여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자백을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자신이 스파이란 그 어떤 자백도 하지 않았다. 자백은 50년이 지난 2001년 그린글래스가 했다

 ‘검찰은 내게 구명을 약속했다. 그 약속을 믿고 난 거짓증언을 했다’ – AP통신

그러나 재판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여러 과학자들, 특히 노벨화학상 수장자인 해럴드 유리의 ‘전달했다는 도면은 허접하여 정보로서의 가치가 없다’, ‘위증에 근거한 비상식적인 기소’라는 의견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제 로젠버그 부부가 스파이긴 했지만 전달한 자료는 핵과는 상관없는 전파탐지기와 수중 음파탐기지였다는 내용이 담긴 베노나 보고서(미국의 암호전문가들이 러시아 정보부의 통신문을 해독한 것)는 1995년이 되어서야 공개되었다. 후버와 미국에겐 그저 확실한 희생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연행되는 데이비드 그린글래스 (좌)




 

FBI의 후버는 졸라 기분이 나쁘고 쪽팔렸다. 마음이 편치 않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소련이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데다, 그 원인을 ‘스파이’ 때문이라 떡 하니 설정해놓았는데, 그 시작이 될 클라우스 푹스가 영국에서, 영국정보원에게 잡혔기 때문이었다. 해서 후버는 클라우스 푹스와 연관되었을 ‘스파이’(?)를 색출하는데 몰빵했다. 공산주의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게다가 외국인(유대인)인 모든 인사들을 쑤시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인슈타인이 제법 적합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아인슈타인이란 거물까지 이어지기만 하면 ‘해품달’을 능가하는 전 국민적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과 클라우스 푹스를 엮을 만한 한 가지 근거가 있었다.

클라우스 푹스는 1942년 캐나다 외국인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으나 아인슈타인의 천거로 석방되어 맨해튼 프로젝트에 결합하게 되었다는, 클라우스 푹스 부친의 증언이 바로 그것 것이었다. 결국 FBI의 최종타겟은 로젠버그 부부로 향하긴 했으나 그들의 ‘망’에는 늘 아인슈타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버와 FBI는 증언 이상의 그 무엇도 밝혀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나름대로 로젠버그 부부의 구명을 위해 움직였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을 보냈고, 코프먼 판사를 설득시키기 위한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의 행동은 철저히 개인적이었다. 사면추진위원회 등 그 어떤 단체에 속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자들의 정치투쟁에 재판이 악용되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변함없었던 그의 성격이기도 했지만, FBI의 타겟이라는 부담이 작용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1951년, 로젠버그 부부는 항소심이 끝나기도 전에 싱싱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싱싱교도소는 사형수만이 산다는 ‘죽음의 집’이었다. 항소심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사형수가 되었던 것이다. 아니 클라우스 푹스가 구속되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일지 모른다. 시대는 진짜 스파이를 요구하기도 했고, 동시에 가짜 스파이를 요구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로젠버그 부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 해,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나이 35세, 에셀 로젠버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들은 그렇게 떠났고, 남아있는 많은 이들 중 하나였던 아인슈타인은 죽기 전까지 매카시, 후버와 끊임없이 싸웠다. 많은 사람들이 뻘건 칠을 당하며 탄압받던 시기였고, 후버의 FBI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거대한 조직으로 확장하고 있던 광기의 시대였다.

아인슈타인이 간첩이라는 수많은 정보가 수집되었지만 확실한 것은 없었다.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이 부당하단 문제제기는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정당했음이 확인되었다. 로젠버그 부부는 자신들의 두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그들이 무죄임을 언제나 기억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작을 가능케 한 서한에 서명한 것을 두고 ‘내 인생에 있어 한 가지 큰 실수’라며 후회한 아인슈타인은 후학들에게 아래와 같이 당부했다.

‘인간의 창조력이 인류에게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되도록 해야 하며 과학기술 연구에 있어 핵심문제를 풀기 위해 애쓰고, 노동과 재화의 분배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로젠버그 부부가 처형 당한지 2년 뒤인 1955년 4월 18일, 자신을 초청한 프린스턴 대학의 인근 병원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어느 곳이나 넘쳐나는 정치적 격정, 희생자를 요구한다’는 최고의 물리학자의 마지막 글 제목은 이처럼 정치적이었다.




그리고… 1392년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던 정봉주, 아니 정몽주는 선지교(훗날 선죽교)에서 처형, 아니 이방언에게 사주 받은 해결사에 의해 린치를 당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씨유레이러~


2012년 3월 8일 목요일

98년 이맘때 쯤...





98년 이맘때 쯤 새벽이었다. 눈이 떠졌다. 한기로 가득 찬 동아리방엔 나와 이제 막 입학한 후배 녀석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 꽤 많은 사람들과 술을 나누었는데, 차디찬 방에 남아있는 건 나와 후배 딱 둘뿐이었다. 입이 돌아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니 많이 들이 부은 게 확실했다. 속이 약간 거북했지만 괜찮았다. 수업은 아직 멀었고, 설사 수업이 있더라도 안 가믄 그만이었으니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누군가 동아리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 빨리 모이라는 것이었다. 뭐, 또 학교에 경찰이 들어왔나 싶었다. 새벽에 깨우는 경우는 대부분 그런 경우였다. 대충 굴러다니는 파카 하나 주워 입고 후배 녀석을 깨워 함께 문 밖을 나섰다. 새벽 봄 공기는 제법 아렸다. 학생회에 올라가보니 이미 열댓 명이 모여있었다. 표정을 보니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뭔가 심각한 일이겠구나 싶었다.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마시려던 생각을 접었다.




학교에서 버스로 3-40분 거리에 있는 재개발구역에선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주민 이십여 명이 주민센터를 점거하고 농성중이었다. 이미 개발에 만족한 일부의 주민들과, 대항할 수 없었던 수많은 주민들이 떠난 뒤였다. 대부분의 집들은 무너진 터였다. 오갈 데 없는, 참을 수 없었던 주민 이십여 명만이 폭탄이라도 한 방 맞은 듯한 앙상한 주민센터에 깃발 하나 꽂아 놓고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 어제 밤 용역깡패가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모인 사람 중에 여자를 제외하니 열 명 정도 되었다. 두세 명씩 버스로 이동한 뒤, 돌아서 3-40분 정도 걸어 농성장으로 들어가고, 들어가다 잡히믄 대자보 보고 왔다고 묵비권, 무사히 들어가믄 농성장에 합류, 용역깡패가 농성장을 칠 경우, 절대 싸우지 않고 ‘몸빵’하는 게 택이었다. 다행히 후배 녀석과 난 농성장에 들어갔다.


전쟁이 나면 이런 모습이겠다 싶었다. 모든 집들은 싸늘히 주저앉아 있었고, 곳곳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보다 더 공포스러웠던 것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였다. 입주민들이 베란다에서 이 곳을 바라보는 그 광경이 공포스러웠다. 인근 상가 간판에 아무렇지 않게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있는 이곳만 전쟁터였다. 무서운 침묵이었다.


속속들이 사람들이 도착했지만 그래 봐야 열 명이었다. 화목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지만 몸은 녹지않고 더 쪼그라드는 듯 했다. 겁을 먹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어제 밤부터 깡패가 보인다고 했다. 몇 조로 나누어 망을 보기로 했다. 사람이 많지 않아 멀리까지 가는 것은 위험했다. 다만 근처라도 함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우선 두 팀이 먼저 출발했다. 난로엔 계속 나무를 넣었는데 몸은 계속 추웠다. 겁이 났지만 겁이 난 티를 낼 수 없었다. 후배 때문이었다. 망을 보러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팀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창문으로 향했다. 밝은 이미 훤했다. 동이 튼 지, 시간이 흐른 지 몰랐던 것이다.


저 멀리 검은 차림이 사내들의 무리가 보였다. 몇몇은 각목을 들고 있었고, 몇몇은 웃장을 깐 맨몸이었다. 마치 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정말 겁이 났다. 무섭고 두려웠다. 용역깡패들끼리 나누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누군가 내려가자고 했다.입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을 제외한 열 명정도의 학생들이 입구를 막고 섰다. 때리믄 맞으라 했다.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아무렇지 않은 백 미터 앞 이 세상도, 여기 있는 내 자신도, 저 뒤에 있는 주민들도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아니, 눈 앞의 깡패가 너무나 무서웠다.




어제 밤, 강정의 소식을 들으며 문득 십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서웠다. 용산 때도, 대추리 때도 마찬가지였다. 늘 이런 일을 접할 때면 그때의 기억을 떠 오른다. 그리고 겁을 집어 먹는다. 그 때 이후로 난 그곳에 서보지 못했다. 늘 화면이나 누군가에게 전해 듣는다. 아니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고,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다. 무섭고 불편했다. 진심이다.


여전히 누군가 다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 뭔가 짓고 세우겠다고 사람을 죽인다. 이게 세상이면 세상은 언제가 나도 죽이려 들 것이다. 또 겁이 난다.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나 늘 뭔가 보태지 못한 채무감만이 남는다. 동이 트자 깡패가 들어왔던 것처럼, 동이 트면 폭파를 하겠다고 한다. 힘들지만 이번엔 똑바로 지켜보려 한다. 그리고 제대로 기억하려 한다. 제발 오늘 밤엔 강정을 지킨 많은 분들께 감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